“의인 열 명”이 없어서 한 나라가 망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마태 12,39), 이 시대를 표현할 다른 말이 또 있으랴.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악하고, 그런 자들을 지지하고 따르는 이 세대는 절개가 없다. 1년 조금 지났을 뿐인데 그간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수사와 기소를 반복하는 공포정치, ‘내로남불’의 사법농단, 언론탄압 및 길들이기, 천공의 국정농단, 처가 비리,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노조 탄압, 고물가 저임금 친자본 반서민 복지 부재로 인한 민생파탄, 반민족적이고 매국적인 굴욕외교,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한 반인륜적 지지,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는 외교 참사,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 10.29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참사 등등. 악하고 절개 없다는 말조차 부족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그중에도 가장 고통스럽고 슬픈 것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정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가 들어서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는다. 세월호 참사가 그렇고 이태원 참사와 오송지하차도 참사, 수많은 노동, 민생 관련 참사가 그렇다.
대통령 윤석열은 후보 시절에는 ‘공정’과 ‘상식’을 앞세웠다. 하지만 지금 공정과 상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역사, 종교 등등 한국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공정과 상식은 사라지고 윤석열과 김건희와 천공을 롤모델로 하는 약육강식과 각자도생, 기회주의와 이기주의만 활개를 치고 있다. 자연현상마저도 이러한 정부 아래서는 공평하지 않다. 폭우로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지난 며칠을 봐도 알 수 있다. 같은 지역에 폭우가 내려도 피해 정도는 집집마다 다르다. 저마다 처한 사회적 지위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자연현상도 차별적이다.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인간 삶에 자리하는 가치체계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대한민국 법이 적용되지만, 어떤 사람은 잔고증명서 위조나 분식회계로 수백억 혹은 수조 원을 훔쳐도 감옥에 가지 않거나 달랑 1년 형을 선고 받는 것으로 그친다. 이처럼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 각자에 이르러서는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또 다른 말로 ‘불공정’이라 일컫는다. 정의, 평등, 자유, 평화, 생명, 사랑, 인권 등,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 역시 불의한 권력이 만들어낸 불공정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선택적인 것으로 변하여 결국엔 가치 자체가 상실되고 만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윤석열이다. 그래, 어찌 됐든 그는 공정한 절차를 거쳐 국민의 손으로 뽑아 세운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다시 공정하고 의로운 절차를 거쳐 국민의 손으로 그를 치워버릴 수가 있다. 국민이 세웠으니 언제든지 국민이 허물 수 있다. 출범 1년여밖에 안 됐으니 더 두고 보자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다가는 나라 망한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윤석열 정권과 그 하수인인 정치검찰의 패악은 이미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어버렸다. 작년 10.29 참사 직후에 끝났어야 할 정권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허물어야 한다.
요즘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의미나 도리를 따지는 사람보다는 성공 가능성을 먼저 따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듯하다. “지금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뛰어간다고 해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 역대급 폭우로 피해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귀국을 미루고 해외순방 일정을 늘려버린 대통령의 행동에 대한 대통령실의 이러한 해명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거기에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24명의 사상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지역구부터 방문했던 충북도지사가 이렇게 말한 것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우리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이유와 전제가 되는 것은 ‘가능성’보다 다른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기에 지녀야 할 당연한 모습들, 인간이기에 찾아야 할 마땅한 의미들, 인간이기에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치들,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의 성패를 떠나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이 옳은 일이기에 되든 안 되든 끈질기게 그 일을 한다. 우리는 이를 ‘당위’라고 부른다.
침몰한 배 안에서, 침수된 지하차도에서, 거센 급류 속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생존가능성 때문만이 아니다.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시신만이라도 아니 조그만 흔적만이라도 건져내려는 그 마땅한 마음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당위성’이다. 가능성 중심의 시대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무모해 보이지만 마땅하고 당연한 일들을 이처럼 묵묵히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야말로 당위성에 가장 충실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자체가 우리의 삶을 가능성이 아닌 당위성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아닌가! 사실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오로지 사랑 하나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린 예수님, 권력의 무고한 희생자이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 자체가 세상이 이야기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전형 아니겠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이란 예수님의 이 모습을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로움으로, 무모함이 아닌 마땅함으로, 부질없음이 아닌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따르는 삶이기도 하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요구하는 표징 즉 돈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확실한 가능성을 보고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다시 말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셨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마땅한 믿음과 사랑, 그 당위성으로 희망하고 따르는 삶인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란 저 거대권력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다.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을까? 죄가 많아서? 아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다. 우리 노력으로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 미약한 노력이 소돔과 고모라를 살릴 수도 있었던 그 ‘의인 열 명’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작은 몸짓은 그렇게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당위성으로서 봉헌되는 것이리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악하고 절개 없는 자들 눈에는 부질없어 보일지 몰라도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이 작은 몸짓은 파렴치 윤석열 검찰독재를 반드시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용기를 내자.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