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한겨레, 2023.3.12.)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083243.html?_ga=2.123776015.480432360.1690807767-224284533.1684366304
사진출처(한겨레, 2023.3.12.)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083243.html?_ga=2.123776015.480432360.1690807767-224284533.1684366304

요즘 들어 가끔 이재명 혹은 민주당이 헛소리를 한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것 같지만, 실은 국민이 하는 것입니다“ 등이 그러하다. 이게 헛소리인 이유는 이번 헌법재판소에서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을 탄핵 기각처분 한 데서 드러났다.

이태원 희생자 두고 헌재는 ‘파면은 지나치다’로 판단했으나, ‘국민은 이상민을 파면했다’. 이태원 유가족은 “헌재 존재가치 부정”하기에 이르렀고, “국민 보호해 줄 법 없다”고 탄식한다.(한겨레, 2023.7.26.) 이들은 매일 “지옥 같은 날”을 보내며,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헌재에 마지막 호소“를 했으나, 매몰차게 문전박대당했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였던 것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구호가 헛소리인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이재명 혹은 민주당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 “정치는 정치가가 아니라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구호가 헛소리가 안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앞으로 “주인이 국민”인 나라를 건설해가자는 포부, 전망을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짖는 구호를 보면 딱히 그런 것이 아니다. 이재명이 단골로 내세우는 것이 ‘민생’이고 그 민생을 이재명이 지키겠다고 한다. 여기서 지켜주는 이는 이재명이고, 국민 민초는 그 수혜의 대상이 된다. 자기가 직접 관장하지 않고 대접받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객(손님)’이다.

이재명은 한편으로 “민생 회복 추경, 경제도약 추경, 취약계층 추경”, “현 윤석열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 “힘겨운 국민의 손을 국가가 잡아드려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통령은 세상을 알아야 하고, 국정을 알아야 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관료를 조직하고 통제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냐고 물으면서 그 배경에 이재명의 사진을 담았다. 그 뜻은 지금 윤석열이 못 하는 것을 이재명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재명 및 민주당의 구호는 민생을 도울 수는 있겠으나, “국민이 주인인 나라”, “정치가 아닌 국민이 정치하는 나라”를 만들지 못 한다. 민생 챙기는 것과 국민이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재명은 여전히 국민이 아니라 정치가가 정치하는 나라를 꿈꾼다. 힘겨운 국민의 손을 ‘국가’가 잡아드려야 한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그때 국가는 국민이 아닌 이재명 같은 정치가이다. 국정을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등은 국민이 아니라 정치가가 하는 것이다. 다만 윤석열이 이재명으로 교체될 뿐이다.

“대통령이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재명이 세상을 알아서 잘 통치하겠다는 뜻일 뿐, 국민 민초는 세상을 몰라도 된다는 뜻이다. 이재명이 알아서 잘 하겠다는 뜻이다. 이재명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그의 지론은 국민이 정치하는 나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정치가가 주인이고 국민은 객이 되는 나라이다. 그래서 이재명 및 민주당의 구호는 헛소리가 된다.

이재명이 내거는 구호는 사실 헛소리가 아니라 무서운 독재의 사고방식이다. 힘겨운 국민의 손을 ‘국가’가 잡아드리는 나라, 나아가 대통령이 “관료를 조직하고 통제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드는 나라”는 중앙집권적이고, 이런 구조는 쉬 독재국가로 전락한다.

민주국가는 국가(정치가)가 국민의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힘겹지 않은 삶을 모색하고 행동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힘겨운 나라는 국가가 그 손을 ‘잡아드리기’ 전에 이미 비민주적인 나라이다. 그 비민주화는 한 인물의 정책 향방 이전에 권력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이재명의 구호에는 국가와 국민이 이원화되어 있다. 이재명의 말대로, 정치가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고, 정치하는 나라는 ‘국가(정치가’가 국민의 손을 잡아드릴 필요가 없고, 국민이 손잡아드릴 객체가 되지 않으며, 국민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주인인 국민이 ‘손 잡아드리는’ 시혜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될 때, 그것이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시럽(단 것)급여’ 논란도 적자가 아니라 서자 취급받는 것, 모든 주권의 원천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마치 부당하게 받아왔던 것처럼 취급받는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를 받아서 어떻게 쓸 것인가를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부자들 감세해주고, 얼마만큼 실업급여를 주어야 하는가를 국민이 투표해서 직접 결정해야 한다.

그러면 얼마를 ‘시럽’급여로 책정하고 또 그것을 어디다 쓸 것인지 하는 것도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명품을 사든 뭐를 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실업’급여가 ‘시럽’급여로 폄훼되지 않아도 되고 누구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내가 결정하여 내가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전선언도 마찬가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윤석열이 무슨 소리를 하는데, 그게 맞나 틀리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절대 정답은 있을 수가 없다. 누구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세상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결정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어려운 논리가 아니다. 윤석열을 욕할 것이 아니라, 결정권을 되돌려주지 않는 국회를 욕해야 한다.

개인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다. 윤석열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이며 관여할 수 없다. 생각을 고쳐먹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는 만큼 헛소리가 된다. 왜냐하면 남의 말을 듣고 고치려 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윤석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정의 권한을 빼앗으면 된다. 누가 뺏있아야 하나? 물론 결정권을 뻬앗긴 이가 뺏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그래서 윤석열을 욕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런 질곡에서 어떻게 결정권 자체를 빼앗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도 윤석열 같은 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 김남국이 언젠가 대선후보 당시 윤석열을 두고 한 말이 있다. “박근혜 몰아냈는데, 다시 ‘업그레이드 된 박근혜’(윤석열)가 나올지 누가 알았겠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석열이 끝인가 했더니, 윤석열 다음에 또 누군가가 ‘업그레이드 된 윤석열’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이상민 탄핵 기각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헌재의 결정은 민심을 담지 못했고, 배반당한 민심은 하릴없다. 이재명의 ‘민생론’은 여전히 정치가 중심의 권력구조를 전제로 한 것이고, 정치에서 배제당한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자영 주주  paparuna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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