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행진에서 만난 구와노야스오상(맨 오른 쪽). 필자는 그 왼쪽, 맨 앞 왼쪽 이원영 단장
일본 행진에서 만난 구와노야스오상(맨 오른 쪽). 필자는 그 왼쪽, 맨 앞 왼쪽 이원영 단장

1. 대장정의 시작

인류의 삶의 터전인 바다가 핵폐수로 오염될 위기 상황을 맞아, 그것을 저지하려는 대장정의 발걸음이 있다. ‘서울에서 도쿄까지, 방사능오염수 방류중지 한일시민도보행진행사가 그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86(두 달 26)동안 1600km를 걸으면서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과 유력인사들의 방류 저지를 위한 간곡한 뜻을 서간문집에 담아 일본 국회와 내각, 그리고 한국국회와 정부에도 전달코자 한다.

이 대장정에 앞장 선 행진단장은 이원영교수(전 수원대, 도시계획전공, 국토학교교장)이다. 그는 지리와 도시에 밝고 일본인들과도 말이 통하며, 오래 전부터 생명과 탈핵운동을 하면서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했기에 이번 대장정에 나설 수 있었다.

대장정은 6.18.광화문 이순신장군상 앞의 기자회견으로 시작 되었다.

 

도보행진 출정 기자회견(광화문 이순신장군상 앞)
도보행진 출정 기자회견(광화문 이순신장군상 앞)

그날 이원영 교수는 붓으로 쓴 출사표를 발표했다. 행진자들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나 매일 아침 행진 시작전 그 출사표를 낭독한다. 그 출사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폐수 방류 반대 도보행진 출사표(이원영 단장 서)
핵폐수 방류 반대 도보행진 출사표(이원영 단장 서)

필자는 6.18. 출발 기자회견과 다음 날의 행진에 참여하였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행진 일정인 7.15. 부산출정식에 가서 발언 및 행진을 하였다.

“~촛불행동 운영위원이기도 한 정영훈입니다. 일본정부가 지금 핵폐수라 할 수 있는 오염수를 인류 공동의 삶의 터전인 바다에 투기하려는 것은 임진왜란, 조선 강점, 태평양 전쟁 등에서 보여준 침략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윤석열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부라 할 수 없다. 일본의 총독정도의 역할이다. 김건희씨는 얼마전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의 문제를 말하며 그것을 줍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플라스틱보다 훨씬 위험한 핵 오염수 방류를 지지하는 입장에 비추어 그것은 매우 허위적이고 위선적이다.~“

https://v.daum.net/v/20230715222723040  (KBS부산, 이원영 단장 인터뷰 등)

2. 의로운 일본인 구와나상과의 만남

필자는 15일밤 시모노세키행 승선권을 구하지 못해 16일 밤에서야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인 구와노 야스오(楸野 保雄)님을 만난 것은 7.17.아침 신시모노세키역에서 하부역까지 행진할 때였다.

올해로 75세쯤 되신 구와노 선생은 핸드마이크를 들고 맨 앞에 서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없이 뚜벅뚜벅 걸으며 일본말로 주변의 시민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씀 하셨다. 필자가 일본말을 몰라 나중에 우리 말로 옮겨 받은 말씀을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原發反對: 원전 오염수 방류 반대!  오염수를 흘려 보내지마!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염수 방류 중지를 요구하는 일한 시민 도보 행진단입니다.

후쿠시미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러 보내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고, 반드시 국제 재판소에 고소 당해서 질 것입니다. 재판에 져서 일본은 파멸할 것입니다.

오염수는 절대 흘려 보내지 마세요!“

이러한 핸드마이크 방송은 다음날 행진에까지 이어졌다.

구와노상은 행진대를앞장 서 핵폐수 방류 반대 방송을 하신다.
구와노상은 행진대를앞장 서 핵폐수 방류 반대 방송을 하신다.

그 분은 한국말도 곧잘 하셨다. 한국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 한글을 일부러 열심히 배우셨다고 한다. 그 분은 닉고리회라는 단체의 시모노세키 대표이기도 하다. 닉고리회의 고리는 코리아의 의미이며, 25명 정도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닉고리회분들은 한국의 역사, 특히 현대사를 공부하고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차별 반대 운동을 지원한다.

최근에는 일본 국적의 한국인 2세가 당한 불법부당한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일본의 한 회사가 산업폐기물인 토사물을 한국인 2세 소유의 땅에 몽땅 투기해버렸는데, 시모노세키시청에서 나몰라라 한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해자를 도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양심과 정의감이 살아있는 훌륭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만 생각하는 오늘날의 수 많은 보통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3. 인터뷰

필자는 그 놀라운 일본인에 감동하여 그 날 1차 행진을 마친 쉬는 시간에 구와노상과 인터뷰를 했다.(일부 불분명한 내용은 필자가 맥락에 맞게 의역한 부분들이 있음을 양해 바란다. 구와노상께서도 모든 말씀을 경어로 하셨는데 필자가 일부 평어로 쓴 부분도 있음을 밝힌다.)

필자(이하 필) :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친일파 한국인들도 못하는 조선과 한국을 위한 이러한 활동에 참여를 하게 되셨는지요?

구와노(이하 구):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보면 우리들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현대사에서 일본은 가해자이다. 가해자이지만 반성도 없고 보상도 없다. 한국인 2, 3세까지도 차별을 해 온 것이 현대사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민으로서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 생각의 배경이 된 현대사를 언제 그렇게 특별하게 공부를 하셨어요?

: 현대사 공부는 여러 방식으로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제빵사 지원을 했을 때 역사를 공부할 기회도 있었다. 그 후에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를 보았고, (어떤 사람들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더 공부할 생각을 했다. 일본과 한국의 문제 그런 것을 공부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되는 활동을 하고 생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 원래 직업, 무슨 일을 하셨어요.

: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공기업인 NTT(나중에 알아보니 종합적으로 일본 최대의 기업으로 평가)에 취직을 했다. 거기에 노동조합이 있었어요. 노동 조합에서 여러 가지로 활동을 했는데, 어느날 그 회사가 민간 회사가 되었어요. 민간 회사에서는 노동운동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두고 야간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공부하고 교사자격증을 받기도 했는데, 교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여러 가지 일을 했고, 아직도 하고 있어요.

: 자유롭게

: .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한국인)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죠. 2007년에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스톤 워크 코리아라는 평화를 위한 활동을 했는데, 거기에 적극 참여했다.

글을 쓰면서 스톤 워크 코리아를 검색해 보고서야 그 국제적 활동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스톤 워크 코리아’: 국제반전평화순례 : 스톤 워크&코리아 2007, 전쟁피해자를 추모하며 평화의 길을 걷는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답사하면서 유족들의 고통과 역사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한국?일본?미국의 시민이 화해하고자 노력합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우고 각 지역의 시민들과 교류하면서 이 활동이 비정치적인 모범의 실례가 되어 남북의 평화통일과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사람들의 우호에 공헌하고 평화를 가꾸는 일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경위)

1999년 미국에서 시작한 '스톤 워크 운동'은 피폭60년인 2005년 여름, 원폭으로 희생당한 사람이나 여러 전쟁으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을 추모하고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1톤의 비석을 끌며 행진했습니다. 비석은 길이 1.6M 115cm로 약 1톤이며, 손수레와 함께 총중량 2.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약 600킬로. 이 비석을 운반하여 히로시마에 세웠습니다.

'STONE WALK IN JAPAN'은 미국의 평화단체인 [피스아비][피스플투모로우즈]라는 단체(9.11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이 미국정부가 9.11사건을 구실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시민의 살해를 중지하라고 평화운동하는 유족모임)와 함께 일본찬동자 1,500여명, 미국에서 수십명이 행진에 참가했습니다.

(전체 설명) https://pann.nate.com/talk/114719057

그때 알게 된 역사적 사건으로는, (일본이 항복 후) 한국인들이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사람이 많이 타고 짐을 많이 실은 작은 배가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어져서 100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실이예요.

: 그 배 이름이 뭐였죠? 혹 우키시마호?

: 그 배 이름은 몰라요. 우키시마호는 아니고

: 그러니까 당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고와 한국인 희생이 많았다는 말씀이죠?

: . 그 사건 묘지가 오다야마 묘지인데, 그 묘지와 관련하여 많은 노력과 일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구와노상의 긴 설명을 잘 못 알아들어, 이 기사를 쓰면서 오다야마 묘지를 검색해 보고서야 눈물 쏟아지는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오다야마 묘지(御霊屋墓地)>

(지역)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후카마치 1정목 11

(정의)

1945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 중 고쿠라 지역에서 조난 당해 희생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조성된 묘지.

(개설)

오다야마 묘지는 1945917일 귀환 도중 태풍으로 조난 당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기타큐슈시[北九州市] 와카마츠구[若松区] 후카마치[深町]에 있는 시영(市營) 공원묘지 안에 조성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74년에 세상에 알려졌으나 또 다시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이래 일본 내 7개 시민 단체가 연대하여 기타큐슈시 당국과 협의한 결과 199012월에 추도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1994년에 일본어와 한글로 된 설명판이 설치되었다.

(건립 경위)

1945917일 재일 조선인의 귀국을 위해 출항한 배가 918일 밤에 초대형 태풍 마쿠라자키[枕崎]를 만나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안세[安瀨]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전복되었다. 다음날 아침 고이시[小石], 와카노우라[脇の浦], 와키타[脇田] 인근 해안에는 몸뻬, 작업복 등을 입은 100여 구 이상의 조선인 시신이 밀려 들어왔다. 이들이 어디에서 출항한 사람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지쿠호[筑豊] 탄광이나 야와타 제철[八幡製鐵] 등 기타큐슈 지역으로 강제 동원된 재일 조선인과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약 80여 구는 고이시 해안에서 가까운 시영(市營) 공원묘지인 오다야마 레이엔[小田山靈園] 동쪽 언덕 약 300의 빈 땅으로 운반되어 매장되었다.

(변천)

19459월 한반도로 귀국 중 고쿠라[小倉] 지역에서 조난을 당해 희생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에 조성된 묘지이다. 1974년 봄 일조협회(日朝協會)에서 추진된 규슈 지방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조사단의 조사 때 인근에 살던 엄정남(嚴正男)의 증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상황에서 1981529일 일본조선우호협회 기타큐슈 지부장 마츠모토 요이치[松本洋一]이 기타큐슈 공원 녹지과에 유골의 수습과 확인, 유족 조사와 공지, 시 주관 하의 안치와 추도비 건설 등에 대해 교섭하였다. 하지만 조선’, ‘강제 연행등 표기 문제를 비롯한 각종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다가 8년 뒤인 1989젊은이와 강제 연행지를 더듬어가는 순례반전·반핵·반원발을 생각하는 회전쟁의 발자국을 더듬어 본다는 기획으로 인해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들 단체를 비롯하여 민족 차별을 없애는 시민연락회의’, ‘지문 날인 제도를 철폐하는 회(기타큐슈)’, ‘일본 기독교단 기타큐슈 지구 인권 위원회’, ‘갑산 사건 구원회7개 시민단체가 1990년 정식으로 와카마츠 구청 건설국에 추모비 건설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 당국과 몇 가지 조정 끝에 그해 198912월에 기타큐슈시 명의로 오다야마 묘지 내에 조선인 조난자 추도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오다야마 묘지 추도집회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어 매년 일본인과 한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 집회가 개최되고 있다. 1994년 여름에 일본어와 한글로 된 설명판을 설치하였다. 이때 조난당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규슈 조선 고급 학교[九州朝鮮高級学校] 학생들이 민속 무용을 추기도 하였다.

(구성)

추모 위령비 외에 묘지 주변에는 무궁화가 조성되어 있다. 한국 민족예술인총연합 부산지부에서 솟대를 세워 부산항을 바라보며 영혼을 달래고 있다.

구와노상이 서툰 한국말로 필자에게 설명한 것은 바로 이 묘지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일본인 구와노씨 등이 그렇게 애를 써서 이 피 맺힌 사연의 묘지가 조성되었는데, 한국인으로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데 대해 심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메세지를 쓰신 구와노상
메세지를 쓰신 구와노상
구와노상이 쓴 명필명문-후쿠시마 원전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안된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 잘못을 반복하면 안된다. 23. 7. 16. 구와노 야스오
구와노상이 쓴 명필명문-후쿠시마 원전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안된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 잘못을 반복하면 안된다. 23. 7. 16. 구와노 야스오

: 그런 활동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많이많이 도움을 받았어요.

필: 그러면 그런 활동 하시는 과정에서 알게된 한국인 중 (이원영 교수님 외) 좀 대표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어떤 분이 있나요?

: 다른 활동 과정에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알지는 못했고, 나중에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김종수씨를 만나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다.

김종수: 한국 천안시 기독교 목사. 기억과평화를위한1923역사관장, 간토학살 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집행위원장([엿장수 구학영](김종수 저)으로 본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일관계 :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 초청 강연 등)

: 예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활동하셨군요.

(실례지만)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 1948년생입니다.(75)

: 1945년 해방, 그러니까 일본 패망 후 세대시군요.

선생님한국어는 또 언제 이렇게 배우셨어요.

: 80년대에 재일 코리안과 만나서 네 사람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NHK, 라디오 강좌(?)도 들으면서 한국말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는 회사원이었습니다. NTT. 나중에 기술혁명이 있었고, 회사를 구조조정 하거나 합리화 한다고 하면서 민영화가 되고 그러면서 직장을 그만 두었죠.

: 그 뒤로는 그냥 자유롭게 여러 가지 하셨고

: (생활을 해야 하니까) 일을 하면서 야간 대학교에 갔습니다. 야간대학을 5년 동안 다녀서 교사 자격증을 받고 졸업했습니다.

: ,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이번에 지금 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활동에 참여하게 되셨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참여를 하게 되셨는지요?

: 후쿠시마 오염수 반대 운동은 일본에서는 아직 별로 없어요. 저는 카미노세키 원전 반대 운동 등을 쭉 계속해 왔어요. 그래서 원전 오염수 방류 반대도 빨리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원영 씨가 그런 행동 한다고 듣고, , 이것은 꼭 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 아유, 어쨌든 대단하십니다. 하여간 너무 대단하시고... 일본에 이런 분들이 많아야 되는데 극소수죠 소수.

: , 매우 드물죠.

: 그 쉽지 않은 일이죠. 쉽지 않아요. 이렇게 선생님처럼 하는 게. 하여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좀 효과가 있을까요?

: 서울 교수님이 이번에 그런 행진을 한국에서 시작해서 일본에 오셨습니다만 그런 행동이 일본인에게 우리들은 뭐라고 하고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줍니다.

우리들은 후쿠시마 오염수 반대 운동을 해야 하는 거죠. 해야 하죠. 우리들의 책임이 있어요.

원전 관련 월수금 운동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반대해야 한다, 그런 것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 그러면 그런 분들하고 연계를 하실 건가요?

: 아직 연결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점점 늘어가야 한다. 늘어갈 거예요.

: 닉고리회 대표시고 25명 회원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후쿠시마를 주변으로 해서 어민들은 이 방류를 많이 반대하잖아요. 그분들은 시위도 하고, 그런 것 같던데 그런 분들하고 연계가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 후쿠시마는 여기서 너무 멀어요. 저 끝이죠.

: 네네, 그러니까 신문 방송을 통해 정보 전달되어야 하는데... 잘 보도를 안 하죠?

구: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보통 일본인들은 후쿠시마 뭐 끝난지 알아요. 문제 없지 않나... 별 문제 없다... 일본 (서편) 지방에서는 후쿠시마는 잘 모르는 상태야.

그렇지만 후쿠시마 인터넷으로 잘 보면 후쿠시마의 그런 집회가 있고 그런 이야기가 있으니까, 역시 문제 크다 큰 문제가 있다. 그런 것을 알 수 있어요.

: 네 인터넷이라도 많이 많이 봐야 되는데...

: 보통 사람들은 시간 내서 그런 것을 할 사람이 많지 않아요.

: 그래도 여론조사로는 일본인 40프로는 이 오염수 방류를 반대한다고 하던대요. 일본인 40프로, 한국은 80프로, 85프로 정도가 반대를 기본적으로 하는데, 그래도 일본인 40프로면 상당히 많다고 보거든요. 반대가.

: 그거는 정말로 정말은 사실을 모르니 그래서 약 40프로 밖에 안나옵니다.

: 알면은 엄청 올라간다. 그러니까 잘 몰라도 이 정돈데 알면은 엄청 올라갈 것이다, 반대가. 그럴 수 있죠. 그거 참 어디든 언론이 문제기는 문젠데. 한국도 그렇고.

하여튼 참 좋은 말씀 많이 들었고 제가 뭐 가능한 대로 한번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구와나 선생은 다음날 조세이탄광 기념지에서 다시 만났다. 그 기사는 별도로 쓸 에정이다.)

구와노-이원영. 구와노야스오 선생과 이원영단장. 이원영 단장에게 구와노상은 탈핵동지이다. 이 단장은, 그가 없었다면 일본에서의 탈핵순례와 행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구와노-이원영. 구와노야스오 선생과 이원영단장. 이원영 단장에게 구와노상은 탈핵동지이다. 이 단장은, 그가 없었다면 일본에서의 탈핵순례와 행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4. 맺음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따르고 숭배하다시피하는 한국의 친일종족주의자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성이 있는 사무라이의 유전자를 가진 룬걸희 정권과 그 주구들 등 숭일 반민주 반민족 토착왜구, 수구기득권 세력들은 이 의롭고 양심적인 일본인 구와노상 같은 분들을 보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일제의 침략과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를 입은 선조들의 피맺힌 절규에 사람으로서 동포로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한반도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

서울~도쿄까지 1600KM 도보행진길 지도. 필자 등은 9.8.경 다시 일본에 가서 행진의 대미를 함께 장식할 예정이다.
서울~도쿄까지 1600KM 도보행진길 지도. 필자 등은 9.8.경 다시 일본에 가서 행진의 대미를 함께 장식할 예정이다.

#정영훈: 촛불완성연대 대표/촛불행동 운영위원 외

편집 : 정영훈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정영훈 객원편집위원  jyhkjm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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