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랜만에 만나도 언제나 반겨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보배와 마린이인데, 어머니 댁에 가게 되면 문앞에서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달려드는 녀석들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서로 짖어대며 아웅다웅하는 건 여전하다. 이 모습을 보면서 문득 50년 전으로 기억을 되살려본다. 대학 1학년 교양과목으로 오발탄으로 유명한 작가인 이범선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글짓기 과제를 주시며 의미가 있는 이름을 떠올리면서 원고지에 적어오라신다. 

며칠을 생각한 끝에 집 마당에서 기르던 강아지 이름을 제목으로 몇 자 끄적거려서 원고지에 옮긴 후에 제출하였는데, 그런대로 좋은 학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때 작성했던 메모지를 발견하고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무척 반가웠다. 그 메모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아래에 적는다.

약 50년 전에 작성했던 '재둥이' 초안 메모지 - 최근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발견
약 50년 전에 작성했던 '재둥이' 초안 메모지 - 최근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발견

꽤나 시끄럽게 짖어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을 것을 던져 주며 같이 있어 줬더니 그렇게도 얌전하던 놈들이. 밖에서 연탄을 들이는 모양이다. 일하는 아이가 한 손에 2장씩 그러니까 한 번에 4장씩 나르고 있다. 200장을 나르자면 50번을 창고에 들락날락해야만 한다. 그때마다 짖어대야 하니 목이 너무 아플 것 같다. "빠삐"하면서 소리를 치면 조금 조용한듯 싶다가도 아이가 그 옆을 지나가면 영락없이 또 짖어댄다.

큰 놈은 '빠삐' 작은 놈을 '재둥이'다. 빠삐라는 이름은 내가 붙여준 것인데 처음엔 영어인 파피(Puppy)라고 했다가 요즘엔 부르기 좋게 빠삐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작은 놈은 어머니께서 붙여 주신 것으로 재롱을 잘 떨어서 '재롱동이'로 했다가 한 글자를 빼내고 '재동이'로 부르다가 다시 '동'을 '둥'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마린이'의 모습 - 옛날 '재둥이'의 모습을 연상
'마린이'의 모습 - 옛날 '재둥이'의 모습을 연상

큰 놈은 우리 집에 데려온지 약 1년 6개월 정도로 데려온지 6개월 정도 된 작은 놈에 비하면 제법 점잖다. 가끔 서로 장난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싸움이 나면 대개 큰 놈이 양보하는것이다. 어떤 때는 재동이가 빠삐의 집에 들어가서는 제 집으로 들어가려는 빠삐를 못 들어오게 캥캥 짖고는 한다. 그래도 빠삐는 그대로 집 밖에 쭈그리고 앉아 버린다. 그러면 재동이 역시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요즈음 큰 놈은 문 앞에 매어놓고 있고 작은 놈을 풀어 놓아 기르고 있다. 어쩌다 검둥이 빠삐에게 먹을 것을 던져 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재둥이가 재빨리 그것을 먹어 치운다. 그걸 알고서 한 번은 한쪽에다 재둥이를 앉혀 놓고 똑같이 먹을 것을 던져 주었더니 재둥이 녀석이 제 것을 얼른 먹고는 다시 빠삐에게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두고 봤더니 역시 먹는 데에는 양보가 없었던지 잠시 후 재둥이가 "캐캥"하며 기겁을 해서는 부엌으로 들어가 낑낑거린다. 부엌은 재둥이 거처다. 언제부턴가 부엌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자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 집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보배'의 모습 - 약 50년 전 '빠삐'의 기억을 소환
'보배'의 모습 - 약 50년 전 '빠삐'의 기억을 소환

벨소리가 울린다. 식구 중의 누가 온 것이다. 조그만 놈이 재빨리 뛰어가서는 대문 밑으로 기어나가 바지가랭이를 물고 놓았다가는 팔딱팔딱 뛰고는 한다. 두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 이번에는 큰 놈이 야단한다. 그럼 이번에는 큰 놈 순서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양 손으로 한 손은 작은 놈, 한 손은 큰 놈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문제는 손에 물건을 들고 있을 때다. 웬만한 물건이면 그대로 땅에 놓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문지방 안으로 들여놓고는 다시 문가로 가서 쓰다듬어 주고 오곤 한다. 또 식사시간에 밥 먹느라 재둥이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재둥이가 아직은 방에도 들어오고 있다.  그러다가 틈이 나면 재빨리 사과 한 토막이 그 작은 입에 얹혀 있음을 볼 때가 종종 있다. 그 때마다 매를 때려주곤 하지만 그 후 며칠 간은 나를 보기만 하면 피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해서 또 먹을 것을 던져주고는 한다. 

오랜만에 만나도 금방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 보배와 마린이 - 빠삐와 재둥이의 모습을 재현
오랜만에 만나도 금방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 보배와 마린이 - 빠삐와 재둥이의 모습을 재현

마당에는 꽃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그런데 그 중 몇 개는 꽃잎이나 잎사귀들이 여기저기 뜯긴 채로다. 그것도 재둥이 짓이다. 심심하면 가서 물고 늘어지니 그럴 수 밖에. 우리 막내는 특히 재둥이를 귀여워해준다. 한 번은 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옆에 와서 쪼그려 앉길래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위에 재둥이를 올려놨더니 막내가 다칠까 무섭다고 빨리 내려놓으라고 한다. 더 놀려주고 싶어서 번쩍 들어 올려 놓은 순간 캐캥하는 소리와 강아지 털이 밥상 위로 튀었다. 재둥이는 놀라서 부엌으로 도망가는데 보니 세발로 걷는다. 살살 달래서 발을 보려니까 뒷쪽 왼발을 펴려고 하지 않고 신음소리만 계속 낸다. 내 얼굴은 당황과 죄책감으로 붉어졌고 조심스레 머어큐롬 약과 핀셋을 가져다가 다친 곳에 발라 주고는 억지로 먹던 밥을 마저 먹었는데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가 않는다.

하찮은 짐승일지라도 너무나 큰 실수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나의 행동이었던 것 같다. 막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날은 그럭저럭 보냈다. 그 다음날도 역시 걷는데 보니까 세 발이다. 얼마를 지났을까 살짝살짝 디뎌 본다. 이제 조금 나은 모양이다. 며칠 더 지난 후에는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예전처럼 네 발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뒤에는 그 놈이 어찌나 고맙고 귀여운지 모르겠다. 이제 조금 후면 아버지께서 오실 시간이다. 벨소리가 나고 그러면 큰 놈은 짖고 작은 놈은 대문 밑으로 기어나가 바지가랭이를 물고 늘어지겠지.

보배와 마린이의 정겨운 모습 - 건강하게 생활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마운 가족
보배와 마린이의 정겨운 모습 - 건강하게 생활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마운 가족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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