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육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삶에서 ‘만약’이라는 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요. 그래도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그날 시위에 참가하지 않아서 눈을 실명(失明)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가 하나, ‘동생들이 뭐라고 하든지 어머니를 육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행복하시지 않았을까?’가 또 하나입니다.

제주에 살 때 아버지가 폐암말기라는 전화를 받고 무척 놀랐습니다. 누군가 가까이서 돌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부모님을 제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매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지쳐버렸습니다.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할 때 정신을 바짝 차렸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면 뒤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생활공간인 안채와 찻집 공간 사이의 거리는 3∽40여 미터. 이미 치매증상이 있던 어머니는 당신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당에 달래를 자르러 가거나 잔디밭의 풀을 뽑을 때도, 찻집에 손님이 와도 당신 눈앞에만 있기를 바랐습니다. 한옥의 특성상 디딤돌이 많은데 그걸 혼자 오르내리지 못해서 늘 걱정이 됐지요. 아버지를 모시는 몇 달 동안 영업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속이 탔습니다. 은행 빚이 적지 않았고, 그 이자를 감당하느라 버거웠으니까요.

그때 살았던 표선면에 노인요양시설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듯이 아침밥을 먹고 시설에 가서 지내다가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자는 시스템이었지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어머니는 무료하지 않고, 나는 다시 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얘기를 들은 동생들이 펄쩍 뛰면서 반대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욕까지 하면서 자신들이 모실 테니 육지로 보내라고 했지요. 아등바등 살면서 아버지의 병구완까지 하려면 더 힘들 것 같아서 저희들의 짐을 덜어주었음에도 난생 처음으로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육지로 보냈습니다.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원래 도시를 좋아하니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부모님을 한 번도 모셔보지 않은 동생들이지만 어머니를 잘 모시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고요.

어머니를 모셔간 동생들은 한 달도 안 돼서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그 세월이 벌써 10년입니다. 어머니는 부천, 대전, 청주, 고양시의 요양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치매가 심해져서 낮과 밤도 구별하지 못하고, 스스로 서지도, 용변을 가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추석에 어머니를 외출시켜서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외출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올 하반기부터는 휠체어만 밀고 나오면 어머니가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화장실에 가면 바지와 기저귀를 내려서 겨우 변기에 앉히지만 스스로 뒤처리를 하지 못해서 손에 똥을 잔뜩 묻히고 맙니다.

며칠 전에 막내 동생이 어머니외출을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 ‘가능할까?’싶었습니다. 어제(10월 21일)도 요양병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려는데 화장실을 찾았지요. 한참 뒤에 부르는데 손에 또 똥칠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일으켜야 뒤처리를 할 수 있는데 아무리 부축을 해도 서질 못합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하는데 마침 막내 동생이 왔습니다. 막내가 겨우 일으키고 있는 동안 어머니의 뒤처리를 하고, 기저귀와 바지를 추켜올렸습니다. 막내는 어머니의 손을 닦고, 나는 똥칠된 변기를 닦아내고서야 외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남자 둘이서야 겨우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때 육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후회하는 건 10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병원에 둔 죄의식이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전만 해도 자주 외출을 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때로는 영화관에도 갈 때는 그나마 행복했었는데...... 이제는 그만 아버지곁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편집 :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babsangmann@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ㅕㅌ으로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