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 열망이 너를 영광의 도가니로 몰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일순간의 착각이라는 걸 곧 알게 될테지.  거기에 더해  절망과 치욕의 쓴 맛을 보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겠어? 그러니 더 이상의 열망일랑은 집어치우는 게 어때? 

그래. 그 말도 맞아.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삶의 열망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열망이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어. 설사 그 열망으로 인해 실망과 좌절을 맛보더라도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 말을 삼가하도록 해. 열망 자체를 무시하는 언행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래서 뭐 사과라도 하라고? 열망이  너를 밥먹여주니? 환갑이 지나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망 타령을 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열망의 가치는 나이랑은 상관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더 이상 나를 도발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어느날 치과 의자에 누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입 속으로 모종의 금속 기구가 들어가고 곧이어 지징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속이 치아의 썩은 부위를 갈아내고 있었다. 나는 무기력한 상태로 그저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순한 양처럼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금속으로 갈리는 치아가 시리다. 시려도 참아야 한다. 아프다고 어린애처럼 울 수는 없지 않은가. 

슬프다. 내가 슬픈게 아니라 치아가 슬퍼하는 듯 하다. 자신의 몸체를 금속으로 긁어내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시집간 딸은 어릴 적부터 치아가 약했다. 대학생 때인가. 딸이 치과에 다녀오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자신의 치아가 너무 약해서 슬프다고 했다. 당시에 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아가 좀 약하기로서니 슬프기까지 할까.  치아로 인한 슬픔은 치아가 느끼는 슬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10년에 한 번 치과를 갈까말까 하다가 40을 넘기고는  5년에 한 번은 치과를 간 것같다. 그러다가 50을 넘기고는 길어야 3년에 한번 정도는 치과에 가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간호사가 말했다.

"식사 후에 치실로 정성껏 양치질 잘 하시고요. 치아 관리에 신경 쓰셔야 해요."

간호사의 말 한마디에 치아 관리에 무지한 자로 전락하고 만다. 나름대로 신경써서 양치질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3년에 한 번은 위나 아래의 어느 어금니에 이상이 생기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나마 아직 어느 치아도 임플란트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긴다. 슬프다. 마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간호사에게 치아관리에 무관심한 자로 인식되는 게 서글프다.  금속음은 귓가에 울리고 간호사의 충고는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숲 위로 비행기 모양의 구름이 세상을 유유히 표류하고 있다  (필자 사진)
숲 위로 비행기 모양의 구름이 세상을 유유히 표류하고 있다  (필자 사진)

작년에는 허리 디스크 만성질환 판정을 받았다. 척추관 협착증이 심하다는 판정도 받았다. 왼쪽 다리가 저리고 허벅지 안쪽의 신경줄을 타고 쩌릿쩌릿한 통증이 있었다.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 있으면 좀 나아지고 누우면 통증을 못느낀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을 수 만은 없지 않은가.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이대로 죽는건가. 어디 여행도 못다니고 이렇게 평생 저린 다리를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예전에 할머니가 다리가 저리다고 해서 주물러 드린 적이 있다. 하지만 저리다는 것. 그 증상이 이렇게 심할 줄은 그 당시는 미처 몰랐다. 나도 모르게 육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육신의 자멸이었다.  정신의 자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경계하며 살아왔지만 육신이 자멸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내 육신은 언제나 멀쩡하고 그 육신은 나의 정신과 마음을 늘 굳건히 뒷받침할 줄 알았건만 이제 그 시절도 다끝나가고 있었다. 서산에 해가 지는 모습은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목의 경추가 아파서 치료를 받고 나았던 한의원에 찾아갔다. 경추 치료에 효과를 보았던 한방 치료는 다리가 저리고 쩌릿한 통증을 낫게 하지는 못했다.  다리 저린 통증 치료에 용하다는 모 통증의학과를 찾아가 MRI를 찍고 나서야 내가 허리 디스크와 척추관 협착증이 악화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원장은 디스크 수술보다는 시술을 권했다. 그 시술은 PEN 시술로서 긴 침을 꼬리뼈 깊숙히 찔러넣어 특수 약물을 투입하는 시술이다. 시술을 마치고 원장이 말했다.

"매일 만 보 이상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술의 효과를 보기 어려워요. 매일 만보를 걸어도 낫지 않는 경우가 30프로 정도 됩니다. 그러니 열심히 걸으세요."

어디 걷기만 했겠는가. 처가의 큰 동서가 소개해준 수도권의 접골원에까지 찾아가 삐뚤어진 척추 뼈를 교정하였으며, 그동안 도외시하던 관절 항염제를 상시 복용하기 시작했고 하루 만보는 기본이며 하체의 코어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피트니스 운동을 병행한지 몇 개월이 지났다. 그 결과 이제 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삶의 열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 열망이 나를 이끌고 왔지만 그 열망이 어느덧 사라지거나 의미 없어질 때가 올 것임을 알아챘다. 삶의 열망이 사라질 때쯤 나의 치아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육신은 더 이상 자멸하지 않을 것이다.  열망이 사라지는 것은 나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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