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답양 가산마을 이종순 어머니(1938~)
‘우리 살아 온 거? 말도 마, 말하면 뭐혀’

 

"그 놈이 고사태 둥구나무 옆으로 쓰윽 지나더니 어쩔때는 행길에도 와. 한번은 돼지새끼랑 달리기도 했어. 옥시기를 심었는데 갸들이 다 먹어치우지 뭐야. 그래서 옥시기 못먹게 하려고 전깃불을 죄다 켰지. 덕분에 녀석이 잘 보이더라고. 옆으로 가서 삐죽 보니 꿀꾸름한게 등어리가 날 다람쥐같아. 같이 뛰었어. 돼지 못 들어오게 철망을 쳐뒀는데 철망 쳐 놓은데로 들어가려고 버팅기고 있더라. 뒤에서 잡으면 되는데 남자들 같으면 잡것는데 행길에 아무도 없어서 잡아 댕기면 될걸 미서워서 못 잡았어. 그놈의 새끼 잡았다가 애미가 나를 잡아 먹으려고 할거 아냐...에구 미시워 (사투리 인용)"

"휴....어찌 살아왔나 싶어. 그 많은 세월을. 그래도 살아지고 그 어렵던 시절도 잘 살아왔는데 여든 넘어 애물단지 때문에 미시워서(무서워서) 살 수가 없어. 그놈의 멧돼지 때문이여. 산 밑에 혼자 사는 내가 그 놈의 멧돼지 때문에 해떨어지면 바로 문부터 걸어 잠궈. 텃밭 뭉개는 건 다반사이고 개까지 물어 죽였으니 혼자 사는 할미가 겁나는 건 당연햐. 여기저기 얘기해도 다들 나만큼 걱정을 안해주네. 신문사에 가서 발표라도 해야 할 판이여."

"1938년생 호랑이띠인 나도 멧돼지는 미시워. 내 이름은 이종순, 본관은 전주 이씨, 고향은 충북 보은군 수한면 동정리인데 19살에 옥천 안내 답양리로 시집왔어. 언년언니는 돌아가시고 만선 남동생이 강경에 살고 있어. 자주 못 봐.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위로하고 있어. 19살에 장수 황씨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어. 남편 이름은 황기하. 시누가 중매를 했는데 시누는 우리 동네 동정리로 시집와서 살며 우리 가족과 이웃으로 지냈어. 남동생을 중매해서 난 옥천 안내면 답양리 가산마을로 시집을 왔지. 원래 중매쟁이들은 소소한 거짓말을 하긴 해. 다 먹고 살만하다 신랑감은 잘 생겼다 신부감은 예쁘다. 그런 건 정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나이도 가끔 속여. 그건 나쁜 마음보다는 서로 결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이해는 하는데 시누는 황씨네 핏줄이라고 남편이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데 몇 살 줄여서 중매했어. 우리 아버지가 보시더니

“신랑감 얼굴 보니 서른도 넘어 보인다. 시집가지 마라” 

하셨어. 난 꽃처럼 활짝 폈던 19살이라 속상한 마음에 가기 싫었어. 그래도 천생연분이라고 중매쟁이가 부추기고 옆에서 얼러서 결혼이 되더라고. 이리저리 몰려서 시집을 왔지. 열두 가산이라고 또랑을 열두 개나 건너야 당도하는 마을로 시집을 왔어. 완전 시골구석이지. 지금이야 도로가 쭉쭉 났지만 옛날에 도로가 어딨어. 길이라고는 소롯길 (좁고 작은 길)밖에 없어서 한사람 겨우 다니는 길 밖에 없는 마을이고 시집도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와야 하는 집으로 시집을 왔어. 산골짜기 오막살이가 바로 우리 시댁이었어. 알고 보니 나이 속이는 건 일도 아녀. 나만 속은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시집을 갔더라고 다 옛날 얘기지. 나이도 속이고 재산도 속이고 첫날밤에 얼마나 서글픈가 부러 생코를 골고 잤어. 벽에 기대서 일부러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곯면서 슬쩍 곁눈질했더니 남편도 자더라고. 아침에 일어나서 어린 소견에 친정으로 가야겠다고 하니 남편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를 빤히 보데. 우리 집 간다니 희뜩 바라보고

 “가긴 어딜 가”

 하더니 그게 끝이여. 여태까지 살고 있잖아, 허허. 남편이 나이는 속였어도 아주 착했어. 술주정도 안하고 농사도 착실하게 지었어. 그래서 한때는 마을에서 담배농사도 제일 많이 했어. 63년을 가산에서 그냥 그대로 살고 있는데 살다보면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아픈 일들이 있어. 6남매중 제일 먼저 큰아들이 50대에 갔어. 너무 가슴 아팠지만 워째. 참고 살아야지 가슴에 묻었지. 남편은 20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때가 영감 72살 때였어. 남편이 

“임자, 다리가 아파, 다리가 아파”  

 하더니 돌아가셨어. 인생이 참 허탈하지. 젊을 땐 담배농사를 많이 했고 고추 깻잎은 우리 먹을만치 했어. 담배농사는 23년 전에 남편 돌아가시면서 그만뒀어. 고생은 많았지만 시집살이는 별로 안했어. 시어머니가 딸네 집 가서 넘어지셨는데 회복 못하고 돌아가셨어. 낙상이 그렇게 무섭더라고. 시아버지는 여든 넘어 돌아가셨지. 치매도 약간 있으셔서 대소변 받아내면서 수발들었어.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 그런 건 하나도 안 힘들었어. 힘든 건 다들 어렵게 살다보니 공부 하고 싶은 아들 맘껏 공부 못 시킨 게 마음 아프고 힘들었어. 기만이가 대학원 간다고 하는 걸 가지말라고 했던게 마음 아파. 돈 없어 못 가르쳤어. 그게 마음에 너무 걸려. 지금 같으면 다 가르쳤을거야. 그 땐 살림이 어렵고 방도가 없더라고.

담배농사 할 때 엄청 힘들었어. 농사 중에 담배농사 만큼 힘든 것도 없을거야. 오죽하면 담배농사 하는 집에 딸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을까. 여름에 그 뙤약볕에 담배 잎 따는 건 진덕거리고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죽을 만큼 힘들었지 생각도 하기 싫어. 잔손이 많이 가서 애들도 학교 갔다 오면 일손을 도와야 돼. 담배 잎도 짊어지고 오고 담배도 엮고 소 꼴도 베고. 답양리에서 학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안내까지 20리를 걸어가서 버스 타고 옥천으로 학교를 다녀서 힘들텐데 학교 갔다 와서 농사까지 도우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땐 애들 마음도 몰라주고 시골살이가 다 그렇다고 했지. 그래도 애들이 착해서 손들을 모아서 우리를 도왔어. 산내기줄에 껴서 담배를 엮으려면 수고가 많았지. 남편이 착하고 술 안 먹어서 담배농사로 6남매 학교 보내고 키웠어. 힘은 들어도 나라에서 전매를 해주니 그 맛에 힘들어도 담배를 했었어. 아이들은 꼭두새벽에 학교 가서 오밤중에 오니 다들 못할짓이라 나중에 옥천에서 자취를 하게 했어. 이젠 버스도 다니고 좋아졌지만 동네 사람들이 없어. 다들 이사 나가고 젊은이들이 없으니 애기도 안 낳고. 수도원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거 같아. 적막강산이야

금요일 학교에서
금요일 학교에서

나랑 같이 가산마을에서 새댁부터 만나 집에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지내던 이웃사촌들은  다들 돌아가셨어. 내 인생이 모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제일 오래 살고 있어. 화요일 금요일 학교에 나와서 글자도 배우고 보태기 빼기 산수도 배워. 학교 안 나오는 날은 집에서 꼼지락 꼼지락 잡동사니 일들이 많아. 텃밭에 들깨심고 풀도 매줘. 가끔 텃밭의 애들한테 말도 걸고 새끼 마냥 보살피지. 귀 없고 눈 없어도 사람들 손길을 알아. 정성들이는 것도 알고. 영물이여. 쉬는 날은 또 노상 잔병을 싸고 있어서 읍내 가서 약도 타오고. 돌아보니 80년이 어떻게 지나왔나 몰라. 시집온 첫날밤에 내일이면 집에 가야지 하면서 오늘까지 살고 있잖여. 인생이 그래. 뜻대로 되나. 그래도 착한 남편에 자식들과 옹기종기 부비며 살았고 아직 혼자 생활할 수 있어서 그만치도 너무 감사해. 인생 말하면 뭐혀. 우리 때는 다들 고생 많았지. 말도 마, 인생이 내 뜻대로 되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알고 보면 복 받은겨. 다 감사하고 살면 불만이 적어. 힘들어도 살만한 게 인생살이야.

* 이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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