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힌다. 갇혀 있는 것은 절망이다. 로켓이 날아다니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날뛰고 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수용소 장벽을 아는 자들의 형태가 하는 일은 거대한 장벽을 세우는 일이다. 어리석음이 만리장성보다 더하는 것인가?

평화를 깨는 것은 극우의 사명인가보다. 통곡의 벽에서 통곡하는 이유는 잊지 말자고 해서 하는 행위다. 무엇을 잊지 말자고 하는가, 예루살렘의 마지막 성터 흔적이 그들 역사의 평화를 위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밖에는 없다.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그러했듯이.

물리적인 힘이 필요했다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그거 없이는 상대방에게 말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존은 내로남불이 아니다. 유대인이 살아남아 있듯이, 팔레스타인도 살아남아야 한다. 마사다 언덕의 마지막 저항이 이스라엘의 정신이라면, 로마제국이 현재의 이스라엘이다. 상식적이지만, 그 상식이 정권을 유지하는 자들의 입맛대로라면 로켓은 비상식적이다.

전쟁은 파멸이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당연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당연하게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극우와 근본은 같다. 인류의 역사에서 극우와 근본이 세상을 발전시켰다고 본 적이 없다.

전문가는 모르겠다. 본 적이 있는지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하는 행동은 마치 나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겠다. 이스라엘이 건국(서방의 시각에서)한 후, 그들이 팔레스타인과 공존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평화는 극우와 근본주의자들의 손에 깨졌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총리들이 총에 맞듯이, 그렇게 평화는 살얼음이다.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핑계나 대지 말고.

결국 폭력은 인간의 속성이다. 다만, 그럴 싸 하게 포장할 뿐이다.

약자가 강자가 되면, 약자의 시절을 잊는가 보다. 그렇지 않고 서는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세운 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자기네 땅이라서 그러 한가?

그렇다면 말이다. 돈에 대해서 말해보자. 돈은 누구의 것인가? 부의 이동은 결국 남의 자산을 자기로 이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러면 되돌려 줄 것인가.

그러니 모순이다. 돈에 대한 인류의 역사가 그러할 진데, 아 맞다. 그렇게 쌓인 돈이 지금의 이스라엘로 되돌려지는 것이기에 한번 망했지만, 두 번은 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눈에 피눈물을 주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영원히 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언젠가는 멈춰야 한다.

기나긴 장벽을 세운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해결은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장벽이 허물어지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광현 주주  starissta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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