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떤 감정을 지니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감정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혹은 그 감정이 누가 보기에도 타당한지를 스스로 묻기보다는 그 감정자체를 기정사실화하고 본다. 그래서 어떤 감정들은 습관이 되기도 한다. 특정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늘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이 된 감정은 교정되기 어렵다.

특정한 감정의 존재를 일단 인정한 다음에 그 감정의 이유와 원인을 분석해보기는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 원인은 타인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그리하여 감정은 타인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유도한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 그 원인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타인을 향한 분노가 우울증보다 더 나을까? 아니면 차라리 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보다 더 나은 걸까? 둘 다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 밑바탕에는 자아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자아가 타인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 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아를 소중히 여기도록 훈련받아왔다. 자신을 타인과 분별할 줄 알아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 자아는 사회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양성되어졌다. 그러나 자아의 목적은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

자아가 중시될수록 인간의 감정은 스스로 분별력을 잃는다. 자아는 그 자체가 이유이고,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자아 앞에서는 숭고한 가치관들이 무력화되고 모든 타인들이 의미를 잃는다. 자아는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고 타인을 적으로 돌리는데 익숙해있다. 자본주의 체제아래에서의 경쟁사회가 그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 요즘처럼 글로벌 경제상황에 노출된 환경 속에서 한국 사회는 갈수록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다. 자아의 집중현상이 심해지면 심해졌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감정은 스스로도 모르는 이유를 갖고 있다.' 파스칼이 한 말이다. 자신의 감정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두둔하고 보는 자아와 그 자아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희망과 긍정보다는 혼돈과 퇴락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타당성을 잃은 감정은 더 이상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감정 중에도 타당하지 않은 감정들이 잠재해있다.

또한 자아를 타인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관은 이제 수정될 때가 되었다. 자아는 감정의 타당성 여부를 검증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타인에 대한 공감보다는 자아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수선화 꽃말, 속명 '나르키수스'로 나르시즘(자기애)를 의미

사진 : 박효삼 편집위원,

편집 :김미경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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