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다 밥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한 끼의 식사에 모든 사랑을 담아 왔다. “ 밥 한 번 먹자.” 혹은 “밥은 잘 먹고 다니나?” 등등….

필자는 그런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밥 한 끼 속의 감동과 눈물과 수치스러움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였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차리지 못한 생일상
1992년 9월 중순 무렵이었다. 일찍 눈이 오는 개마고원의 특성 때문에 9월 5일부터 시작된 추수는 벌써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감자 가을을 위한 농촌지원에 동원되었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감자 몇 알을 점심 도시락 가방에 감추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감자를 몇 알 더 감추어서 왔다고 자랑할 생각에 기분은 둥둥 떠 있었다. 어둑어둑하였을 때에야 집에 도착한 나는 집 문을 열기도 전에 “어머니”를 불렀다. 여느 때 같으면 집에서 저녁을 짓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아버지만 앉아있었다.

그리고 부엌에는 종이에 싸여 있는 무엇인지 모를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종이를 조심히 풀어보니 소고기 덩어리였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가져왔는지 물으니 어머니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그 고기는 내일이 엄마 생일이라서 조금 얻어왔다고 한다.

‘아~~ 내일이 어머니 생일이었구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 밖에 없네.’ 딸이 되어서 엄마의 생일도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 ‘그런데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어질까?’

감자 감추어서 온 것을 자랑하려던 마음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저녁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는지라 부엌과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어머니” 문을 열었는데 문밖에는 어머니가 아닌 옆집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어머니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요.” 아주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하였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서웠다. 12살 언니가 예방주사 부작용으로 병원에 실려 간 후 퇴원을 못 하고 사망한 곳이 병원이다. 나와 아버지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어머니가 입원하였다는 군 병원으로 갔다. 자동차도 없고 대중교통도 없는 북한에서 3K 정도 거리에 있는 병원까지 도착하였을 때는 1시간이 거의 되어 오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복막이 터져 어머니의 배 안에 고름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날 밤 장장 8시간의 대수술을 받았고 며칠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생일상을 차려드리려고 아버지가 어렵게 구해왔던 소고기는 그대로 소금 통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고가 없는 북한의 상황은 소고기를 소금 통 안에 넣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하셨고 생일상에 올리려 했던 소고기는 의사들의 한 끼 음식으로 대접 되었다. 그 소고기를 끓인 허연 국물은 어머니 병실의 환자들이 나누어 먹게 되었다.

속상한 환자 가족들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국물 한 숟가락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린 사람들과 이러한 상황이 야속하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뾰로통하게 앉아 있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아버지는 엄마가 완쾌되면 더 맛있는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하였다.  씁쓸한 웃음을 띤 채 밖으로 나갔다.

편집 : 김혜성 객원편집위원

김혜성 객원편집위원  cherljuk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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