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에게 발포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전남 도경 국장과 이구호 장군

지난해 11월 22일에 개봉한 『서울의 봄』이 새해 1월 3일 1,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쿠데타를 꾀하는 전두광 정치군인들과 그에 맞서 분투하는 참군인들의 열연이 압권이다. 1979년 12·12 쿠데타는 해를 넘겨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 80년 5·17 비상계엄으로 완성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길고 긴 쿠데타였던 셈이다.

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2018년 5월 15일 한겨레 강민진 기자). 1980년 5월 15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 철폐>를 외치며 10만 대학생들이 운집했던 서울역 시위는 당시 최대 규모 시위였다. 그럼에도 <정치군인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고 공수부대가 투입될 경우 유혈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며 자진 해산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선언한 내용이다. 이후 결과적으로 <서울역 회군>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들이 광주를 고립시키며 잔혹하게 학살, 탄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 동시다발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질 못한 채, 광주를 고립시킨 <서울역 회군>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2018년 5월 15일 한겨레 강민진 기자). 1980년 5월 15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 철폐>를 외치며 10만 대학생들이 운집했던 서울역 시위는 당시 최대 규모 시위였다. 그럼에도 <정치군인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고 공수부대가 투입될 경우 유혈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며 자진 해산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선언한 내용이다. 이후 결과적으로 <서울역 회군>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들이 광주를 고립시키며 잔혹하게 학살, 탄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 동시다발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질 못한 채, 광주를 고립시킨 <서울역 회군>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었다.

박정희 18년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열망하던 ‘서울의 봄’(1980년 3월~5월)은 영화 속 전두광 정치군인들의 교활한 사적 욕망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비상계엄을 해제해야 마땅함에도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 5·17쿠데타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치군인들의 만행이었다.

5·17쿠데타로 전두환 정치군인들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자 곧바로 불꽃처럼 항거했던 민중항쟁이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상자와 투옥된 사람들 가운데 60% 넘는 분들이 영세중소기업 저임금 노동자, 보일러공, 식당종업원, 노점상, 행상, 미장공, 택시운전사, 도시빈민, 농민이었다는 사실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중항쟁>*이었음을 말해준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5·17쿠데타에 항거한 최초의 민중항쟁이자 처절한 마지막 민중항쟁이었다.  5·17쿠데타 당시, 서울을 비롯해 주요 도시가 조용했기 때문이다.

광주 민중항쟁 기간(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10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토피아를 연출했다. 바로 80만 광주 시민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평등한 대동 세상을 만들어 냈다.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총, M1 소총을 비롯해 5,000정이 넘게 분출되었는데도 털린 은행, 금은방, 백화점이 단 한 곳도 없었고 살인, 강도, 절도 또한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군이 치안을 유지한 항쟁 10일 동안,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빚어냈다. 전 세계 여러 나라 세계사 교과서에 소개돼 나오는 파리코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연출했다. 그야말로 ‘빛고을’ 광주였다.

광주 항쟁 기간 전두환 정치군인들은 광주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시민군뿐만 아니라 다섯 살 어린아이, 장애 청년, 어린 초등학생, 헌혈하던 여고생, 임산부, 일흔 넘은 노인까지 살육 만행을 저지르고 암매장했다. 19세 이하 사망자가 31%에 이를 정도로 잔혹한 학살극이었다. 전두환 정치군인들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학살 만행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전두환 정치군인들은 자신들의 만행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광주 치안을 맡은 안병하 전남도 경찰국장(오늘날 전남지방경찰청장)에게 발포 명령을 지시했다. 심지어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약칭 전교사) 산하 육군기갑학교 이구호 장군에게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탱크로 밀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안병하 전남 도경 국장과 이구호 장군은 하달된 명령을 즉각 거부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 앞에서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강력히 지시하자 안병하 도경 국장은 “경찰이 어떻게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진압할 수 있느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실제로 안병하 전남 도경 국장은 부하 경찰관들에게 “시민에게 절대로 총을 겨누지 말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씨가 1995년 서울지검에서 조사받을 때 진술한 내용(출처 : 한겨레신문 2021년 5월 18일 정대하 기자) 1979년 12.12군사반란 당시 경복궁 반란모임에 참석했던 황영시 중장(80년 5월 당시 계엄 부사령관)의 무도한 발언들이 담겨 있다.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씨가 1995년 서울지검에서 조사받을 때 진술한 내용(출처 : 한겨레신문 2021년 5월 18일 정대하 기자) 1979년 12.12군사반란 당시 경복궁 반란모임에 참석했던 황영시 중장(80년 5월 당시 계엄 부사령관)의 무도한 발언들이 담겨 있다.

이구호 장군 또한 “광주 시민이 적군이 아닌데 어떻게 탱크로 포를 쏘며 진입하라는 것이냐”며 황영시 계엄 부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차장의 탱크 진압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전두환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오월 광주 항쟁을 ‘내전’으로 표현하며 끔찍한 유혈참극의 원인을 무장한 시위대로 돌리고 있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거짓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출처 : 한겨레신문 2017년 5월 17일  정대하 기자)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출처 : 한겨레신문 2017년 5월 17일 정대하 기자)

광주 항쟁 기간 가장 많은 참극을 초래한 날은 피의 수요일!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이다.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정오, 애국가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했다. 그날 이후, 광주 시민들은 비로소 시민군으로 무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광주 학살의 참극은 공수부대가 시위를 진압하면서 드러낸 ‘잔혹성’에 있었다.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인간 사냥을 자행한 공수부대의 ‘잔혹성’ 이면엔 정치군인들의 ‘추악한’ 권력욕이 존재했다. 다시 말해 광주 참극은 전두환 정치군인들의 사적 욕망이 공수부대의 ‘잔혹성’을 부추기고 조장하며 명령한 결과였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짐승군대>였다.

실제로 전두환 정치군인들은 잔혹했고 안하무인이었다. 5월 21일 하루 동안 광주 시민을 수백 명 살상한 그날 오후 4시, 황영시 중장은 이구호 준장에게 “나 참모차장인데 폭도들을 진압하고 도청을 점령하는 데 전차를 동원해야겠다.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시오”라고 명령했다. 이어서 “4· 19 때처럼 시위대에 전차를 빼앗기면 안 되니까 전차 주위를 전부 철조망으로 감싸고, 화염병이 날아오면 화재로 전차 소실이 우려되니 전부 전차 문을 닫고 광주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구호 장군은 재차 지시를 거부하며 “저도 일국의 장군입니다. 장군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우면 자진 행동합니다. 그러나 전방 155마일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광주에서 시위를 이유로, 우리가 시민에게 포를 쏘면서 광주 시내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만약 전차 동원을 요청하려면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명령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정치군인 황영시 중장은 이구호 장군의 발언에 “ 이 자식이,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자 이구호 장군은 화가 치밀어 전화기를 내던지듯이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치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사냥감으로 생각한 것과 같이 대통령 앞에서 안하무인의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최규하 대통령이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함께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해 전투교육사령부 연단에 섰을 때 일이다.

연단 아래 앉아 있던 정치 장군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목격됐다. 마치 자기들 세상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오만방자한 태도를 연출한 장면이었다. 안병하 도경 국장은 그 장면을 보고서 ‘쿠데타’임을 직감했다고 술회했다.

정치군인들에 맞선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 평전>(2020)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안병하 도경국장은 석방되어서도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정치군인들에 맞선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 평전>(2020)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안병하 도경국장은 석방되어서도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정치군인들의 명령을 거부한 대가는 혹독했다. 안병하 도경 국장(당시 52세)은 1980년 5월 26일 보안사 요원에 의해 동빙고 분실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다. 8일간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비롯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안병하 도경 국장은 1980년 6월 2일 풀려난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1988년 신장투석 도중 60세로 작고하기 직전까지 8년 동안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며 한방병원을 비롯해 병원을 전전하면서 투병 생활을 했다.

정치군인들의 지시와 명령을 단호히 거부한 이구호 장군(출처 : 한겨레신문 2021년 5월 18일 정대하 기자, 이구호 장군 아들 이상우 님 제공) 그는 이듬해 군복을 벗고 <무궁화 주유소>를 운영했다.
정치군인들의 지시와 명령을 단호히 거부한 이구호 장군(출처 : 한겨레신문 2021년 5월 18일 정대하 기자, 이구호 장군 아들 이상우 님 제공) 그는 이듬해 군복을 벗고 <무궁화 주유소>를 운영했다.

육군기갑학교 이구호 장군 역시 정치군인들이 승승장구하던 것과 정반대로 이듬해 군복을 벗었다. 자신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린 황영시 중장은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에 이구호 장군은 1981년 군복을 벗었고 동생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했다. 주유소 간판이 평소 좋아했던 꽃, 무궁화를 따와 「무궁화 주유소」를 운영하다 1999년 66세로 별세했다. 무궁화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꽃인 만큼, 이구호 장군의 아픔과 나라 사랑의 여운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치군인들 명령을 거부한 의인들, 바로 경찰 영웅과 참군인들은 많았다. 안병하 도경 국장처럼 계엄사 지시를 거부한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은 합수부로 끌려가 석달 동안 고문을 받았고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군사재판에서 선고유예로 석방된 지 5년 만인 1985년  58세로 별세했다.

12·12 신군부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섰던 김진기 헌병감,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윤흥기 9공수여단장을 비롯해 전두환 정치군인들에 동조하지 않거나 명령을 거부했던 장군들 수십 명이 강제 예편당했듯이 경찰 또한 ‘시위 진압을 회피했다’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 전두환)는 1980년 6월 19일 안수택 전남 도경 작전 과장, 이준규 목포경찰서장 등 11명 전남 도경 산하 경찰 간부들의 경찰복을 강제로 벗겼고 68명을 징계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고통의 역사이자 배반의 역사였다. 나아가 제국주의 파시즘과 분단 독재에 맞선 항거의 역사이자 투쟁의 역사였다. 오늘도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역사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 속 사적 욕망을 위해 비루하고 교활하게 살다 간 자들을 징치하고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본분을 다한 경찰 영웅, 참군인들을 높이 받들어 미래 세대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그 길이 경찰의 본분을 지키며 참군인의 길을 걷다가 원통하게 스러져 간 역사 속 인물들을 기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민주언론운동협의회(1988).  오월 광주항쟁의 주역은 누구인가」. 『말』. 1988년 5월호. 21쪽.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하성환 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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