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주기에 열어보는 역사의 봉분> 고 배진섭 님 사연!

배영자 님이 스무살,  어머니 고 한경림 여사는 41세 때 사진으로 소록도에서 영자 님이 식모살이하던 시절 찾아오신 어머니와 함께한 모습.(사진 출처 : 배영자 님)
배영자 님이 스무살,  어머니 고 한경림 여사는 41세 때 사진으로 소록도에서 영자 님이 식모살이하던 시절 찾아오신 어머니와 함께한 모습.(사진 출처 : 배영자 님)

 

희생자 – 배영자 님의 부친 고 배진섭 님. 1948년 음력 10월 보름 경에 변을 당하심.

1) 고향으로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까치설날, 저물어 가는 1969년도 말, 섣달 그믐날에 고향을 향해 나는 길을 나섰다. 이미 떠나버렸는지 행길은 벌써 한산한 편이다. 생각하면 낳아주기만 하고 받은 것 하나 없는 고향이지만 떠오르기만 해도 가슴 뭉클한 것이 고향이다. 고향이라야 고흥군 과역면인데 아버지 가시고 나서 영자에게는 고향도 없다. 어머니라도 남아있어야 꿈에도 그리는 고향 아닌가.

설에 치를 차례 준비까지 대략 다 해놓고 나오느라고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나는 천호동, 식모로 살고 있던 집을 빠져나왔다. 마지막 귀성객일 것이다. 이고 지고 손에 든 보따리에는 시골에선 만날 수 없는 삐까번쩍한 털옷들, 목도리 장갑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기대로 날은 춥지만 사람들 얼굴은 들떠 있었다. 서울역에서 전라도 광주 가는 호남선을 탔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밀치고 간신히 기차에 오른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자 두툼한 솜바지와 빨간색 내복이 든 보퉁이를 쓰다듬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대견했다. 한달 월급이 1,800원 할 땐데 6,000원 짜리 코트도 사입고.외할머니께 드릴 선물도 샀단 말이다. 엄마는 만나지도 않을 텐데 무슨 선물을.....천만의 말씀이다. 영자, 나는 사실 친정도 없고 고향도 없다. 지금 녹동에 있는 외할머니한테로 가는 중이다.

<우리를 버리고 시집가버린 것도 모자라 자궁에 물혹이 생겨 죽게 생겼대서 남의 집살이 하다 말고 내려가  꼽박 1년을 병구완하여 고쳐 놨더니 또 시집을 가? 그게 엄마냐고? 병이 다 낫거든 엄니는 부산으로 가 식모 살고 나는 서울로 와 식모 살아 돈을 모아 같이 살자고 그렇게 철석같이 약조했건만 바람결에 들으니 또 다른 집으로 개가를 했다고?

귀를 의심했어. 떡 먹듯이 느구 나구 함께 살자구 하구선 또 시집을 가? 그게 말이야 뭐야. 팔자를 고치려거든 좀 번듯한 집으로나 갈 것이지, 땟거리도 없는 집으로 뭘 하러 가. 어이짱머리 없어서..... >

생각을 하자 분통이 터져 나는 엄마, 한경림 여사가 앞에 있기라도 한듯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2) 가족이란 이름의 타인들

연착이나 되지 않으면 좋겠다. 10시 반 막차를 탔으니 아마도 새벽에나 광주에 떨어질 것이다. 부산으로 남의 집살이 간 언니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언니도 설이라고 외갓집에 온다면 만날 수 있을 텐데. 엄마는 털끝만큼도 보고 싶지 않고 언제 생각해도 보고 싶은 건 2살 더 먹은 맹자 언니다. 삼촌이 보리밥도 아깝다고 못 먹게 밥그릇을 빼앗으며

“이년들아 어서어서 남의 집이나 구해서 살러 나가. 재워주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알어야지 어디서 밥을 축내고 있어!’

내가 8살 때 엄니가 재혼했으니까 언니는 10살 되던 해다. 3식구 밥 먹는 게 아깝다고 삼촌으로부터 달달 볶여도 그렇지 남은 어린 것들은 어하라고 자기 혼자 팔자를 고치냔 말이다. 하지만 엄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남은 전답을 두 집이 똑같이 나누자고 하자 엄마의 머리끄뎅이를 잡아 팽개치고 삼촌에게 너무 맞아 사흘 도리로 방바닥 마루바닥에 엄마가 쏟은 피가 얼마였던가.

”엄니, 이기지도 못하니 삼촌이 하자는 대로 하자,“

”아니 이년이 어려도 그렇지 제 삼촌 편을 드는 거야?“

엄마의 모든 화가 내게로 떨어졌다. 삼촌이 화가 나도 나를 뚜드려팼다. 언니와 같이 서러움에 밥 말아 먹으며 자라던 어느 날 아마도 15살이었을 거다. 그날따라 삼촌의 행패가 하도 심해 무작정 집을 나왔으나 갈 데가 없었다.

과역면을 지나 연등리 외갓집을 거쳐서 엄마가 재가한 집으로 갔으나 속 시원한 꼴은 보이지 않아 마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 집을 나와 길가에 앉았는데 엄마가 뒤따라 와 말을 걸었다.

”왜 뭐가 불만이냐? 왜 입은 댓발은 내밀고 속 창아리 없는 년이 내 속을 뒤집을라고 온 것이야 뭐시야?“

다짜고짜 머리끄뎅이를 잡히고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겨우 도망쳐서 외가 연등리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쫓아 온 엄마가

”저년이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저년을 죽여버리고 내가 죽든지 해야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22살 막내 삼촌이 작대기 하나를 들고 와 나를 사정 없이 패기 시작했다. 작대기가 부러지면 다른 작대기를 들고 와 뚜드려 팼다. 그 작대기가 세 토막 나는 것을 보고 나는 기절했다.

간혹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더니 칠흙 같은 어둠을 뿌리며 열차는 -가치 살자 가치 살자-소리를 지르며 달리고 있다.

사실 울 아부지가 장남이니까 집도 우리 집 아니냔 말여. 전답도 사실은 할아버지 때부터 받은 것이고. 아버지가 그렇게 흉하게 비명에 가시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은 안 하는데...

하기는 삼촌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왔으니 학비가 수월찬히 들어갔을 것이요. 그 3년일지 사년일지 하는 동안에 할아버지를 따라 땡볕에 농사를 지은 건 삼촌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높은 신학문까지 했겠다 장남이란 자가 돈을 긁어들여야 하는데 빨갱이로 몰려 죽었으니 아깝고 억울해 죽겠다고 악을 악을 쓰는 것이다. 더구나 처먹어댈 세 년들, 형수와 영자 맹자까지를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느냔 말이냐고 소리소리를 지르던 삼촌의 쇠된 목소리가 기차 바퀴에 엉켜든다. 그래도 그렇지 삼촌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고도 농사를 같이 짓자고 엄마가 놉을 얻어 밭에 씨를 뿌리고 나면 삼촌은 지게 작대기를 들고 와 밭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가 하면 농사 도와줬다가는 뼈도 못 추릴 줄 알라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막무가내로 엄마를 끌어다 동댕이를 치는 것이었다. 아- 잔인한 세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내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30대 초반 시절, 언니  배맹자 님(오른쪽)과 배영자 님 (사진 출처 : 배영자 님)
    30대 초반 시절, 언니  배맹자 님(오른쪽)과 배영자 님 (사진 출처 : 배영자 님)

 

3)녹동에서

기차는 어디를 통과하고 있을까, 수박등 흐린 불빛을 흔들며 방송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정차할 역은 천안 천안입니다. 천안에 내리실 손님은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사람들이 내리고 나자 군것질을 파는 구르마가 올라와 천안의 호두과자를 판다. 30개들이 한 상자를 살까 말까 망설였으나 그녀는 꾸욱 눌렀다. 조카들 세뱃돈이라도 주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 광주에서 금호 고속을 타고 소록도가 보이는 녹동에 도착해 물어물어 찾아간 외갓집도 집도 뭣도 아니고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들 찢어지게 가난하단 말인가.

아뿔싸- 외가에 도착해 보니 엄마와 재혼한 남자가 외할머니께 세배하러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작은 마을 녹동에는 서울물 먹은 영자가 왔다, 고 소문이 좌악 퍼졌다.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던 엄니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을 줄이야. 설날이라고 떡국 한 그릇 얻어먹고 점심나절이 되자 엄니가 웬 젊은 남자를 대동하고 천막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모와 외삼촌들도 몰려와 시집을 가라고 한 마디씩 거든다. 그렇게 밉던 엄마이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모녀는 부둥켜 안고 눈물 콧물을 뿌렸다.

”금산 우리 마을 청년인데 허우대가 훤하지 않냐? 너 고생 너무 하지 말고 아예 시집을 가는 건 워뗘?“

2천 원도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이제 돈을 모을 만한데 시집을 가라니, 시집가기 싫었다. 엄니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말 한자리도 할 줄 모르는 최장훈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금산의 식구들이 몰려와 선을 보고는 이구동성으로 배영자와 최장훈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귓결에 들려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황소처럼 끌려다니며 그날 약혼 사진을 박았다.

하지만 나는 시집가지 않을 것이다. 연휴가 끝나고 면사무소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재바르게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쥐고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누구 좋으라고 시집을 가. 결혼해서 잘 사는 인간 하나를 본 일이 없는데, 두 번 세 번 팔자를 고친다는 엄마를 봐! 뭔 속 시원한 일이 있어. 지지리 궁상에 고생 고생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시집을 가!

녹동과 금산리 식구들이 맘대로 정한 혼인날은 정월 열이틀이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엄마와 이모들, 외삼촌, 외할머니 조카들과 작별을 고했다.

내가 철석같이 믿는 것은 돈이었다. 한 달에 이천 원도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22살부터 남의 집 살이로 모은 돈이 이제 몇만 원이 되는 중이란 말이다.

미자 언니에게 꾸어 준 5만 원을 어서 받으면 좋겠다. 서울서 같은 처지로 알게 되어 언니 동생하면서 자별해진 언니다. 물설고 낯 설은 타향, 눈감으면 코도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정이 깊이 들었으랴! 그러나

천호동으로 돌아와 미자 언니가 들어있던 여인숙을 찾아갔으나 미자 언니의 종적은 묘연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그간 내가 모은 전 재산인데 전화도 없던 시절, 난 그녀를 뭘 보고 그 귀한 돈을 빌려 줄 엄두를 냈을까.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물을 비오듯 쏟으며 나는 그간 몸 담았던 천호동 집에 작별을 고하고 간신히 차삯을 만들어 호남선 열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내와 혼인하기 싫었다. 그러나 금산 사람들과 딸을 주기로 단단히 약속을 한 엄마의 체면이 자꾸 떠올랐다. 이것이 내 운명인가!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셨을까.

”아버지 난 억울해요. 이유없이 삼촌에게 매타작을 당하던 날들이 억울해요. 속 터질 때마다 포악을 떨던 엄마가 용서가 안 돼요. 전 까막눈이에요. 학교는 문 앞에도 못 가봤군요. 지네들이 뭔데 나를 개 패듯 패서 수술을 두 번 세 번 했건만 신경이 잘 못 되어 걷지도 못하게 했던 외숙들, 그들에게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못들었어요. 무지스럽다 못해 무지몽매한 세월!

이 분하고 억울한 세월 저도 이렇게 견디기 힘든데 아버지는 어떠셨어요. 아버지 앞에서 어찌 억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앞에서 분통을 터뜨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희도 힘들었어요.

삶은 동시에 두 가지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라, 맞고 또 맞아 하루도 멀쩡한 날 없는 피가 낭자한 가족들간의 싸움, 집 앞 저수지에 빠져 죽는 편이 나은데 이것이 운명인지 죽지 못하고 녹동을 향해서 오늘 기차가 달리네요.

불쌍하고 불쌍한 내 아버지 배진섭! 당신이 27세에 그 험한 꼴을 당하셨으니 딱 제 또래일 때 가고 말았군요. 제가 올해 스물여섯 살 아닙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걸까요?“

 오른쪽 70대 중후반의 어머니, 고 한경림 여사와 오십대 중반의 배영자 님(사진 출처 : 배영자 님)
 오른쪽 70대 중후반의 어머니, 고 한경림 여사와 오십대 중반의 배영자 님(사진 출처 : 배영자 님)

 

4) 손톱을 뽑고 결국은 처형

당시 나 배영자는 5살, 언니 배맹자님은 7살이었다. 11월의 들판은 건조한 바람이 불고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어머니 손에 끌려 영문도 모르고 얼마만큼 가니 마을 사람들이 논빼미를 둘러싸고 빼곡 논두렁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에 시커멓게 검뎅이 칠을 하고 두 손이 포승에 묶인 남자가 보였다. 사람들이 내 아버지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머리는 하이칼라 스타일이었는데 옛날 조선사람처럼 정수리에 끈으로 꽁지머리를 잡아맨 남자가 떨고 있었다. 경찰 서넛이 엄마를 데리고 묶인 남자 옆으로 갔다.

“당신 남편이 맞느냐? 네 남편이 맞어?”

라고 소리 질렀다. 엄마는 벌써 사시나무 떨듯 떨며 벙어리처럼 말을 못했다. 연거푸 경찰은 총구로 엄마의 가슴을 찌르며 빨리 대답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정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묶여있던 아버지가 엄마를 향해

“맞다, 고 어서 대답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오시오. 한 집도 빠짐없이 나와서 두 눈으로 확인하라고 마을 중앙 논바닥에 놈을 잡아다 꿇렸소. 갓난쟁이는 들쳐 없고 나오시오. 이놈이 빨갱이요, 빨갱이! 빨갱이가 어떻게 생겼나 모두 눈 똑바로 뜨고 보시오. 일본 동경 유학을 해? 거기서 뭘 배워 왔어. 거기서 빨갱이 교육을 받고 와서 공산당 하려고 한 거지? 바른대로 대라!”

경찰 서넛이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아버지를 때리면서 뭘 배워 오고 돌아와서는 빨갱이짓을 뭘 했느냐고 한동안 다그치더니

“이제 다 구경 끝났소. 마을 사람들은 이제 돌아들 가시오.”

마음도 몸도 얼어버린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모두들 집을 향해서 천근 같은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경찰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떡메치듯 몽둥이로 맞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짓이겨진 아버지는 열 손가락 손톱도 모조리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그날, 1948년 음력 10월 보름 저녁, 고흥군 과역면 노일리 외로부락 중빈 저수지 뚝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통보를 받고 외숙이 내 아버지의 시신을 바작에 지고 왔다. 피 범벅이 되어 축 늘어진 시신을 나는 보았다. 나는 5살이었다.

내 아버지 배진섭님은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야학을 차리고 마을에 글 모르는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얼마간 면서기를 하기도 했다는 소리를 자라면서 들었다.

빨갱이가 무엇이요. 글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 가르쳐 주는 것이 빨갱이 짓이요?

글을 몰라 법도 몰라 법도 가르치고 질서도 가르치고 공맹사상도 가르치고 신학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빨갱이 짓이요? 그렇다면 누구든 많이 배웠다면 빨갱이가 되어야 헐 것 아니오???

 

*. 배영자 님 사연은 하도 기구해 시보다는 200자 원고지 40여장의 엽편 소설로 꾸려보았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합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인이나 유족들께 결례나 되지 않을까 늘 두렵습니다. 진솔하게 신상과 어려운 내력을 공개, 협조해 주신 배영자 님의 만수무강을 빌며 고 배진섭 선생님 모쪼록 극락왕생하시기를 빌어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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