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자식은 세상의 자식이고, 못난 자식이 부모 곁에 머무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잘난 자식이 되라는 건지, 아니면 못난 자식이 되어 부모 곁에 머무르라는 건지 의미가 불분명하다. 잘난 자식만 자식이 아니라 못난 자식도 부모 곁에 머무르게 되는 장점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너무 자기 자식이 잘되고 잘나기만을 바라는 세태를 겨냥한 뼈있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어디 자식만 그러한가? 주위에 있는 사람 중에도 잘 나가는 친구나 지인들은 만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된 친구나 판검사가 된 친구들은 그들이 그 자리에 가기 전까지가 친구이고, 그 자리에 간 이후로는 친구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잘 만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오히려 잘 못나가는(?) 친구들이 모임에도 잘 나오고 이래저래 친구들 어려움도 챙긴다. 세상은 이렇듯 겉보기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원리가 있다. 잘난 친구만 있어서도 안 되지만 못난 친구만 있어서도 곤란하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둘 다 필요한 친구들이다.

톨스토이가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라고 한 말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리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친절한 사람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원래 성품이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사기 치기 위한 목적으로 친절을 가장한 사람, 이별을 위해 어느 날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 사람.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중에 어느 한가지에도 속하지 않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타고난 성품은 친절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인의 성품은 약간 거칠고 불친절한 데가 있는 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 주위에는 이렇듯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친절한 사람과 불친절한 사람들로 둘려싸여 있다. 이중에 내 곁에 오래도록 있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잘나고 친절한 사람들만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것을 따져서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내 곁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났든 못났든,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던 내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가치는 충분하다. 잘나고 못난 것은 관계없으나 그래도 이왕이면 불친절한 것보다는 친절한 게 더 좋기는 하다. 이 때 불친절함의 가치는 친절함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고 그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옛말을 새삼 되새겨본다.

▲ 그림 출처 (한겨레 온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6)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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