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 엉덩이에 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는  세상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던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 점이 몽고반점이며 그 점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아시아 민족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삼신할미가 뱃속의 태아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나가라고 엉덩이를 때리는 바람에 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설화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삼신할미가 어머니 몸속에 있는 아이의 궁등이를 때려서 출산시키기 때문에 푸른 반점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아기들이 막 태어났을 때 우는 것도 삼신할미에게 맞아서 아프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삼신할미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몽고반점이라는 용어 자체에 생각이 머물러 있었다. 몽고반점은 일반적으로 동양인 아기의 엉덩이나 등, 다리에 주로 분포하는 푸른색 반점을 의미한다.   이 푸른색 점을 '몽고반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구 사회에 인상 깊게 각인된 인물이 칭기스칸과 몽골인이고, 서양인들에게는 몽골인이 동양인을 대표하는 인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인 하면 일단 타타르인이라 부르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동양인뿐만 아니라 북미 원주민들의 80~85%,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80%, 남미 원주민의 40% 정도가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며, 동양계 혼혈의 경우에도 몽고반점이 있다.

돌궐제국 당시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비단에 그려진 기마궁사의 모습.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의 장면(오른쪽)과 매우 닮았다. 고구려가 북아시아 유목민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계절 제공 / 출처 : 한겨레 신문
돌궐제국 당시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비단에 그려진 기마궁사의 모습.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의 장면(오른쪽)과 매우 닮았다. 고구려가 북아시아 유목민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계절 제공 / 출처 : 한겨레 신문

 나에게는 특이하게도 엉덩이뿐만 아니라 등에도 커다란 푸른 반점에 있어서 내가 혹시 실종되더라도  등의 푸른 점 때문에 찾기가 쉬울 거라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삼신할미가 나의 엉덩이를 때렸는데도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가려 하지 않자 '이 녀석을 엉덩이 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어 삼신할미가 나의 등짝을 세게 후려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몽고반점에 대한 추억은 몽고족인 칭키스칸이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갈 길을 잃었다. 같은 몽고반점을 지녔다고 해도 엄연히 우리와는 다른 나라요,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몽고반점에 대한 흥미는 반감되었다. 

이제 육십이 넘고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삼신할미에 대한 여러 설화를 이따금 접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의문이 일었다. 삼신할미가 태아를 때리면서 엉덩이에 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는 언제부터 생긴 걸까.  도대체 누가 그런 스토리를 지어낸 것일까. 그것은 머나먼 고대 한국의 조상 중에 어느  이야기꾼이 어느 날 갑자기 재미 삼아 창작으로 지어낸 걸까. 그것이 대를 이으면서 수 천 년 동안 구전되어 내려온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 창작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스토리일까.

여기서 잠깐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짚어보자. 구약성경에 의하면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경계하던 과일을 따먹으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이브의 유혹을 교훈으로 삼으며 왜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금단의 열매를 두어 먹지 말라고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인데 인간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걸 예견했으면서 왜 금단의 열매를 에덴동산에 두었냐고 하느님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한다. 과연 하느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에덴동산 스토리는 사실인가, 아니면  설화나 우화인가.

 〈옛사람들의 눈물〉전송열 지음 / 출처 : 한겨레신문( 2008.08.15)
 〈옛사람들의 눈물〉전송열 지음 / 출처 : 한겨레신문( 2008.08.15)

구약성경 창세기의 포인트는 에덴동산 스토리 자체보다는 인간을 지은 이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하느님의 오래된 섭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여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지만 어느 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부터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으며,  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인간 세상에 왔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주요 내용이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포인트가 하느님의 인간 창조이며, 창조 이후 인간과 하느님의 조화와 대립 관계에 주안점이 있었다면, 몽고반점과 삼신할미의 스토리는 그 주안점이 어디에 있는 걸까. 몽고반점을 볼 때마다 삼신할미를 떠올리게 되는 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애초에 이 스토리의 저자는 몽고반점보다는 몽고반점을 통해 삼신할미 이야기가 구전으로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원했던 게 아닌가 싶다. 즉 삼신할미에 대한 정체성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이 스토리를 만들어낸 저자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과연 삼신할미는 누구일까. 우리는 이제 삼신할미를 통해 고대 한민족의 역사를 추적해야 한다. 삼신할미와 몽고반점 이야기는 한민족의 고대 조상들이 2천년 혹은 3천년후의 후손들로 하여금 삼신할미의 존재를 잊지 않고 찾도록 하기 위해 설정된 미끼이다. 삼신할미는 과연 설화 속에나 존재하고 무당과 산속의 사당에 갇혀 잊혀져야 하는 존재에 불과한 걸까. 삼신할미 이야기는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 사라지고 잊혀져도 될 고대 설화에 불과한 걸까 . 우리는 이  의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세대가 답을 찾지 못한다면 역사는 영영 길을 잃고 말게 될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장

심창식 편집장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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