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휴정에 매화피다

경산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되어간다. 작년 초 수영장이 가깝고 전망 또한 너무 좋고 무엇보다 친구 집이 바로 옆이라 주저 없이 계약하고 이사 왔었다. 햇살 좋은 날 베란다에서 친구 책 ‘그저 지나가게 하라’를 읽는데 강희맹의 ‘만휴정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옛날 당나라 시대 말기의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왕관곡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삼휴정(三休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첫째는 재주를 가늠해 보니 쉬는 것이 마땅하고, 둘째는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것이 마땅하고, 셋째는 늙어서 망령이 들고 귀까지 멀었으니 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일의 기미와 단서가 만 가지나 되는데, 어찌 쉬어야 할 까닭이 특별히 이 세 가지뿐이겠는가?”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삼휴정을 갖고 싶었다. 사공도와 같은 이유일 수도 있고, 삼이가 쉬는 정자가 되어도 좋고, 셋이 쉬는 곳이라도 좋았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멋진 정자를 지어 삼휴정이라 이름 짓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사정이 그러하지 못하니 일단 내 사는 곳을 삼휴정이라 하기로 했다. 당장 A4용지에 까만 매직으로 ‘三休亭’이라 크게 써서 베란다에 붙였다. 그리고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내 생일 날 예쁜 나무 현판을 만들어 와 가족과 현판식까지 했다.

삼휴정에서 바라보는 일출, 백자산, 성암산 풍광이 그 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삼휴정에서는 책도 더 잘 읽혔고, 삼휴정서 먹는 음식도 더 맛났다. 삼휴정에서 잠시 자는 낮잠은 역시 꿀잠이 되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딸내미가 영국에 가며 두고 간 암체어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다 보면 쉬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며칠 전 삼휴정 창밖을 내다보는데 건넛마을에 흰 나무들이 보였다. 나뭇잎이 반사되어 그런가 하고 자세히 보니 꽃이 핀 거 같았다. 당장 가서 보니 매화꽃이 벌써 피어 있었다. 따뜻한 날이 며칠 계속되더니 양지바른 매실 밭에서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것이다. 선비들이 매화향 맡기 위해 심은 것이 아니라 매실을 위해 농부가 심은 거지만 향 좋고 봄을 알려주기에는 충분했다. 저 건너 산에는 그제 내린 눈으로 하얀데 매화꽃은 당당하게 피어난다. 삼휴정에서는 고개를 들면 하얀 눈이 고개를 숙이면 매화가 보인다.

오늘은 난에 물 주고 봄을 기다리며 난 삼휴정서 좀 쉬어야겠다. 곧 총선이다. 산업 현장에서 더 일하실 수 있는 분들은 쉬고 있고, 정치판에는 꼭 쉬어야 하실 분들은 이번에도 부지런히들 표를 구하고 있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psalm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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