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태학사 박제상, 역사의 새벽을 열다

로마 역사는 어떻게 그리스 신화와 연결되었을까. 누군가의 창의적인 역발상이 아니고서는 그런 방대한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당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로마의 역사를 그리스 신화와 연결하라는 작업을 지시했다.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인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 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되며 단테가 그의 저서 <신곡>에서 저승의 안내자로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 신들의 후예를 로마의 시작으로 잡으면서 로마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로마 역사가 위대해 보이는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부탁을 받은 베르길리우스가 로마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는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쓴 대서사시다. 베르길리우스는 농경시를 완성한 후, 자신을 후원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 완성도에 만족하여 베르길리우스 평생의 꿈인 서사시를 써 보라는 격려를 받고 서사시에 착수할 결심을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서사시를 지음으로써 로마의 역사와 그 지배자를 찬양하고 기릴 목적이었으며, 위대한 그리스적 전통과 로마의 기원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로마는 그리스 신화에 자신의 역사를 접목하여 새로운 고대 역사를 만들어냈지만 한국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마저 부인하며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고대 역사는 어디에 숨어 있으며 누가 감추었는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 시대 이전에 있었던 고대 한국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환단고기는 위서 논란에 휩싸여 맥을 못 추고 있고 환단고기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국뽕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이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 필자 사진)
고대 로마의 유적지( 필자 사진)

 우리에게는 역사의 혜안을 지닌 아우구스투스 같은 현명한 군주도 없었고, 로마 역사에 그리스 신화를 접목한 베르길리우스 같은 천재적인  인물도 없었지만, 대신 우리에게는 고대 한국 상고사를 상기시키는 삼신할미의 전설 같은 설화가 있었고, 그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고자 한 신라의 출중한 인물이 있었다.

삼국시대가 고대 한국 역사를 이어받은 역사임을 입증하며 한국 고대 상고사를 기록한 사람은 바로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이다. 지마왕(신라 6대 왕)의 고손인 박제상은 신라 내물왕 때 보문전 태학사를 지낸 후에  향리인 삽량주(지금의 양산)의 간(干)이 되어 징심헌(양산 징강 언덕에 있음)을 짓고, 상세하게 이치를 변증하여 시원 전래( 始原 傳來)의 역사서  『징심록』을 저술하였다.

박제상은 삽량주 간으로 있을 때, 보문전 태학사로 근무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비서( 秘書)를 정리하여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이 바로 『징심록』이다.  『징심록』은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고대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한국에서 기록 연대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징심록』은 15지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그 중 제1지인 <부도지>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후에 박제상의 아들 백결 선생이 <금척지>를 지어 보태고, 조선 세조대에 김시습이 <징심록추기>를 쓴 바 있다.  『징심록』은 영해 박씨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왔으나, 지금은 애석하게도 <부도지>와 김시습의 <징심록추기>만이 남아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국가적 서사시의 주제와 신화적  자료들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빌어 왔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아이네이스가 담고 있는 역사적 요소로는 로마의 건립 기원을 그리스 신화와 연결지으며 그에 따른 신화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박제상은  신화나 서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신라가 보관하고 있던 역사적 자료와 영해 박씨 가문의 비서를 바탕으로 『징심록』을 저술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역사가 아닌 문학작품이지만 박제상의  『징심록』은 역사적 자료이다. 

박제상의 『징심록』에 나오는 <부도지 符都誌>는 상고시대의 마고성 시대로부터 시작한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기록한 문헌으로 박제상 사후에 영해 박씨 종가에서 필사되어 전해왔다. 부도지(符都誌)라는 말은 "하늘의 뜻 (天符)을 받드는 도읍(都)에 관한 기록(誌)"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세조 이후에는 영해 박씨들이 숨어살게 되면서 숨겨졌다가, 김시습이 저술한 『징심록 추기(澄心錄 追記)』에 의해 원본 『징심록』과 그 속에 있던 『부도지』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따라서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는 『징심록』 의 문헌적 가치를 고증해 주는 유일하고도 귀중한 문헌이다.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 출처 : 한겨레신문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 출처 : 한겨레신문

현존하는 『부도지』는 1953년 울산에 있던 영해 박씨 55세손인 박금의 복원본을 말한다. 박금에 의하면, 해방 후 월남할 때에 여러 대에 걸쳐 전수받은 원본을 함경남도 문천에 놓고 왔고, 분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원본에 가깝게 남한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박금은 해방 전에 동아일보 재직 시에 이를 번역 연재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 1986년 김은수의 번역본이 출간되어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박제상의 종가에 왕사(王師)를 보내 부도의 일을 상세히 물었고,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도 여러 차례 영해(지금의 영덕)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부도( 符都)라는 말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수도라는 뜻이다.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성에 근원을 두었던 한민족이 어떻게 해서 환인, 환웅, 단군에 이르게 되었으며 어떤 연유로 천산,적석산, 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지역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장

심창식 편집장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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