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밥 한 끼의 눈물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추운 곳, 백두산 기슭의 개마고원 대홍단이다.          봄이면 철쭉꽃 피어나고 8월이면 하얀 감자꽃 만발한 대홍단은 추운 고원지대의 특성상 감자 농사밖에 지을 수 없는 척박한 곳이다.   

김정일 시대에서 북한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하여 '감자 농사로 혁명을 일으킨다'는 구호는 말로만 끝난 시나리오였고 거짓말 선전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98년 11월 말, 그 해 감자 농사 혁명의 ‘방침’을 실현한다며 김정일은 10년 넘게 군사복무를 마친 제대군인 천명을 대홍단에 집단 배치하였다.

영하 30도의 추운 겨울, 우리는 그 천명 제대군인들의 살 집을 짓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천명 제대군인들의 살림집이 다 완공될 때까지 집에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 우리의 한 끼 식사는 삶은 감자 몇 알 혹은 삶은 통 옥수수 몇 숟가락이 전부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개마고원의 아름드리 잎갈나무가 많아 그 나무를 베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남자 3명, 여자 1명씩 조를 묶어 톱으로 나무를 베어 모아놓았다가 산 아래로 운반하였다. 그날도 우리 조는 희멀건 소금 시래기 국으로 통강냉이 밥을 삼킨 후 산으로 올랐다. 배고픔과 추위로 손발은 덜덜 떨렸고 그러면서도 살기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추운 겨울의 배고픔은 사람을 아무런 움직일 기운도 없이 눕고 싶은 생각만 들게 하였지만 그렇게 되면 얼어 죽거나 손발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이 톱으로 나무를 베면 한 사람은 그 나무 방향을 잡아 한곳으로 쓰러뜨리고 여성은 그 나무의 잔가지를 쳐 매끈하게 원목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우리에게 차례진 것은 얼어서 사각사각 소리 나는 통 옥수수 점심이었다. 그것도 마다하면 일을 할 수 없기에 얼음과 함께 그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였다. 순간 순간 변하는 개마고원 날씨에 갑자기 눈이 오고 눈보라까지 불었다.

오후 2시쯤 되었을 때 “우지직, 우지직” 나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 뒤로 사람이 나무에 깔렸다는 비명이 들리었다. 밑동아 리가 잘린 나무가 넘어가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방향을 바꾸면서 사람을 덮친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통나무 밑에 깔린 사람의 시신을 겨우 수습하였으나 그 신체의 모든 골격은 아름드리 통나무에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동료의 시신을 5톤 트럭의 짐칸에 싣고 그의 집으로 갔다. 한쪽 눈을 실명한 연로한 어머니와 갓 결혼한 새색시가 시신을 맞이하였다. 뼈가 산산조각이 난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면서도 그 누구도 악마 같은 정권을 탓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그 집에 장례를 치를만한 쌀알 한 알이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작업반 단위로 백미를 모아서 겨우 장례 상에 밥과 국과 고기를 올릴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는데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눈물과 함께 그 밥을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깨끗하게 없어진 장례 상을 씁쓸하게 보던 그 누군가가 말하였다. “옛말에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네요.” 눈물을 삼키며 먹었던 그 한 끼 밥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편집 : 김혜성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장
김혜성 객원편집위원  cherljuk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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