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밥 한 끼의 수치스러움

내가 도저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을 탈출한 2002년 6월이었다.

아직 완전히 추위가 가셔지지 않은 북방의 6월이었지만 그래도 초여름이라고 길 옆의 굶어 죽은 시체들에서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나는 중국에 돈벌이라도 하려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북중 국경을 넘게 되었다. 30대 초반의 함경북도 연사에서 온 여성 , 17세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가씨 한명, 해산 날자가 되어오는 듯 한 아주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성 4명과 길을 안내해주는 브로커 남성 3명이 우리의 일행이었다. 처음 계획에는 6시에 출발하여 8시 경에 두만강 상류를 넘어 2시간가량 걸어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우리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더 큰 문제는 해산 막달의 임산부였다. 총소리에 놀라고 벼랑에 굴러 내리다 보니 당장 해산해야 할 상황이 부딪쳤다. 겨우 두만강을 넘어 숲속에 모였을 때 임산부 언니의 자궁이 터져 양수가 흐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풀숲에 옷을 벗어 임산부를 눕힐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해산 방조하였다. 아이를 낳아본 사람은 연사 언니와 임산부가 전부였지만 어쨌든 아이는 무사히 힘들고 어지러운 세상에 나왔다. 아이의 탯줄을 끊을 가위도 없어 연사 언니가 자신의 이로 물어 탯줄을 끊었다. 산모가 피를 흘리며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지체할 수 없었기에 길을 떠났다. 남자 한 명은 아이를 배낭 안에 넣어 메었고 다른 두 명은 산모를 부축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에 한참을 산을 헤매다 보니 우리는 길을 잃었고 방향마저도 찾지 못하였다.

우리는 2일 밤 3일 낮을 산속에서 헤매었고 두만강 상류를 따라 가면서 목적지를 찾았다. 가지고 떠났던 한 끼 분량의 주먹밥도 총알에 배낭이 떨어져 나가면서 없어졌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식량은 연사 언니의 아들이 준 것이라는, 그래서 고이 보관하고 있었던 개구리 한 마리가 전부였다. 우리는 그 언니에게 미안하고 그의 아들에게 수치스럽지만 살기 위하여 개구리를 나누어 먹으며 걸었다.

3일째 새벽 우리가 겨우 찾아 도착한 목적지는 중국 화룡의 깊은 산속 움막이었다. 움막 주인은 놀라면서 일단 먼저 임산부에게 밥을 먹이라고 조금 남아 있던 밥을 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조금의 밥에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어 임산부의 몫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움막 주인은 “산모에게 주라는 밥을 다 먹으면 어쩌냐?”며 혀를 끌끌 찾고 한심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참으면 밥이 되는데 그동안을 참지 못하여 산모 밥을 먹느냐?” “무슨 인간들이 숱한 피를 흘려 혈색 하나 없는 산모 밥을 다 처먹나? 목구멍에 그 밥이 들어가더냐?”

30분 정도 지난 후 정말 밥이 나왔고 배가 부른 그때에야 우리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배낭 속에서 숨 막혀 죽은 핏덩이 아기와 넋을 잃고 멍하게 앉아있는 임산부 언니를 마주 볼 수 없었다.

편집 : 객원편집위원 김혜성,  심창식 편집장

김혜성 객원편집위원  cherljuk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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