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위안부인가?

싸움의 기술

 

싸움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경우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움 전의 팽팽한 긴장감과 싸울 때의 무자비한 폭력성, 그리고 싸움 뒤에 밀려드는 후회감 등 웬만한 사람이라면 즐길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왕 싸움을 시작하였으면 이기고 봐야 한다.

지는 싸움은 치사하더라도 피하는 것이 낫다.

 

손자병법에 보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으뜸이라 하였다.

 

백 번 싸워서 백 번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최상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이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은 외부적인 교섭으로 상대의 뜻을 꺾는 일이다. 또한 상대의 동맹관계를 분산시켜 고립시키는 일이다. 이는 희생이 요구되는 외곽의 공격 따위로 하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아군의 병력을 감안하지 않고 강대한 적에게 도전하는 것은 현명한 전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상대를 다치지 않고 항복시키는 것이 이상적인 전법이다.

 

병력이 열세이면 후퇴하고, 승산이 서지 않으면 싸움을 피하여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절대로 패할 리 없다.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반드시 패한다.

 

"무릇 전쟁을 하는 방법은 적국을 온전한 채로 두는 것이 상책이며, 적국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그러므로 백 번을 싸워서 백 번을 다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군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오로지 정치의 도구다. 정치적인 여러 가지 관계의 연속이며, 정치 아닌 방법으로 행하는 정치의 실행이다.

 

전쟁은 수단이며, 목적은 정치적 의도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은 목적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최고의 병법은, 사전에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쳐부수는 일이다. 그 다음의 방법은, 적의 동맹 관계를 분단시켜 고립시키는 일이며, 그 다음의 방법이 싸우는 일이다. 그리고 최하의 방법이 성을 공격하는 일이니, 성을 공격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전쟁 중이다.

더위와 싸우고 , 에어컨을 켤까 말까 누진제와 싸우고 , 기득권과 싸우고 , THAAD 와 싸우고 , 일그러진 역사와 싸우고 그리고 무관심과 싸운다.

 

그중에 가장 나의 털끝을 건드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이미 여러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은 가해자 일본의 입장을 너무나 많이 배려해준 잘못된 용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위안부” 라는 용어에는 가해자의 강제성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요 집회가 1992년 1월 이래로 1244차를 맞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우익, 생소한 다른 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일부 무심한 어르신들에게는 전혀 와 닿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교묘하게 씌워놓은 용어의 굴레 “위안부” 를 아직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최장 시위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그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이름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우리 정부의 공식문서와 모든 언론에서 하나같이 부르고 있는 종군 “위안부” 혹은 일본군 “위안부” 라는 용어는 그 어디에도 강제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으며, 이는 가해자인 일본군 입장에서 명명된 이름이다. 

미국은 2012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강경한 의지 덕에 모든 공식문서에서 “위안부(Comfort Women)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일본군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는 용어가 자리 잡게 되었다.

UN에서도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서관의 보고서에서 일본군 “성노예”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명확히 종군 “위안부” 라는 용어는 종군이라는 자발적인 의미로 부적절하며, 일본 극우 세력들이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명칭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정신근로대“라는 용어도 ”솔선하여 앞장선다“ 라는 뜻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님을 미국과 UN에서 먼저 제기되어 그 명칭이 바뀌어 왔다.

 

그런데 우리정부와 일본정부는 여전히 “정신근로대“ , 종군 ”위안부” 혹은 일본군 “위안부”를 고집하고 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간에 위안부재단 10억 엔의 사용처 “합의“에서 일본 당국자는 ”배상금“이 아닌 ”치유금“임을 강조하며 ”<성노예>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우리 정부의 당국자가 “우리 정부의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이다 ” 라고 친절하게 안심시켜 준 기사를 보면서 오랜만에 싸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성노예”를 강제 모집하여 운영한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마도 일본정부는 외부세계에서 자신들을 “성노예”의 직접적인 가해자로 인식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싸움은 이제부터이다.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명칭을 바꾸자. 왜 우리 정부에서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용어를 고집하는지 알 수 없으나 시민단체와 우리 언론부터라도 명칭을 바꾸어야만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담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 가 맞다. “위안부” 아니다.

▲ 1243차 수요집회 (한겨레신문 8월 11일자)

세계최장 집회인 “수요 집회“를 왜 하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7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1.일본군 “위안부” 범죄인정

2.진상규명

3.국회결의사죄

4.법적배상

5.역사교과서 기록

6.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7.책임자 처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있다.

“위안부”로 규정한 첫 번째 요구사항부터가 가해당사자인 일본군과 일본정부로 하여금 모든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생각이다.

일본군 “성노예”라고 규정하였다면 아마도 일본정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부담스러워 그 꼬리표를 떼고자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의지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스스로가 “위안부”로 규정한 사항을 굳이 애써 해결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니 당연히 범죄인정은 물 건너 간 것이다. 진상규명도 피해자가 해야 하고, 사죄가 아닌 위로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것인가. 배상이 아닌 위로금 또는 치유금이 되는 것이고, 이 상태라면 역사교과서에도 어떻게 기록될지는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우리는 일본정부와 싸우고 있으며, 정확히 일본군국주의와 싸우고 있다. 그 전선을 전 일본 국민들에게로까지 넓혀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상을 잘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은 일본 전 국민들에게는 피로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정도 사과를 했으면 됐지 뭘 또 하라는 거야?”라거나, “스스로 돈 벌러 갔지 누가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라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이야기이다.

싸움에서 헛발질은 스스로 맥이 빠지고 때로는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

우리가 왜?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명확하고 단호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일반적인 일본국민들과의 공감대가 필요한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 평화, 환경보호 등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위안부”라는 애매한 명칭으로는 더 오랜 수요 집회가 필요해 보인다.

 

베트남에 가면 <한국군증오비>라는 것이 있다. “얼마나 한국군에 대한 원망이 크면 이런 증오비까지 세울까?” 내심 한국인으로서 미안한 마음 늘 잊지 않게 한다. 이 증오비는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준다.

 

일본군성노예 피해생존자 할머니들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

그나마 증언자로서 온몸으로 지탱해오던 힘겨운 싸움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위안부”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역사에 기록될까 두렵다.

지난 1천 수 백 회의 몸부림이 모두에게서 잊혀지는 헛된 싸움이 될까봐 두렵다.

 

이 싸움을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마침내 승리하려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바꾸어 부르고 기록하고 요구하여야 한다.

가해자에게 숙제를 던져줘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의 다수국민들이 자각하게 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해야 해결 할 수 있는지,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노예해방>이 이루어 질 수 있다.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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