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 신비의 호수

 

 

뼛속까지 시원하게 전해오는 시원함.  바이칼(Baikal) 호수의 느낌은 그 이상의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지구가 이렇게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데도 어쩌면 이리 독야청청할 수 있을까 싶을만큼 범접하기 어려운 맑은 그 무엇이었다.

인공(人工)이 전혀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바다와도 같은 물결, 그러면서도 바다와 같이 높은 파도가 치지 않아 더없이 고요한 수면, 그래서 어디쯤이 하늘이고 어디가 수면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드넓은 호수는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그 수면 아래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에 대해 상상을 불허하는 듯한 신비로운 태곳적 느낌 그대로 순응해야만 하는 무엇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인종과 문명을 잉태하고 융합시킨 천혜의 호수. ‘시베리아의 진주’ ‘시베리아의 파란 눈’이라고 일컫는 바이칼은 부랴트어로 ‘큰(바이) 물(칼)’이란 뜻이란다. ‘큰 물’ 답게 호수의 길이는 630km, 폭은 20~80km, 둘레는 무려 2,000km나 되며, 면적은 한반도의 3분의 1과 맞먹는다. 제일 깊은 곳은 수심이 1,630m(한라산보다 조금 낮은 산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의 깊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세계 담수량의 20%를 차지하는 담수호란다.

336개의 하천이 흘러들어와 호수를 이루지만 빠져나가는 강은 오로지 안가라강 하나뿐이라는데 어떻게 수량이 조절되는지는 아직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바이칼에는 2,5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그 가운데 약 4분의 1은 이곳에만 있는 특이종이다. 북극에서 비밀 수로를 통해 흘러와 바다인줄 착각하며 산다는 민물 물개, 체질의 절반 이상이 지방이기 때문에 햇볕에 나오기만 하면 금방 버터처럼 녹아버리는 골로미양카 등 특이한 동식물들이 많다고 한다.

수면 40m의 깊이에 있는 지름 40cm의 쟁반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호수, 이는 보코플라프라는 새우 모양의 작은 갑각류(甲殼類)가 싹쓸이 청소를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물에 손을 적시기만 해도 5년, 발을 담그면 10년이나 젊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나는 그 물에 손을 적셨으니 5년 수명연장은 보장받고 온 것이다.

이르쿠츠크의 8월은 여름이라지만 우리나라 여름처럼 무덥지도 습하지도 않아 다음 계절로 향하는 간절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태양 아래 햇빛이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 표면 위로 벌어지는 운무들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 깊은 호수의 비밀이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그 태양열이 만들어낸 운무는 바이칼을 더욱 신비 속에 가두어 두려는 듯했다.

 

바이칼을 둘러싼 시베리아의 풍경 역시 바이칼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어딜 가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직선으로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자란 소나무와 자작나무의 무성한 숲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풍경은 바이칼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못 시니컬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러한 느낌 때문인지 내가 묵었던 숲속 통나무집 앞을 흐르는 강건너 숲속에서 들려왔던 늑대의 울음 소리도 그러려니 별로 낯설지 않았다.

서늘한 기온,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 녹색의 대 평원, 이는 차이콥스키 음악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서정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는 동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처럼 아늑하고 함께 어우러진 듯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양식은 서양의 양식과 다른 동양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곧게 뻗은 나무가 많은 나라서라 그런지 성당, 사원, 가옥 모두 이들 나무가 주 재료로 쓰였다. 유럽의 건축양식과 비슷한 양식인 듯 하나 많이 소박하고 투박하여 인간적인 느낌이 든다고 할까. 이르쿠츠크 공항에서의 경직된 입출국 수속(투박했지만 인간미가 느껴졌다), 공항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철도 역사 정도의 수준인 첫인상에서 편안하게 다가오는 느낌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를 찾는다고 한다. 아직 관광장소로서의 정비된 느낌도 편리함도 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개발되지 않은 천연환경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에 이르쿠츠크 시는 늘어나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개발을 서두르고 있지만, 러시아 정부는 천혜의 바이칼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즉 세계 어디서나 직면하고 있는 문제, '개발인가 보존인가'의 중대 기로에 선 듯하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결정될 것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바이칼 호수와 그를 둘러싼 환경들이 그대로 보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년 중 단 몇 개월만 햇빛과 따사로움이 허용되고 대부분 추운 겨울인 이르쿠츠크, 쭉쭉 뻗은 시니컬한 나무숲들,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바이칼의 기운, 여기서 어떤 따사로움보다는 고독과 외로움과도 같은 서정성이 더욱 강렬하게 전해오지만, 그래서 더욱 인간 본연의 정서, 서정성이 뚜렷하게 밀려오는 듯하여 기꺼이 그 고독과 외로움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그런 곳이다. 온갖 비정형적 인공으로 뒤덮인 인간 세계를 뒤로하고 그리움을 향해 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바이칼은 젊은 호수라고도 한다. 지금도 그 수면 아래 땅 속 깊은 곳에서 지진이 진행 중이고 지각판이 흔들리고 벌어지면서 호수는 조금씩 더 커져가고 있다고 한다. 젊어져가고 있는 호수, 몇 년 후 다시 바이칼을 찾았을 때 그 싱싱한 젊음이 탐욕에 의해 처참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래도록 그 고독과 외로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싶다.

(이글은 본인 브런치 계정에도 실린 글이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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