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과 민간선박들

23전 23승이란 전쟁을 이순신은 혼자서 싸웠을까? 그동안 이순신에 관한 책이나 영화 등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만을 말했지 거기에 같이 싸웠던 수군장군이나 민간인들에 대해선 누가 말한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것들이 구전으로만 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사실조차도 밝히지 않으니 너무 한 것 아닌가 싶다. 이충무공전서 하권 35쪽에는 몇 백 척인지 모르는 피난선이 모여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회령포를 출발하여 명량까지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들의 피난선을 만나서 같이 행동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실명까지 기록한 이충무공전서상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O. 마씨가장(馬氏家狀)에서란 기록에는 마하수(馬河秀)는 장흥사람이요 벼슬은 선공주부(繕工主簿)였다. 정해년(丁酉年)에 배 한척을 만들어 해상에서 피란하다가 이순신이 복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우리들이 무었을 걱정하랴“ 하고 드디어 회령포(會寧浦)로 가서 문안을 드리니 이공이 이르기를 칼날을 무릅쓰고 찾아오니 무척 수고 했구려. 그대의 고을에서 온 피란선이 몇 척 인고, 하니 모두 10여척 가량 된다고 했다. 이순신은 배들을 모아 나의 후원이 되어 군대의 위용을 도와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고, 그는 제가 비록 늙었으나 공과 함께 죽고 삶을 같이 하겠습니다. 이에 이공이 극구 칭찬을 하면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예절 바르고 성스러운 평화의 나라/ 추악한 오랑캐가 마구 짓밟아오네/ 사나이 늙었어도 뜻은 살았소/ 지금이 바로 전쟁에서 죽을 때일세. 라는 시를 지었다.

 

그때 백진남(白振南),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 10여인이 피난선을 가지고 와 모였는데 정명설(丁鳴說)도 역시 그 가운데에 끼어 있다가 공을 찾아와 우리들이 본래부터 길러온 충성심인데 오늘날을 당하여 늦춰서는 안 됩니다. 듣자오니 이통상(李統相)이 방금 피난선으로 하여금 먼 바다에 열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라 하시니 이 기회를 타서 같이 나간다면 파죽(破竹)의 승세(勝勢)가 오직 이 한 번에 있을 것이요 라고 하자 공도 내 마음도 벌써 정했다고 대답했다.

회령포에서 이진까지 오는 길에는 이순신에게로 모여든 피난선들을 합하여 하나의 선단을 이루고 항해하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명량싸움에 피란선 10여척과 함께 바깥바다에서 진을 벌리고 있다가 이공이 적에게 포위됨을 바라보고는 칼을 뽑아들며 대장부가 죽어야한다. 두 아들 성룡(成龍), 위룡(爲龍)을 데리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오래도록 힘껏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성룡과 위룡이 아비의 시체를 안고 돌아와 피난선에 올려놓은 다음에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다시 돌진하자 적은 이미 이공에게 패하여 군사를 몰고 도망가므로 다시 분을 풀 곳이 없었다.

 

O. 또한 정유년 변란에 이순신은 피난선(避亂船)을 모아서 해구(海口)로 물러가서 진을 쳐놓고 직접 전함을 타고 나가서 적을 공격하였다고 했다.

 

O. 연려실기술에는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耒島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 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고 이 피난선들을 바다 가운데를 들락날락하게 해서 실제로 전선이 많은 것처럼 하였다.

 

이것은 필시 일자진 등의 대열을 하고, 왜적에게 전선이 많은 것처럼 하였을 것이다.

 

O. 백사집에도 적선 5~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앞서 배를 타고 피난 나온 호남의 사서인(士庶人)들이 모두 진영아래 모여서 공을 의지하여 생명줄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하여 먼저 피난선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해서 이들을 의병(疑兵)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O. 잠곡유고에는 호남의 피난선(避亂船)들 가운데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해 있는 것이 100여 척이었는데, 공은 그들과 약속한 다음 진을 친 후방에 그 배들을 늘어세워 응원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공의 배 10여 척이 앞에 나아가서 벽파정(碧波亭)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웠는데, 왜적선 수백 척이 와서 덮치는데도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진을 정돈하여 왜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충무공은 이렇듯 부족한 전선으로 싸우기 위해 피난선들이 동원되었고 그들도 이공에 의지하여 살길을 찾았던 것이다.

 

O, 함평문화원의 기록을 보면 3930(1597)년 9월 5일 구암 김충수가 자기의 집안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 명량해전에 참전하려고 하였으나 수에 밀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영산강 깊숙한 대굴포에서 까지 참전하려 했던 것을 보면 서남해안의 민간인과 민간선박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에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리포진 수군을 중심으로 한 군선과 피난민 중에서 차출된 군인들로 무장하여 이곳의 물길에 익숙한 어민들이 회령포에서 출발하여 비교적 안전한 항로인 금일도, 조약도(약산도), 고금도를 지나 이진에 진을 치고 칼캥이(괘도포)를 지나고 어란진을 거쳐 명량에서 그 유명한 명량해전이 있었다.

이렇게 회령포에서 어란진 까지 오는 과정에서 수백 척의 피난선들이 합세하여 하나의 큰 선단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완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섬에 흩어져 있던 피난민과 피난선으로 이루어진 배와 군인으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그 공을 이순신에게만 돌릴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우리의 어민들에게도 우리는 머리 숙여 명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없었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장에서 설명을 하였듯이 회령포에 있던 배를 모두 거북선으로 꾸미라고 했고, 그 배로 명량해전에서 싸웠다면 거북선이 없었다고 하는 말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는데 좀 우스운 말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 말은 약무완도시무국가(若無莞島是無國家)라는 말이 더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말은 난중일기를 보면 크고 작은 작전회의에 가리포 첨사가 빠진 일이 거의 없었음을 볼 때 가리포진의 중요성과 강한 수군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근의 장흥, 해남, 강진, 진도는 주업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바다와는 멀리하고 산 사람들이었고 완도는 주업이 어업이었기에 바다 속을 끼어 다닌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사람들이었기에 가리포진의 군사들은 모두가 완도사람들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선조34년(3934, 1601. 5. 19)에 구국의 땅이라 하여 경상도의 부산과 거제, 전라도의 고금도에서 과거를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어서 선조수정실록36년(3936, 1603.1.1)의 기록을 보면 이때 문과 이명준(李命俊) 등 10인과 무과 신경유(申景裕) 등 1천6백여 인을 선발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곳 고금도를 비롯한 완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충청일보 4342(2009)년11월 25일자 기사에 충북문인협회 수석부회장인 장병학씨는 이순신과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던 이순신의 조방장 이영남을 소개하는 글에서 3931(1596)년 장흥부사를 거쳐 1597년 이순신과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3933(1598)년 가리포 첨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완도의 장정들을 훈련시켜 11월 19일 임진전쟁의 7년 전쟁을 마무리 짖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승리하고 36세로 순국하였다고 했다. 이 기사에서 가리포진 수군이 강병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고금진에 있던 모든 군선과 수군을 총동원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는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올 때 수군의 수는 2천여 명이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으나 노량으로 출전할 때의 수군은 8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더라도 완도인 들의 구국에 대한 충정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모두들 이렇게 하여 임진전쟁이 종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1603년 11월 24일자로 제59대 가리포 첨사로 부임한 최강(崔堈)첨사가 3938(1605)년 6월 7일 완도의 석장포에서 40여척의 왜선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화공법을 써서 모두다 불에 타고 2척만 도망을 하였는데 이를 추자도까지 쫓아가 격침을 시켰다. 이후로는 왜선이 출몰하지 않아 사실상의 종전은 이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강첨사는 경남 고성출신으로 재임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이곳 어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훗날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이곳 어민들은 재임 시 선정에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어 고성으로 달려가 3년 상을 고성에서 치루고 왔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당시의 격전지였던 석장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 그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그래서 왜침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때이고 곧 가리포진의 수군과 어민들로 인하여 모든 왜침이 끝이 났다. 오늘의 완도는 청해진 시대를 거쳐 가리포진 시대, 항일운동의 일 번지 등 이 나라를 위하여 어려울 때 마다 큰일을 했던 구국의 땅이다.

 

O, 이충무공전서 하권 101쪽에는 대제학(大提學) 이민서(李敏敍)가 명량을 지나다가 남도 사람들이 그곳에 돌을 새우고 거기에 새길 글을 청하여 지은 글이 있다.

 

울도목이여 좁을러라/ 조수 벅참이여 두 골 새(사이)로 빠지도다/ 지세 따라 싸움이여 꾀로서 이기나니/ 저까짓 섬놈들이여 견디지 못하도다/ 군사들 날램이여 북소리 울리는데/ 적을 무찌름이여 남김없이 휩쓸도다/ 오직 장군이여 의와 용맹 갖추시니/ 바닷길 억누름이여 걱정이 끊이도다/ 성난 물결 덮침이여 용과 고래 달리는데/ 싸움터 바라봄이여 영특한 재주 그리도다/ 넋이 갸륵하심이여 한 바다에 번듯하매/ 별들을 꾸짓음이여 바람 우레 일구도다/ 바다 아니 마름이여 돌도 아니 삭을 진저/ 장한 공적 밝히어 그지없이 빛나도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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