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침투와 탈출

가만히 보자하니 녀석들이 휴머니즘을 대놓고 비난하고 있었다. 내가 휴머니즘을 제창한 사람도 아닐진대 녀석들로부터 휴머니즘에 대한 비난을 듣자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녀석들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상을 빙자한 녀석들의 항변의 와중에도 소규모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 중에 협상을 한다고 해서 전투가 완전히 중지되지는 않는다. 이름하여 국지전이라 하여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전투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기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식의 기싸움은 하수들이 하는 짓이다. 고수는 기싸움을 하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면서 감성적으로 접근하여 자기에게 호감과 친밀감을 갖게 하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녀석들이 바로 그러했다.

예상한대로 녀석들은 전과는 다르게 변칙적인 국지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화장실의 유인술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는다든가 거실에 잠간 등장하여 눈앞을 어지럽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식으로 게릴라전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게릴라전은 그리 치열하지도 않았고, 역시 녀석들은 나를 도발할 의도는 없는 듯하다. 나에게 자신들을 찬찬히 관찰할 기회를 주는 듯도 하다. 녀석들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기는 하다. 녀석들은 나의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녀석들은 아파트의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는 것일까? 녀석들의 본거지는 물론 아파트 정화조일 것이다. 정화조에서 장구벌레로 있다가 성충이 된 암컷들은 이제 사람이 사는 아파트 내부로 침입하여 사람의 피로 영양분을 보충해야 한다. 정화조에서만 살던 녀석들이 아파트로 침투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Wyeomyia smithii' 모기의 유충. 순환계의 분할된 부분과 해부학적 구조가 보인다.(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A%B8%B0)

아마 고참 모기들이 신참들에게 사전 교육을 시킬 것이다. 정화조에서 어떤 경로로 아파트로 침입할지, 침입한 후에는 어떻게 사람에게 접근하여 피를 빨아먹을 것인지 등. 또한 사람들이 잠잘 때가 피를 빨아먹을 최고의 시간대이며 이 때 쓸데없이 날개짓을 하여 앵~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할 것과 앵 소리를 낼 경우 인간의 신경질을 자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할 수도 있음을 주지시킬 것이다. 그리고 피로 배를 채운 다음에는 어떻게 아파트 밖으로 탈출해야 할지까지 모기끼리의 본능적 교감으로 알려줄 것이다. 나는 이제 녀석들이 교육받았음직한 침투와 탈출 경로를 알아내야 한다.

먼저 침투 경로다. 침투 경로를 알면 자연스레 탈출 경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엘리베이터를 통해 침투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집안에 들어온 녀석들의 숫자를 세어보면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된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아파트 내부와 외부를 잇는 출입구가 있는 것이다. 살펴보니 출입구로는 화장실 하수구와 다용도실 하수구가 있는데, 물만 통과시키기 위해 하수구 마개가 촘촘한 편이다. 침투하는 입구로 이용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면대의 배수구가 침투 경로로 더 용이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주방 싱크대의 개수구가 있는데 살펴보니 통로가 넓어서 녀석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만큼의 공간으로는 충분하다. 주방에서 설거지한 물이 정화조로 흘러가는 용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수구의 개념이라면, 거꾸로 정화조에서 아파트 주방으로 침입하는 용도는 녀석들이 생각하는 개수구의 개념인 것이다.

다음으로 탈출 경로는 어디일까? 일단 침투하는 경로를 탈출 경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과 다용도실의 하수구는 마개가 촘촘하다. 하수구를 통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있어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에는 용이하지 않을 듯하다. 게다가 마개 밑에 여과장치도 있다. 가능은 하겠지만 보다 쉬운 탈출 경로를 모색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면대 물내려가는 곳도 탈출 가능한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방 싱크대의 개수구를 보자. 개수구는 출입구가 넓다. 웬만한 건더기도 다 통과시킬 수 있다. 녀석들이 암만 인간의 피로 배를 채운다 해도 자기 몸집의 3배까지가 한계이다. 모기가 3배로 뚱뚱해져 최대 크기가 된다 해도 너끈히 통과할 정도로 넓다.

암컷이 인간의 피로 배를 채우고 나면 몸이 둔해지고 비행이나 공중 선회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몸집이 불어나 기동력이 떨어진 암컷이 알을 낳기 위해 아파트에서 탈출하려면, 마개가 촘촘한 화장실이나 다용도실의 하수구보다는 통로가 넓은 주방 개수구로 빠져나갈 확률이 높다. 그런데 주방 개수구로는 각 가구마다 쏟아내는 물과 찌꺼기들로 인해 정화조까지 가기 전에 암컷이 급류에 떠밀려 생존이 위험할 수 있다. 물론 숱한 세월동안 개수구에서 흐르는 물에 이미 적응을 끝냈을 수도 있다.

▲ 중국얼룩날개모기의 알을 2000배 확대한 모습(사진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4&contents_id=74)

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녀석들은 알을 낳기 위해 물웅덩이나 물이 고인 곳이 필요하다. 그런데 화장실 대변기에는 늘 물이 차 있다. 거기에 알을 낳는 건 아닐까? 거기에 알을 낳으면 자연스레 정화조로 흘러들어가 알들이 자라기에 더 이상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암컷이 둔한 몸으로 빠져나가다가 급류에 휩쓸릴 위험도 사라진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화장실 대변기에서 녀석들의 알을 본 적이 없다. 녀석들은 한 번에 150개 정도의 알을 낳는데 아무리 알이 작아도 그 정도면 눈에 뜨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들여다보니 알이 물 표면에 떠있으라는 법은 없다. 암컷이 낳은 150개의 알이 뭉쳐 있는 상태에서 대변기 밑에 가라앉아 있다면 사람 눈에 뜨일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암컷은 10~13회에 걸쳐 알을 낳기 때문에 암컷이 아파트 내부에 머물면서 계속 알을 낳기에 대변기만한 게 없을 것이다. 더구나 모기조차도 보일까말까 한데 하물며 모기가 낳은 알들이 150개라 한들 눈에 뜨일 리는 더욱이나 없다.

아파트 내부로 들어오는 게 문제지 알을 낳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수 있다. 암컷은 물이 고인 곳에 알을 낳기만 하면 된다. 화장실이나 다용도실 하수구 쪽에 알을 낳으면 사람들이 화장실 바닥이나 다용도실을 물청소할 때 자연스럽게 휩쓸려 내려가 정화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방 개수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렇게 알을 낳은 암컷은 길어야 1달 정도 밖에 못살기 때문에 사람들과 좀 더 지내다가 자연사할 수도 있고 정 답답하면 주방 개수구를 통해 탈출하여, 사람들로부터 살해당할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 장구벌레(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A%B5%AC%EB%B2%8C%EB%A0%88 ˆ)

그러나 이 생각은 틀렸음이 곧바로 드러났다. 간밤에 나의 피를 실컷 빨아먹은 암컷이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가려움을 참아가며 일부러 녀석을 잡지 않았다. 다음날 관찰할 용도로 살려둔 것인데 아침부터 하루 내내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파트 외부로 탈출한 것이다.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녀석들이 일깨워 준 것이다. 암컷은 새끼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 환경에서 알을 낳기를 꺼려할 것임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의 피를 뱃속에 채웠는데, 그 새끼들을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곳에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암컷들은 또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정화조로 탈출하여 거기서 알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까 녀석들은 대체로 화장실 하수구나 주방 싱크대의 개수구를 통해 아파트 내부로 잠입하여 사람의 피로 배를 채우고, 그 과정에서 운 좋게 사람 손에 죽지 않는 녀석들은 주방 개수구를 통해 빠져나가 정화조에서 알을 낳을 거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수구나 개수구를 통해 들어온 녀석들이 사람 주변을 얼쩡거리며 목과 팔 다리를 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개운치 않기는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녀석들의 고향은 정화조이다. 온갖 냄새나는 물과 액체들이 결집해있는 곳에서 녀석들이 자랐을 텐데 하수구를 통해 들어온들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다만 자신이 처한 불리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폐쇄공간과도 같은 정화조에서 이산화탄소의 냄새를 추적해가며 번식을 이어가는 녀석들의 삶의 의지는, 복잡하고 고단한 인간세상에서 힘에 겨운 삶을 살아가는 요즘의 젊은 세대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가며 불리한 환경을 오히려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고 적응해가는 녀석들의 생존경쟁력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계속>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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