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재, 김광선 - 설군·지역발전 헌신한 삶

▲ 물안개 피어오르는 완도

완도 설군의 일등공신, 침천 김광선 선생

완도 설군(設郡)의 주역은 심재 이도재 공만 있는 게 아니다. 침천 김광선 선생을 빼놓고는 온전한 완도 설군의 역사가 성립되지 않는다. 두 설군 주역은 1896년 완도 설군의 쌍두마차로 중앙과 지역에서 설군 작업을 이끌어 나갔다. 이도재 공은 전라감사와 학부대신 등 지방과 중앙의 관료로서 돌산군, 지도군과 함께 완도군이 설군 되도록 정부와 교섭를 맡았고, 김광선 선생은 현지에서 전주와 광주, 한양을 수차례 왕래하면서 설군 과정에서 도민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실무를 처리했다. 설군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하나는 중앙에서, 하나는 지방에서 신설된 완도군이 발전하는데 감시하고 후원하는 것을 계속해 나갔다.

120년 전 완도의 여러 섬은 육지 군현에 흩어져 예속돼 생계가 어렵고 의지할 힘이 없는 비천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흘러들어 와서 경사진 좁은 땅을 갈고, 해초를 뜯고 고기를 잡아 바다를 무대로 연명하며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았다. 바다에서 생산한 것들을 육지에 이고 지고 가서 팔아 식량을 마련하였는데 육지 사람들이 섬놈이라고 말을 낮추고 무시하고 괄시했다. 더군다나 육지에 있는 이속(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들이 섬에 드나들며 착취하고 핍박하는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다. 바다로 둘러 싸여 노를 젓거나 돛배로 이동하는 더디고 수고로움이 있었고, 변방 오지로 나라의 혜택은 항상 뒷전이었다.

이도재, 김광선 두 설군 주역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도재 공과 김광선 선생, 두 설군 주역의 만남은 필연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광선 선생의 고향은 완도읍 죽청리다. 그런데 어떻게 갑신정변에 연루돼 고금도로 종신유배를 온 이도재 공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일까? 그것은 선생 모친의 맹모삼천지교에 비유되는 열성적인 자식교육열 때문이었다. 선생은 1860년 7월 아버지 김경태 공과 어머니 청주 김씨(정열) 사이에 죽청리에서 아버지 별세 65일 만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아들 손이 귀한 집안이라 출생한지 3달 만에 큰집에서 양자로 데려감에 모친이 아이가 그리워 눈물로 보내다가 데려와 젖을 먹이고 관가에 나아가 생모가 기르라는 판결을 얻어 데려올 정도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선생이 8세 때 모친은 아이가 교양 없는 풍습에 젖을까 두려워 단호히 농사와 길쌈을 버리고 집을 이웃 친척에게 맡기고 이름 있는 선생을 찾아 나섰다. 초반엔 해남과 강진의 이름 있는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 13세에 이르러 문학과 효행이 뛰어나고 후학 3백 여 명을 가르쳤다는 박경진 선생을 찾아 고금도 청룡리 용지동에 이거하고 고금도 박씨 문중의 여인과 결혼하고 고금도로 이사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모친 맹모삼천지교로 고금 용지정사 머물다 유배 온 이도재 공 만나

게다가 당시 고금도는 반(半)한양이라고 불렸다. 고금도는 대표적인 유배지로 조선말 혼란한 정국 속에서 유배 온 정계와 학계의 원로들이 일시적이나마 불우한 생활을 보낸 곳이다. 타 지역과는 다른 완도의 후한 인심과 외롭지 않게 말벗할 유림들이 있고, 비록 섬이었지만 농토가 많아 사대부적 생활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 강진현 고금도로 내려오려는 유배자가 많았다. 선생이 고금도 용지정사에 머물면서 많은 유배객들을 만났고, 또 이들을 통해 서울에서 교류한 지인들도 있었다. 이때 형성된 김광선 선생의 인맥은 뒷날 사회활동의 범위가 중앙정계에까지 미치고, 나중에 완도 설군 과정에 큰 도움이 된다. 선생의 과거시험에 대한 포기 결단도 이도재 공과의 만남의 인연이 됐다. 혼란·혼탁한 조선말당시 과거의 실상이 매우 부패하고 부정해 이름 있는 자손이라도 돈이 없으면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선생의 고향 완도로의 귀환은 완도군의 창설과 향토의 여러 일들이 그의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향하니 27세 늦여름에 참판 이도재 공이 유배돼 선생의 서재요, 거처인 용지정사로 오니 10년간 형제 또는 사제처럼 지내니 훗날 위로 아래로 손을 잡고 완도군 설군에 함께 돛을 올리는 필연적이 만남이 성사된다.

이도재 공 유배 해제로 중앙과 지방역할 나눠 설군 닻 올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청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그해 정월 온건 개화파 이도재 공은 9년의 유배에서 사면돼 동학세력을 위무, 수습하는 임무를 띠고 전라감사에 임용된다. 1896년 봄 이도재 공은 학부대신으로 영전돼 가는 날 급히 선생을 불렀다. 이도재 공은 선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섬에 있던 날 진을 폐하고 군을 설치해 섬에 사는 백성을 편안케 하고 싶다고 맹세한 것을 자네도 또한 알고 있다. 조령이 이미 반포되었으니 신설군의 일은 군수 및 유지들과 잘 조직해 우리의 근본 뜻을 수행시켜 주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선생은 “가르친 데로 힘써 행하겠다”고 대답했다. 양심 있는 정치가 이도재 공과 향토 사랑에 불타고 의협심 강한 청년 김광선 선생의 만남은 완도군이 창설되는 단초가 됐다.

1896년 2월3일 칙령 13호로 완도, 돌산, 지도 3도를 설치하는 안건이 결정돼 조정에서 반포됐다. 해남, 강진, 장흥, 영암에 소속된 각 도서는 완도군에 관할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1896년 4월 초대군수로 이도재 공의 조카 이규승이 부임하고 설군 사업이 시작되는데, 먼저 각 섬에 통문을 내 5월15일 가리포 객사에서 군민대표 회의를 열고 10개 항을 결의했다. 그리고 향도유사(설군 추진위원장)에 선생이 선임되고 관공서와 향교를 지을 목재와 비용을 청구하러 서울 가는 임무도 맡았다.

신설군 행정 기초 마련에 수고로움 마다 하지 않아

단신으로 서울을 몇 차례 오르내리는 등 재정난이 심각한 조정에서 예산을 따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여비도 떨어지고 시일은 지나 그해 말 선생은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종자 한사람을 데리고 다시 걸어서 서울에 올라가니 고금도 유배 인맥 남정철이 그 소임을 맡고 있어 일이 잘 풀려 수선비 2백원과 목재 3백주를 처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설군 사업의 끝이 아니었다. 섬을 모아 독립한 신설군의 일은 태산과도 같았다. 섬으로 흩어진 방대한 지역과 민생과 민원은 속출하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아 행정은 미치지 못하고, 제도와 기구는 정비되지 못한 채 혼란 상태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2년 동안의 군정의 난맥을 바로잡고 활력을 찾는 돌파구가 있어야 했다.

1898년 현지 사정을 잘 몰랐던 군수는 선생에게 향장을 맡을 것을 권고했다. 향장은 군수 밑에서 행정을 총괄하는 직으로 실제로 군수는 선생에게 군정의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선생은 향장으로서 신설군의 행정에 직접 뛰어 들어 혁신하고 정비했다. 실제로 실권을 갖고 군 행정을 소신대로 39세의 젊음으로 처결하고 완도군을 반석 위에 올리려 불철주야 노력했다. 방대한 지역의 치안은 방치 상태여서 섬을 중심으로 자위 체제를 갖추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정기 범선의 운항과 신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세원을 확보하고, 민원의 신속한 처리, 풍속의 개량 등 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바쁘고 보람찬 생활이었다. 군정이 자리가 잡혀가자 1년 만에 향장 직을 사임했다.

그 뒤로도 선생은 항상 지역발전과 군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2대 군수 탐관오리 신관희가 부임해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불법 세금을 징수하고 무리하게 재물을 뺏으니 군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선생이 불의에 맞서 싸워 군수는 파직시켰다. 또 완도가 풍재로 흉년이 들자 강경으로부터 벼 2백석을 매입해 완도로 보내 본가로 방매하였으며, 1902년 군수 이정상이 부임했는데 성격이 포악하고 그를 따라온 서울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가득 차서 관부도 괴롭고 백성들도 걱정스러워하자 홀로 서울 내부로 찾아가 고변해서 이들을 추방했다. 또 신설군의 재정이 어렵다보니 추자도의 전년도 미납세금을 고등어로 받아 판매한 후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진회의 발호로 군수조차 목포로 피하고, 군민들이 협박당하자 선생이 나서 그 무리를 달래고 경비를 주어 일시에 해산시켰다. 1907년 완도 국채보상운동 대표로 선임돼 7백 원을 모금해 보냈으며, 1909년 신식 육영학교의 교감을 맡기도 했으나,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방이 되자 교감 직을 사임하고, 향교 일을 제외한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했다.

향교 설립해 지역교육 씨앗 뿌리고, 신식교육 육영학교 교감 소임 맡아 선생의 또 다른 업적은 척박한 완도 땅, 청해 바다에 도덕의 바람과 교육의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섬은 낙도 오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해 글을 몰랐다. 이로 인하여 천민 취급을 받고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괄시를 당했다. 배움에 대한 향수는 간절했고 절대적 가치였다. 신설 군으로 독립한 완도 사람들은 육지와 같은 위상을 갖고자 했다. 여기에 선생은 도덕과 인륜의 바람을 일으켜 섬사람의 오명을 씻고자 했다. 신설된 군이 군청 관사보다 향교를 먼저 설립한 것을 보면 그 간절함이 어느 정도였던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할 것이다.

향교 설립은 죽청리에 터를 잡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죽청리에 장차 군청도 옮길 예정으로 관민이 협의하여 1897년 3월 착공을 시작해 8월 낙성식을 가졌다. 폐진 건물들의 목재를 운반하고, 벌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성전만 새로 벌목한 목재를 사용해 지었다. 동재는 고금진 동헌, 서재는 신지 동헌, 그리고 명륜당은 노화 동헌의 목재를 사용했다. 선생은 향교가 설립되자 직접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고, 운영 기반을 마련하는 등 일생동안 모친으로부터 배운 교육에 대한 열정이 이어져 향교로 대변되는 완도 교육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1903년 선생은 향교 내에 우수 인재를 교육하기 위해 양사제를 설립하고 개량된 우수서당으로 청년들에게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열악한 낙도에 청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훌륭한 인재로 육성되길 바란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되자 향교 외 사회활동 내려놔 지역발전과 교육에 대한 선생의 열정과 집념은 세상이 많이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단연코 빛났다. 서울에도 한 두 곳 있었던 신식 교육기관이 완도에 육영학교로 설립되자 당연직 교장 군수에 이어 교감으로 나섰다. 신식학교도 재정확보나 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많았다. 군청과 민간이 협의하여 각 섬의 가사리와 감태 세액으로 재정을 도와주니 차례로 질서가 잡혀갔다. 학생을 모집하는데 학부형들이 보내지 않아 장정을 보내 붙잡아 오는 지경이었다. 다행히 나이를 연장해 모집한 학생이 2백 명이 됐다.

선생은 향교와 양사재를 설립하고 육영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을 통해 섬사람의 습속을 개선하려 했다. 도덕의 바람과 학문의 물결이 청해 바다에 세차게 불어 오욕의 습속을 날려 보내고 바르고 지혜로운 사람이 사는 새 세상이 신설된 완도에 오기를 염원했다. 선생이 뿌린 완도교육의 씨앗은 점차 발아돼 신교육으로 이어지면서 장차 일제 강점기 활발히 일어난 완도의 민족계몽운동으로 이어져 갔다.

2016년은 완도 설군 120주년. 김광선 선생 서거 80주년, 기념비 하나 없어 1896년 완도 설군은 유배 온 심재 이도재 공과 침천 김광선 선생의 만남에서 시작됐고, 두 사람이 주역으로 내외, 안팎으로 활약해 짧은 기간 군정의 기초가 닦아질 수 있었다. 2016년은 완도 설군 120주년이자, 김광선 선생의 서거 80주년이기도 했다. 설군의 혁혁한 공도 공이거니와, 선생은 지역발전과 교육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그 먼 서울 땅을 맨발로 오고 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기념비 하나 완도군에 없는 것이 슬프고, 후예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 해질녘 완도

편집 : 안지애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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