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에 시들지 않은 시선은 엉뚱하여 신선하다. 특히 아이의 그것은 무지함에 걸맞은 악마성을 드러내도 날 것이어서 봐주고 싶다. 영화 ‘개훔방’은 아버지가 사라지고 집이 없어진 멘붕의 문제적 현실을 세 악동의 말간 눈동자를 빌려 휴먼코미디라며 풀어냈다. 개연성 있는 반전이 악동들의 언행에 실려 폭소와 눈물을 자아냈지만, 큰 틀의 감동은 없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 시선으로 당대의 사회문제(과부의 재혼)를 경쾌하되 제대로 다룬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주요섭, 1948)의 코미디성이 아쉬웠다.

'평당 500만 원'짜리 전세를 얻기 위해 개를 훔치겠다는 10살짜리 지소(이레)의 당돌함은 버젓한 생일파티를 열겠다는 욕망으로 지탱된다. 생일파티는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아닌 치장이며 가식이다. 세태를 반영하는 그 주연급 욕망이 악화(惡化)를 구축하는 조연급 어른들의 욕망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통념을 언어유희로 비틀어 필름을 돌게 한다. 그러나 세 악동의 순도를 밝히는 개그성 대사가 세태의 그늘을 일별(一瞥)할 뿐, 그 이상은 없다. 게다가 지소의 독백을 담은 몇 환상 삽입은 형이상의 휴먼이어서 참 난데없다.

인간은 삶의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국부적인 시공간에 몸을 부리어 살기 때문이다. 인식 활동이 비가시적 시공에 대해 곧잘 불가해를 선언하는 연유이다. 그래서 유한성의 삶이나마 제대로 이해하려면 국부적 앎일 인식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휴먼코미디 ‘개훔방’의 미덕은 그 내려놓음의 경계를 맛보게 한 데 있다. 인식의 틀이 깨지는 유쾌한 파열음일 폭소가 터지는 순간, 관객은 저도 모르게 그 경계로 들어섰다.

내게 ‘개훔방’의 감동은 배역에서 왔다. 자활 노숙자로 화한 최민수다. 최민수 하면 떠오르던 후까시의 카리스마는 없었다. 대신, 캐릭터의 복잡다단한 다성적 내면세계를 마티에르 질감으로 길어 올린 내공(內功)과 마주했다. 시선이 불분명한 흐물거리는 표정에 불가피한 처지의 어눌함을 얹어 딸이 그리운 부성의 물컹함을 쓸쓸하게 담아냈다. 움켜잡기 쉽지 않았을 그 존재감을 완벽하게 훔친 그는 ‘개념 배우’다.

 

김유경 주주통신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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