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탐제(探財) 호색(好色) 이상돈(李相墩)

첨사 이상돈(李相惇)의 횡포(橫暴)

▲ 출처 : 한겨레, 완도 농민항쟁의 거점 소안도

이상돈(李相墩)은 1880년(고종17년)에 좌초 초관으로 1881년에는 오위장을 거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882년 3월 16일자로 경상중군에 재직하다 1882년 10월7일 가리포 첨사로 부임한다.

소남 김영현 선생의 “청해비사”에서는 이상돈(李相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종 19년 12월 완도에 임명(任命)받아 고종20년 11월에 퇴출(退出)되었다.(승정원일기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남) 경상도(慶尙道)사람으로 대구부(大邱附) 중군(中軍)에 있다가 가리포(加里浦) 첨사(僉使)가 되었다.

전 첨사(僉使) 김태희(金太熙)는 국민(國民)을 사랑하여 선정(善政)하면서도 부자(富者)가 되었다가 영세불망(永世不忘)의 비석(石碑)을 세웠는데, 이상돈(李相墩)은 취임(就任)한지 불과 1년에 월경(越境)하여 쫓겨 갔다,

김태희(金太熙)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하여 담소(談笑)의 간(間)에 국민(國民)의 등을 살살 글그면서 국민(國民)의 금전(金錢)을 취(取) 함으로 국민은 고통(苦痛)을 불감(不感)하고 도리어 선정(善政)이라 하여 비석(石碑)을 세웠다.

이상돈(李相墩)은 무모(無謀)하게도 백정(白丁)이 소를 잡는 것 같이 국민을 우마(牛馬)같이 학대하며 또 재산(財産)을 강제(强制)로 착취(搾取) 함으로 국민은 경겁(驚怯,놀라서 겁을 냄.)하여 민요(民撓)가 일어났다.

취임즉시 전선(就任卽時 戰船)을 짖는다 하고 매일 부락인부(每日部落人夫)를 몰아내어 수천 년 장양(數千年長養)하여 놓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을 일방(一方)으로 베어 일방(一方)으로 인거(引鉅)하며, 일방(一方)으로 “나무구세” 하여 해안(海岸)에 끌어다가 배를 지었는데, 전선(戰船)을 짓지 아니하고 상고선(商船)을 지어 경상도방면(慶尙道方面)에 가서 팔아오며 면화(棉花)와 포목(布木)은 가격의 삼분지일(價格三分之一)도 주지 아니하고 빼앗아 가며 양봉한통(養蜂一桶)에 생청이합(生淸 二合)이요, 농우일필(農牛一匹)에 쟁기성에 대금이 이냥(代金二兩)이요, 또 황칠(黃漆), 후가시, 동백, 비자(榧子), 오시목(먹감나무), 태설등(態舌等)을 거두어들이고 록(鹿)산양, 도야지, 산양, 국민은 몰이하기에 여가(餘暇)가 없으며 또 선정비(善政碑)을 세운다고 참 쇠숟가락을 걷으며 또 초요전(稍요錢)이라 하여 조곰요足(조금 여유가 있는 집에는?) 한집에는 초요전(稍요錢)을 받는데 곤장답장(棍杖答杖)을 가지고 다니면서 조금만 더디면 물고(物故)을 내나니 국민(國民)은 구(佉)하여 농우(農牛)를 팔고 밭도 팔았다.

아! 창천(蒼天)이여 국민(國民)은 기한(飢寒) 도로(道路)에 유리(遊離) 하건마는 첨사(僉使)의 동헌(東軒)과 이방호방금송(吏房戶房禁松)의 마루에는 술과 고기가 가득하여 있었다. 이상돈은 첨사로 부임하여 백성을 편하게 다스려야 함에도 그렇지를 않고, 또 가리포의 산들이 국원으로 지정되어 임금의 허가 없이는 베어서 쓸 수가 없었음에도 마음대로 베어서 사욕을 취하는 등 해서는 안 될 일만을 골라서 하는 첨사였다. 내용을 보면 첨사 이상돈(李相墩)이 얼마나 횡포를 하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취임한지 1년도 못되어 전선을 짓는다고 나무를 베어서 상선을 만들어 팔아서 사취를 했고, 그 짧은 동안 뭘 얼마나 했다고 선정비를 세운다고 숟가락까지 거두어가는 파렴치한 짓을 일삼고 본인은 매일 고기에 술을 먹으면서 수탈을 일삼았다.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인 중국 하나라 마지막 군주 걸 왕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위의 기록은 당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문맥이 현재와 많이 다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당인리(唐仁里)도 첨사(僉使)의 명령(命令)에 의하여 황장목(黃腸木)을 베어 “나무구세” 하여 하포(下浦)한 것이다. 봄부터 점심을 싸서 지게에 달고 당인리 후산(唐仁里 後山) 험악(險惡)한 골짜기에서 거대(巨大)한 황장목(黃腸木)을 베어 나무머리에 줄을 메어 수 십 인(數十人)이 개미떼 같이 엉키어 “에해 나무구세야” 하고 소리를 주어 엎어지고 잡아지고 가시덤불 사이를 끼어 논둑 밭둑을 넘어 몇 날 만에 하나를 끌어 해안(海岸)에 내리고 또 몇 날 만에 하나를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이 끌려나온 황장목(黃腸木)은 자기 배가 와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동리(洞里)사람들이 배에 실어다가 가리포(加里浦)에 바치는 것이다. 당인마을은 산세도 험하지만 해안이 가파르기 때문에 나무를 해안까지 끌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에서도 할당받은 량과 그 기일을 엄수하라는 첨사의 명령에 봄부터 가을까지 가사를 전폐하고 일을 하였다. 그렇다고 관에서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주민들이 직접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겸(士謙)은 동리(洞里)사람들과 더불어 나무를 배에 싣고, 혹은 끌고 구두곶(狗頭串, 개머리)을 넘어가려는 순간, 그렇게 잔잔하던 바다가 불의(不意)에 가을 광풍(狂風)이 불어 천지(天地)가 암흑(暗黑)한데 파랑(波浪)은 태산(泰山)이었다, 배는 엎어지고 나무는 둥둥 떠서 청산(靑山)밖으로 떠나갔다, 사람들이 물에 떨어졌으나 헤엄하여 생명은 살았다. 개머리 끝은 외해와 내해의 물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날씨가 좋은 날도 물결이 일어나는 곳으로 항해할 때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곳을 지날 때는 항상 밥이나 쌀을 바다에 던지면서 용왕에게 무사항해를 빌던 곳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하게도 인명피해가 없는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겸(士謙)은 즉시 사실(事實)을 관(官)에 보고(報告)하니 관(官)은 너희들이 담당(擔當)한 나무이니 너희들이 찾아 들이든지 그러지 아니하면 또 나무구세를 하든지 하여 기일내(期日內)로 들이게 하여라,

만일 기일내(萬一期日內)로 드리지 아니하면 너희 동리(洞里) 놈들은 뼈가 부러질 것이다. 사겸(士謙)은 본리(本里)에 돌아와 여러 사람들과 의론(議論)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말하되 우리가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구세를 하였는데 이 나무를 잃었으니 이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다시 나무구세를 할 수도 없으며 또 우리가 소도팔고 밭도 팔아서 초요전(稍요錢)을 물어주었으니 무슨 돈이 또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다 죽든지 그러지 아니하면 타지방(他地方)으로 도망(逃亡)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때 도군노사령(都軍奴使令)은 벙거지에 날 샌 용자(勇字)을 붙이고 뒤꽁무니에 방울을 달아 얼넝덜넝 하면서 사겸(士謙)을 잡아갔다.

사겸(士謙)은 끌려서 탱주재를 넘어 독다리(돌다리) 주막(酒幕)에 왔다,

사겸(士謙)은 술과 안주로 사령(使令)에게 권(勸)하여 취(醉)하게 먹인 후 사겸(士謙)은 슬금슬금 빠져나와 원동(院洞)나루를 건너 대흥사(大興寺)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그런데 나는 숨어 있으면서 동리(洞里)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생각하니 숨어 있을 수도 없었다. 허사겸은 도망을 하여 자신의 몸은 순간 편하지만 남아있을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였다. 이리저리 방황(彷徨)한 중(中)에 우연(偶然)히 장좌리(長佐里) 사는 문사순(文士順)을 만났다.

서로 인사(人事)한 후 사겸(士謙)이 물어본다,

문형(文兄)은 어찌하여 여기에 와 계시오?

우리형님이 집강(執綱)을 하다가 포음(逋音)이 져서 우리 문씨 문중(文氏門中)에 일족(一族)을 놓았는데 이 돈을 내라고 관(官)에서 나를 잡으러 다니므로 부득이(不得己) 피(避)하여 여기와 있는 것이요 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첨사(僉使) 이놈을 그대로 두어서는 국민(國民)이 살 수가 없으니 우리가 다시 드러가서 첨사(僉使) 이놈을 월경(越境) 하여야 하겠소. 하고 양인(兩人)이 약속(約束)한 후 다시 완도(莞島)에 도라왔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굶주리고 힘들어도 첨사의 명을 거스르면 당할 일을 잘 알기 때문에 기일을 엄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도 허사겸(許士謙)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일들이 순간에 허사가 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로는커녕 더 가혹한 말로 국민들을 분하게 만들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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