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배동록 선생, 부모님의 징용과 분단의 가족사,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 6월 16일 생명, 탈핵 실크로도 출발에 앞서서 후쿠오카의 모구리에 역 앞에서 생명, 탈핵 실크로도 출발에 나서려고 하는 순례단

2017년 5월 3일 수원대 이원영 교수는 서울 광화문에서 바티칸까지 2년 동안 26개국 11,000km를 걸어서 로마까지 가고있다. 그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로마에 가서는 교황을 만나서 핵발전소 없는 세상을 위하여 '세계생명헌장'을 채택하여 노력해 달라는 주문을 하기 위한 '생명 탈핵 실크로드' 길에 나서고 있었다.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핵발전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지구를 만들자는 운동이다.

그 길에서 광화문을 출발하여 부산항에서 배를 이용하여 히로시마로 이동한 이원영 교수는 나가사키까지 일본 구간을 걷는다. 그 구간 중 나는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후쿠오카 구간에서 3박 4일을 함께 하였다. 그 구간에서 재일동포 배동록 선생을 만나 함께 걸었다. 그 순례길에서 그분의 가족사와 현재 일본에서 본인이 하고 있는 일 등을 들을 수 있었다.

▲ 일본학생들과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단 지나가던 일본 학생들이 순례단에 관심을 보이며 '걸어서 2년 동안 로마간다'고 하였더니 놀라서 함께 사진을 찍는다.

당시 남한에서는 탈원전을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고리 1호기 폐쇄를 앞두고 있었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인한 동북아시아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 2기의 핵발전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단되어 있었지만 아베 정권은 서서히 중단된 핵발전소들을 재가동할 준비와 여론 작업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시기에 일본 '생명 탈핵 실크로드' 길에서 재일 동포인 배동록 선생을 만나서 그의 부모님이 일본으로 끌려와 야하타 제철소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린 이야기며, 일본이 패망한 이후, 그의 가족들이 겪었던 남북 분단의 현실, 현재 그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 한반도 깃발을 들고 있는 배동록 선생 평생을 평화와 통일 운동에 나서고 있는 재일표로 2세 배동록 선생이 현수막을 들고 나섰다.

6월 16일 일본 후쿠오카의 고모리에 역에는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에 합류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여남은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날은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가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고모리에 역으로 나갔더니 의외로 연한 분홍색 바지, 저고리를 입고 커다란 한반도기를 든 한 노인네가 계신 것이 아닌가?

그 분은 나와 이원영 교수, 하라 쓰네노리 씨를 만났더니 반가워서,

"한국에서 왔어요?"

"예, 그렇습니다."

"누가 이원영 교수여?"

"접니다"

이렇게 인사가 이루어지고, 나더러도

"한국에서 왔어요?"

"예."

"나는 배동록이라고 하는데, 이름이 뭐예요?"

가지고 있는 명함을 드리면서 내 소개를 간략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키가 160cm도 안 될 정도로 작았다. 몸도 많이 야위고, 주름살도 많아서 많이 늙어 보였다. 그러면서 당신 소개를 하신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아버지는 경남 합천이 고향이에요."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1940년 이곳으로 징용되어 야하타 제철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어요."

"내 어머니는 고향에서 자식들 셋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2년 정도 살다가 남편을 찾아 이곳 일본으로 건너와서 그때부터 제절 공장 기숙사에 살면서 일본 생활이 시작이 되었어요. 나는 1944년에 이곳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여. 우리 어머니가 42년에 건너와서 나를 낳은 거지. 나를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우리 어머니도 강제로 제철소로 끌려나와 하루 10~12시간씩 철광석을 나르는 중노동을 시켰어."

이날의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길(서울에서 걸어서 2년 동안 로마까지 11,000km를 생명과 탈핵을 외치면서 순례함)에는 추진단장인 이원영 교수(수원대에서 학내 비리 고발 등의 싸움을 하다 해직이 되어 현재 소송 중임)와 필자 외에도 키타큐슈 지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인 이토오 간지, 니시모토 에데노리 씨 등 7~8인이 함께 걸었다. 한참 걷다가 다시 세분이 합류를 하기도 하고 한두 분이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그분들은 대부분 배동록 선생과 다들 서로 농담도 주고 받을 정도로 배동록 선생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이분들 중에는 이또오 간지(78세)라는 분은 배동록 선생과 농담 주고 받으면서 함께 걷는데, 같이 활동하면서 알고 지낸 지가 40년이 넘는다고 한다. 배 선생도 그렇지만 이토오 간지 씨는 2007년 스톤워크 행사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한국을 다녀왔다고 한다. 부산, 합천, 광주, 서울, 한라산, 지리산, 금강산도 다녀갔다고 한다. 이토오 간지 씨는 순례를 하면서 내가 특별히 한국에서 온 줄 아니까 들으라는 듯이 배 선생에게 농담을 건넨다.

▲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순례길의 배동록 선생

"배상은 성격이 급하여 남들과 싸우는 일도 많아요."

그러자 배 선생이 그 말을 받는다.

"야, 자넨 어쩐데?"

"허 허, 나야 점잖고, 남들과도 잘 지내지."

"이 친구 말이 맞아요. 나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 잘못된 일들을 보면 좀 참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 친구는 차분하고 원만한 성격이오."

이날 순례길에는 조카가 차를 몰면서 외삼촌과 동행하고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진 못했는데, 40세 전후로 보였다. 배 선생은 겉으로 보아도 몸이 워낙 약해 보였다. 날씨는 더운데, 한동안 감기까지 앓아서 몸이 더 안 좋다고 한다. 그래서 좀 걷다가 조카 차를 타고 좀 앞에 가서 기다리다가 내려 같이 걷곤 하였다.

두 번째 방문을 하는 친환경 도시 키타큐슈가 무색하게 하는 핵발전 문제

한참을 걷다가 보니 익숙한 곳이 나타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보았더니 내가 7년 전에 이곳 일본의 키타큐슈를 중심으로 일본의 환경교육현장 탐방 여행을 왔던 곳인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 키타큐슈는 세계적인 친환경 도시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견학을 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무라사키 강 위로는 50여 마리의 솔개 떼들이 유유히 하늘을 돌고 있는 광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우리 일행은 키타큐슈 시청을 방문하여 담당자로부터 키타큐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친환경적인 도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준 것을 들었던 기억들이 새롭게 오버랩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생명, 탈핵'을 주제로 하여 이곳 친환경 도시인 키타큐슈를 순례하고 있다니 '친환경 도시'라는 말이 무색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4기나 되는 핵발전소를 가동하면서 경제를 일으켰던 일본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에는 1기만 남기고 다 닫았다가 요즘 재가동의 목소리가 아베 정권이 앞장서고, 여기저기 지자체에서 재가동을 하려고 하여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바로 이번 순례길에 나선 사람들도 '가미노 원발 반대', '현해탄 원발 재가동 반대' 등 핵발전소와 관련하여 수십 년 간 아니면 후쿠시마 이후 6년여 동안 줄기차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아하타 제철소의 모습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된 일제 징용의 상징적인 시설이지만 이런 문화적 기록은 없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배선생은 노력하고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난 다음 배선생 부모님이 강제 징용이 되어 고생했던 야하타 제철소가 일제 패망 이후에는 신일본제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계속하여 철강 산업을 이끌어갔다. 60년 초만 해도 그 공장 폐수와 분진들이 키타큐슈 하늘과 강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때 이곳 키타큐슈의 몇몇 여성들이 나서서 그 오염 실태들을 발로 뛰면서 생생하게 채록을 하여 그 자료를 갖고 시청과 제철소는 물론 언론 등 발로 뛰면서 바꿔내려는 노력 끝에 많은 시민들이 호응을 얻었다. 지자체는 물론이고 신일본 제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책을 마련하고 개선하기 위한 많은 노력 끝에 강에서 사라졌던 물고기들이 돌아오고, 하늘은 맑아지고, 지금은 지역의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친환경적 경영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자원 재활용 산업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현장을 실제로 방문하여 견학도 하기도 하고 키타큐슈 지역의 교사들을 만나서 환경교육 사례를 들었던 일들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고쿠라성이라든가 시청 방문은 없었지만 환경교육 탐방단이 찾아갔던 무라사키 강의 생태 수족관이 있던 곳, 그때 생태수족관 견학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갔던 식당 앞길을 지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순례길이 이렇게 코스가 잡혀있다니? 참 이렇게도 인연이 다시 연결이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걷는데, 일행중 일본 분이 고쿠라 성을 가보았느냐고 해서

"전에 일본으로 환경교육 탐방을 왔을 때 가보았어요. 참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옆에 배 선생이 계시니 통역이 되어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배선생은 길을 가다가 나한테 제안해 온다.

"여기에서 얼마 안 가면 우리 부모님이 끌려와서 고생했던 야하타 제철소가 있다. 조그만 돌아가면 그곳에 가 볼 수 있으니 꼭 한 번 보고 갔으면 좋겠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된 곳이고 하니 가 봅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거들었다.

"이 단장님, 기왕에 온 거 배 선생님이 가보자는 야하타 제철을 들러서 가지요."

그랬더니 이교수도 흔쾌히 동의를 하였다.

 

▲ 제철소에서 부모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 설명 배동록 선생 부모님이 이 제철소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분단의 아픔은 이곳 일본에서 가족들끼리도 계속되고 있다니

가면서 어떤 곳을 지날 때는 배 선생이 이야기를 이었다.

"저기가 내가 다녔던 민족학교가 있었던 곳이에요. 지금은 재정난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한 때는 일본 전체에 150개 정도가 있었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초중학교 과정도 민족학교를 다니셨나요?"

"아니요. 초중학교는 일본인들이 다니는 동네 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 과정만 민족학교를 다녔어요."

"그 학교는 북한에서 돈을 대어서 총련에서 운영했던 학교가 아닌가요?"

이런 정도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내가 학창 시절에도 들었고, 교직에 있을 때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이다.

"그럼, 선생님은 조총련 소속이세요?"

"전에는 그랬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었어요."

"왜 바꾸셨나요?'

"내가 한국을 방문하려고 했더니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 있으면 갈 수가 없다고 하여 할 수 없이 한국으로 바꾸었지요. 그래서 그 후에는 한국에도 몇 차례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갈수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형제분들은 남북한 중 어디에 속해 있느냐고 하였더니 아직도 형님 등 두 형제는 조선 국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형제들은 한국을 오갈 수 없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도 한국에 한 번 갈 수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계속 국적을 바꾸라고 한다고 하였다.

분단은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형제들 사이에서도 분단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참 씁쓸했다. 일제 패망 이후 북한에서는 이렇게 일본에 민족학교를 세우고 재일교포들에게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을 해 왔으나 남한에서는 이런 노력을 별로 한 것이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민족학교들이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남아있는 곳이 배 선생 말에 의하면 60개 정도 남아 있다고 하니 그 실상이 짐작이 갔다. 배 선생은 말한다. 교포들 중 일부는 2세, 3세, 4세가 태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귀화를 해 버리기도 했지만 3세, 4세가 되어도 꿋꿋하게 한국 또는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교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가족사를 증언하는 배동록 선생

▲ 아하타제철소에서의 외삼촌과 조카 누님의 아들이라는 정수현(오른쪽)씨와 함께 제철소에서 부모님이 받았던 고통을 자료들을 모아놓은 앨범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단은 야하타 제철소가 있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선생은 조카더러 앨범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앨범에는 배 선생 어머니가 야하타 제철소에서 일했다는 증명서와 가족 사진 등 신분증이 확대 복사된 것 외에 야하타 제철소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장면 등 많은 관련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배 선생은 이번 순례단 중에서도 자신이 이야기를 제일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나와 하라 쓰네노리 씨를 데리고 용광로가 있었던 곳으로 데리고 가서 당시 작업 모습을 보여주는 마네킹 앞에서 잠시 머물며 설명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용광로에서 녹은 쇳물을 떠서 옮기는 일을 하는데 어찌나 더운지 더위와 싸우기 위하여 소금을 많이 먹었다고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철광석을 옮기는 중노동을 힘들게 하면서 그날그날 살다가 해방이 되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돈이 없어서 이곳에 그냥 눌러앉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배 선생은 말을 이었다.

"야하타 제철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는 과정에서 이곳에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서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내용을 설명서에 한 줄이라도 넣어 달라고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함께 싸웠지만 끝내 무산되었다."

고 하면서 해방 이후의 일본도 진정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사과가 없다는 것이 대하여 분노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을 이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리고 다시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하려고 했던 곳이 바로 이곳 야하타 제철소가 있는 후쿠오카 지역이었는데, 밤에 워낙 구름이 많이 끼어 정확하게 이곳을 확인하질 못하여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그럴 정도로 이곳 제철소는 당시 2차 대전 쓰이는 무기 등을 만들기 위하여 지어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제철소였는데,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이런 제철소가 이 인근에 5개가 있었어요."

용광로 등이 있던 2층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쉬고 있는 순례길에 나선 일본인 등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야하다 제철소에는 6천 명 정도가 끌려와 일을 했는데, 이곳 제철소 말고 근처에 있는 탄광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해요."

그러면서 배 선생이 가지고 온 많은 자료들 중에는 일제 때, 15살 소년이 징용으로 끌려와서 배를 곯고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 하루 쉬려고 하다마 일본인 감독한데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는 내용을 담은 '신세타령'과 '어머니 보고 싶어'라는 노랫말을 일본어와 한글로 된 것을 보여 주었다. 읽어보니 당시 상황아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함께 걷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런 자기 선조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배 선생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다. 2차 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냉철하게 반성하고 사과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남북한 일본 모두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은 미군기지의 확장 반대라든가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의 반대, 일본의 평화 헌법 개정 반대 등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이곳 재일 한국인들의 입장에 서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국적을 넘어 끈끈한 동지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원영 교수의 '생명, 탈핵 실크로도' 순례도 자연스럽게 동의가 되어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분들은 후쿠시마 이후 정지된 핵발전소의 재가동 반대와 신규 핵발전소 건설 반대 등 탈핵 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일본 시민들인 것이다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고 남북한, 일본 모두가 평화의 길로 나서야

▲ '금요 행동'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배선생 고쿠라역 앞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금요행동 집회가 생명, 탈핵 실크로드 순례단과 결합하였는데, 거기 참석한 배 선생

배동록 선생과는 17일에도 함께 순례길에 나섰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질문을 하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어제 보았더니 한반도 깃발과 무궁화 그림, '조일우호'라고 쓰인 피켓 등도 보이던데, 그것들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십니까?"

"내가 이곳 일본에 살면서 우리 어머니와 함께 많은 학교들을 찾아다니면서 일제의 만행에 대하여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과거 조선을 침략하여 수탈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괴롭힌 점에 대하여 반성해야 하며, 이제는 일본과 남북한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전쟁터로 끌려간다. 그러면 좋겠느냐? 그러니 전쟁을 막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복주머니를 보여준다.

"이거 한국에 갔을 때 많이 사 왔다. 이곳저곳 학교들을 찾아 교육을 하고 나서 교사들이나 학생들에게 선물을 한다. 그러면 이곳 일본 학생들이 무척 좋아한다. 그 선물용인데, 이걸 마련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

▲ 배동록 선생의 가족들 어머니와 네 명의 형제들이 어릴 때 찍은 사진

"그런 교육을 얼마 정도나 하셨나요?"

"따져보았더니 작년 2월에 1,000회가 되었더라고. 우리 어머니는 지난 2004년에 돌아가셨지만 딸과 조카 등과 함께 이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우와,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학교 교장선생님 등 일본인들이 그런 교육을 한다면 부를까요?"

"그러지 않아요. 이곳 일본에 있는 교장선생님들 중에는 일교조를 했던 분들도 있고, 양심적인 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위하여 학생들 교육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불러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입소문도 많이 나 있구요. 이 인근 학교들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토쿄 근처에 있는 학교들까지도 간 적이 있어요. 많은 지역 학교들을 찾아갔어요."

1000회를 넘겼다는 것은 1986년부터 강연을 시작했으니 1년에 50회 정도 되고, 거의 1주일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런 강연으로 생계유지가 되는지 궁금하여 살짝 물어보았다.

"그럼, 이렇게 많이 찾아 다니려면 교통비도 교통비지만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강사비는 많이 받으세요? 그걸로 생활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한 번 강연을 가려면 사전에 가서 담당 교사와 교육 내용들에 대하여 상의를 해야 해요. 그런 다음 결정이 되면 강연을 하게 되는데, 두 번을 가야 해서 강사비라고 받아봐야 왕복 교통비와 강연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들을 쓰고 나면 남는 것들이 없어요."

"그럼 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챙기시나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식당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다보니 힘들다고 요즘은 둘째 아들이랑 나가서 살고 있어요. 그 아들이 하는 식당이 잘 되어 그 아들이 도와주어서 생활해요."

배 선생은 큰 형님네는 아직도 조선 국적이라면서 형제들이나 조카들 중에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하였다. 조카 중에 한 명은 민족학교 미술교사라고 하면서 한국 정부가 이곳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들을 위하여 교육이라든가 왕래의 문제, 국적 문제 등을 이제 국력에 맞게 많이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일본 국민의 80% 정도는 무관심 주의인데 그들도 한 번 외침을 받거나 식민지를 당해 보아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배 선생은 일본 학교들만 찾아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울산 등지의 '우리겨레하나되기' 등의 단체나 울산민주노총, 전교조 등 일제 때 한국인들이 강제 징용을 당해서 고통 받았던 현장들을 찾는 탐방이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이곳 야하타 제철소는 물론이고 일제 때 15만 명이 끌려와서 강제 노역을 했다는 치쿠오 탄광 등, 그럴 때 이 사람들을 안내하기도 하고, 울산 등지에서 강연 부탁을 받고 찾기도 한다고 하였다.

▲ 한국 요리의 애식당 배선생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키타규슈에 있는 한국 음식 식당

17일 아침에는 차를 세워놓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배 선생한테 전화를 드렸더니 아들네 식당 앞에 세우라고 하여 가 보았더니 3층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애식당'이라는 간판의 이름을 달고, 주로 한국요리를 하는 식당이었다. 나중에 배 선생한테 들었는데, 대출을 좀 많이 받았지만 다행스럽게 식당이 잘 운영이 되어 둘째 아들네는 먹고살만하다고 하였다.

17일에는 이번 순례길에 각종 자료들을 싣고 다니는 차량을 배 선생 아들이 운영한다는 식당에 세워놓고 역으로 나갔다. 전날 고쿠라 역 앞에서 매주 진행하고 있다는 '금요행동' 집회에 참가했던 분들이 나와 있었다. 그 분들하고 걸으면서 이러저러한 얘기도 나누면서 걸었는데, 이날은 배 선생이 조카도 걷도록 하여 함께 걸었다. 배 선생은 이날따라 더운 날씨임에도 굳이 저고리 위에 마고자를 더 끼어 입고 나오셨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도 그 자존심 하나는 버릴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리고 기력이 많이 쇠해서 지금까지와 같은 왕성한 활동을 하기에는 한계가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함께 걸었다.

배선생은 아침 시작 때 조금 걷다가 차를 빌려 타고 점심때 우동집으로 나타나셨다. 한국의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는 일본인 여자분을 데리고 나타나셨다. 그러고는 점심 식사가 끝나서 이날 일정을 마무리 하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차로 출발하였다. 오전을 함께 걸었던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절반은 빠져 나가서 나와 이 교수 등 네 명만 걸었다. 삼일째 함께 걷고 있는 이토오 간지 씨도 이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말했다. 8월 5,6일 한국의 경남 합천의 평화의집 분들과 함께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 구제를 위한 한국에서의 활동이 있는데, 그 행사에 참가할 것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배 선생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분들을 만났으니 한국에서도 만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 기간에는 다시 외국으로 나갈 일이 있어서 이분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17일 일정이 끝나는 역까지는 순례참가자들이 적기도 하고 잘 걷는 분들이 많아 예정보다 좀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기념 사진을 몇 컷 찍고 나는 오늘로서 일본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더니 갑자기 나를 좀 기다리라고 하면서 오늘 오후에 차를 몰고 있는 일본인 차로 가서 뭘 가지고 오시는 것이다.

차에서 나오셔서 나더러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간식이라도 사 먹으라며 막무가내로 돈을 내미신다. 나는 안 받겠다고 사양에 사양을 하다가 성의를 생각해서 그 중에 1천 엔만 받고 나머지 1천 엔은 이원영 교수한테 건넸다. 정 많은 한국인의 모습은 이곳 일본이라고 다르질 않았다.

▲ 17일 순례길을 마치면서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순례를 마치고 함께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배동록 선생의 이야기는 한국인 작가가 동화로 써서 '엄마 이야기'라는 책으로 그해 8월에 출판이 되는데, 그 출판 기념회 때 배 선생이 한국으로 초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합천 행사를 거쳐 출판기념회도 서울로 이동하여 이루어진다는데,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시간이 안 되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재일교포 2세 배동록 선생, 아니 할아버지를 일본 땅에 두고 떠나는 내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옆에 계시다면 소소한 도움이라도 되어 드리면 참 좋을텐데 하는 마음을 안고 다음날 있을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김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후쿠오카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틀 동안 배동록 선생이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를 쓴다는 내가 그 짠한 감상을 시 한 편으로 적어보았다.

 

분단의 아픔/김광철

 

일본 땅 한 동네에 살면서

형과 동생이 국적이 다르단다

형은 조선이요

동생은 한국이라

한 아버지, 한 어머니 자식이 나라가 다르다니

피도 푸른색, 붉은색으로 애초부터 나누어 받았던가

한 동네 살고 있는 형제끼리도 색깔을 나누어

할아버지 성묘도 못하는 손자가 있다니

전향서를 강요하는 야박한 세월

인권 이전에 국권인가

내 적이 남이면 어떻고 북이면 어떤가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함께 살자면서

혈육의 천륜을

제도와 법이라는 이름으로 갈라놓네

촛불이 타면서 외쳤던 적폐의 이름으로

이제는 벗어던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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