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사 (擧事)

계미 11월 18일 맑음

어제 불던 찬바람은 뚝 그치고 아침 해는 동산(東山)에서 떠오른다.

1883년 11월 18일 석장리 모래밭에는 1천여 명이 넘는 군중이 마을마다 깃발을 들고 모여 들었다.

사시경(巳時頃)이 되어 석장리 모래밭에 난대 없는 깃발이 펄럭이고 나팔소리 유량(流)하게 들린다,

일취(一吹), 이취(二吹), 삼취(三吹), 천뇌상곡(天雷裳曲)을 울리니 좌우산천(左右山川)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손에 작대 짚은 군중(群衆) 수천(數千)이 일제히 모래밭에 들어섰다.

허사겸(許士謙)은 후리후리한 키에 큰 삿갓을 쓰고 학반의(鶴䙪衣)에 솔띠 메고 천연(天然)이 언덕위에 올라서서 대중(大衆)을 내려다보고 외처 말하되 날이 추운데 여러분이 이와 같이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첨사(僉使) 이놈을 내여 쫓고 옥문(獄門)을 열어 무죄(無罪)한 국민(國民)을 내어놓고 육방관속(六房官屬)과 협잡배(挾雜輩)을 징치(懲治)할 것이니 여러분은 무죄(無罪)한 사람을 구타하던지 물품(物品)을 파손하던지 또는 남의 물건(物件)을 훔치든지 하면 군령(軍令)으로서 시행(施行) 할 것이니 각별주의(楁別主義)하고 다만 첨사(僉使)만 잡어 객사등(客舍登)에 끌고 오게 하라.

“자 - 가자” 하니 군중은 머리 숙여 예(禮) 하고 야 --- 소리 한마디에 발자국 꿍-꿍 대지가 울린다.

이때 가리포진에는 군노사령(軍奴使令)의 청령(廳令)소리, 죄인(罪人)잡어 곤장(棍杖)치는 소리, 술 먹고 장고(長鼓)치는 소리, 투전(鬪牋), 골패(骨牌), 장기 두는 소리 태평건곤(泰平乾坤)에 취흥(醉興)이 도도 하였다,

우- 천동(天動)소리 일어나니 산옥(山獄)이 무너지는 듯 하해(河海)가 끌어 오르는 듯 와당탕 지당탕 옥문(獄門)이 깨어지고 동헌(東軒)이 부서지고 이방(吏房)집이 넘어가고 금송(禁松)집이 엎어지고 술상 장고가 부사지고 천지(天地)가 수라장(修羅場)이다.

야~이놈 첨사(僉使) 여기 있다.

조자근(趙子根)은 달려들어 이 도적(盜賊)놈 “나라에서 주는 병부(兵符)를 너 같은 놈이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라고하며 잡아 띄었다.

이윽고 객사등(客舍嶝)에서 나팔소리가 나고 군중(群衆)은 일제(一齊)히 객사등(客舍嶝)에 모였다,

허사겸(許士謙)은 분노(忿怒)하여 말하되 “누가 동헌(東軒)을 파괴(破壞)하고 관리(官吏)의 집을 전복(顚覆) 하였는가? 군령(軍令)으로서 시행(施行)하겠다.” 군중(群衆)은 일제(一齊)히 말하데 “우리가 동헌(東軒)을 파괴(破壞)한 것이 아니올시다. 강진(康津) 사초리(沙草里) 어민들이 동헌(東軒)을 파괴(破壞)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초리(沙草里) 어민들이 해마다 몰똥바우에서 동어(冬魚)잡이를 하는데 동어(冬魚)을 잡어 놓으면 첨사(僉使)와 관속(官屬)들이 사령(使令)을 보내어 돈 한 푼주지 아니하고 잡은 쪽쪽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분통(忿痛)하되 호소(呼訴) 할 곳이 없다가 우리가 여기 온다는 말을 듣고 저들이 미리 본낭구미(지금의 망남리) 재를 넘어 동헌(東軒)뒤에 숨었다가 우리가 옥문(獄門)을 파손(破壞)하는 통에 뒤로 담을 넘어 동헌(東軒)을 부스고 동어(冬魚)짐을 다시 찾아 짊어지고 달아났으며 또 이방(吏房)집과 금송(禁松)집도 우리는 손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와서 옥문(獄門)을 열어놓으니까 수십 명(數十名) 죄인(罪人)이 나오더니 바로 이방(吏房)과 금송(禁松)집에 달러들어 그 좋은 살림살이를 낱낱이 부서 버리고 집에 줄을 거러 넘어트리려다 그것이 넘어지지 아니하고 반만 비슷하게 있는데 쌀과 돈은 이웃집 놈들이 다 가져가고 우리는 생청(生淸)단지 하나를 주어서 그것만 맛보았습니다.”

사겸(士謙)은 다시 묻되 “병부는 누가 띄었느냐?”

여러 사람들이 말하되 “ 조자근(趙子根)이가 띄었는데 병부(兵符)띄는 놈이 먼저 죽는다 하니까 자근(子根)이는 놀래여 생전(生前)돌아오지 아니 하겠다. 하고 어디로 달아났습니다,”

필자는 일직 자근씨댁(子根氏宅)을 찾아가서 병부(兵符)띄는 이야기를 문(問) 한직 자근(子根) 씨(氏)는 소소한 백발(白髮)에 목소리는 벌벌 떨고 있다.

자근(子根) 씨(氏)는 떨면서 말하되 나는 병부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동헌 마당에 들어서니 무엇이 마당에 떨어져 있음으로 그것을 주어 여러 사람에게 보이니까 여러 사람은 말하되 그것은 병부(兵符)인데 병부 띄는 놈이 먼저 죽는 법이라 하여서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또 어디다 내어버릴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되 병부(兵符)는 호방(戶房)의 차지이니 호방(戶房)집에 갖다 주는 것이 좋다 하여서 이것을 가지고 호방(戶房)집에 가니 호방(戶房)집에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호방(戶房)집 방(房)에다 휘 던져 버리고 그길로 도망(逃亡)하였는데 지금(至今)도 내가 떨고 있다, 고 하였다.

그러나 조자근은 훗날 김영현이 찾아가 물었을 때는 병부를 띈 것이 아니라 마당에 떨어져 있어서 뭣인지도 모르고 주어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큰 죄인 줄은 몰랐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는 겁이 나서 병부를 호방 집에 던져 놓고 도망하여 10여 년을 숨어 살다가 고향으로 왔으나 김영현이 물을 때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다행히 그 병부를 호방 집에 던져놓고 달아나 병부를 발견한 호방 박정용(朴正用)은 병부를 가리포진에 반납한다,

박정용(朴正用)은 병부를 반납하였다하여 다른 관속들은 모두 벌을 받지만 병부를 반납했다는 그 공적을 들어 사면을 받는다.

난리 중에는 엉뚱한 횡재를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최여안(崔汝安)과 문사순(文士順)같이 돈이 없어 매를 맞고 허사겸(許士謙)보다 먼저 돌아가신 분, 또는 조자근(趙子根)같이 일찍 도망하여 목숨은 구했지만 불안한 십여 년 세월의 머슴살이와 귀향해서도 평생 죄인으로 살다 돌아가신 우리선조들이 있었다.

늦게나마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때 허사겸(許士謙)은 더 묻지 아니하고 말하되

“날이 장차(將次) 저물어가니 첨사를 교자(轎子)에 테우고 죽청리(竹靑里)로 가자” 하니 군중은 즉시(卽時) 첨사(僉使)를 교자(轎子)에 높이 앉히고 이리빗둑 저리빗둑 소리소리 지르면서 가는 도중 어떠한 농부가 뒤에 딸려 오면서 청천에 나 뜨게 노래를 부른다.

얼시구 절시구 잘되었다

쟁기성에 하나에 돈 석량

벌 한통에 꿀 두합

숟가락 걷어 선정비 하고

초요전 걷어 계집질 하고

얼시구 절시구 잘되었다,

하고 노래를 한창 불어 가는데 첨사는 돌아다보면서 “그 어떤 백성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오 ”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군중(群衆)은 교자를 메고 죽청리 당목(堂木)에 이르렀다.

허사겸(許士謙)은 여기 교자(轎子)을 멈추어라. 이 청석(靑石)의 비(碑)는 전 첨사(僉使) 김태희(金泰熙)의 선정비(善政碑)이다.

김태희(金泰熙)는 거짓 밖으로 선정(善政)을 가장(假裝)하나 안으로 착취(搾取)을 일삼은 것은 여기에 있는 이상돈(李相墩)과 다름이 없는 자(者)이다.

이 청석(靑石)의 선정비(善政碑)는 백성(百姓)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관리(官吏)에게 아부(阿附)한 자(者)의 뜻으로 된 것이니 저놈의 비(碑)허리를 부질러라 문장사 성일(文壯士誠一)은 큰 돌을 들어내려 치니 미려(美麗)한 청색(靑色)의 비(碑)돌은 두 동강이에 부러져 비참(悲慘)하게 나뒹굴었다.

군중(群衆)은 다시 첨사(僉使)를 들어 메고 죽청(竹靑)앞 주점(酒店)에 내리어 저녁밥을 먹었다.

이상돈은 추호의 뉘우침도 없었다.

주민들은 잡혀가는 첨사를 보고 좋아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정작 첨사는 왜 농민들이 저렇게 노래를 부르며 따라오는지 조차도 모르고 오히려 달갑잖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그 인간 됨됨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가는 도중에 죽청리에서 전 첨사 김태희의 선정비를 장사 문성일을 시켜 분질러 버리게 한 것도 전 첨사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거사 후 월경(越境)조치

1883년 11월 19일 조반 후(朝飯後) 날은 추운데 군중은 다시 첨사를 둘러메고 질메재(대야리 고개)를 넘어 불목리(佛目里) 점암(占巖)을 지나다가 점암면(占巖面)에 새겨있는 “[行節制使 金泰熙 題]”라는 각자(刻字)를 산산(散散)이 부서 버리고 원동(院洞)나루를 건너 달도(達道)에 들어가 말하되 “이 첨사는 새로 첨사가 와서 인계(引繼)을 받는 뒤에 보낼 것이니 그 간(間)은 잃어버리지 말고 달도(達道)에서 맡아 두라, 하고 군중(群衆)은 회정(回程)하였다.

어떠한 행위도 가할 수 있었으나 관할구역 밖으로 추방시키기만 한 것은 다른 지역의 민란에 비해 확실하게 다른 점이라고 본다.

이렇게 달도에 이상돈(李相惇)을 두고 와서 바로 가리포진의 운영에 관하여 토론 한 결과 당분간 새로운 첨사가 부임하기까지 자치운영을 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유지들이 참석하여 토의한 결과 향도청(鄕都廳)을 설치하게 된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