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꿈

연해주 독립운동 탐방여행 6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꿈

연해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프로그램의 주 목적은 물론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이었지만 사실 제일 먼저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 것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환상이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카튜사가 타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던 기차이자 솔제니친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속살을 보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어디론가 내 영혼을 싣고 눈 덮인 벌판을 달릴 그 기차가 꼭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행 결정을 하기 전 어느 날엔가는 꿈 속에서 의인화 된 기차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모스크바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그 철길 위에서 먼 여정을 준비하며 가만히 서 있는, 고독한 기차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리라는 유혹은 꽤 강렬한 것이었다.

▲ 바깥쪽 철로위에 서 있던 기관차. 몇 번이나 시베리아 대륙을 오갔을까.

여행 안내서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탑승 체험이라고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까지는 못 가지만 시베리아를 달려 모스크바에 가는 열차에 타 볼 수는 있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 기차를 타 본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달리는 기차길을 같이 사용하는 완행열차를 타 보았을 뿐이었다.

▲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플랫홈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 - 이요상 단장 제공

가이드의 설명과 안전에 대한 여러번의 주의를 듣고 탄 기차는 대륙을 달리는 열차라기보다 서울의 신도림역에서 인천까지 가는 지상철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속도도 그렇지만 두어 정거장을 지나면서는 좌석이 꽉 차서 서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우리를 제외한 승객들의 대부분이 어디로 여행을 가는 차림새가 아니라 일터를 오가는 노동자들이나 농민들 혹은 서민들이었다. 횡단열차에 어울리는 배낭족은 차치하고라도, 누가 봐도 그들 중에 머나먼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처럼 보이는 승객은 없었다.

▲ 열차가 출발한 후 무작위로 검표를 하고 있는 러시아 승무원. 2인 1조로 근무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 이요상 단장 제공

나는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좀더 자세히 횡단 열차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했다. 타 보지는 못해도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촉감으로 그 먼 여정을 다니는 기차와 교감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허접하지만 그런대로 내 영혼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가 있는데, 역에 정차할 때 마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어느 역에선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러시아 할머니가 탔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서 통로에 자리를 잡으려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 연결 통로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던 러시아 청년 하나가 엄지척을 해 보인다. 양보한 자리 옆에 서 있기도 그래서 나도 문을 열고 청년이 서 있는 통로로 나가 눈인사를 나누었다.

▲ 객차 내부

연결 통로에도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꽉 차 있는데 어찌어찌 자리를 잡고 선다는 것이 앞뒤로 육중한 러시아 여자들 사이에 몸이 끼게 되어 엉거주춤, 참으로 난감한 자세로 내리는 역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몇 주 동안이나 가슴을 설레게 만들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꿈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감동이 강해서였을까,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도시에 대한 특별한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세계 어디에 가나 있는 영웅들의 동상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다 그만그만한 게, 마치 지구인들이 모두 모여 ‘도시를 건설할 때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꼭 만들기로 하자’ 하고 의논하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이 똑같다. 가이드의 말을 빌면 러시아 사람들이 특히 동상이나 조형물을 만들어 놓는 것을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우리나라도 이만큼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신힌촌 건설 기념탑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회원들

오랜 시간을 두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거리들과 골목길들은 사람들을 이끄는 마력이 있다. 옛날의 인사동이 그랬고 하노이 뒷골목이 그랬으며 개발되기 전의 베이징 왕푸징 거리가 그랬다. 그 거리에 들어서면, 혹은 좁은 골목길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그 공간 안에서 살던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시간을 뛰어 넘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에 닿을 듯 낮은 처마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싫어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빌딩과 휘황찬란한 가로등이 거만하게 늘어 서 있는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 블라디보스톡 시내 풍경

잠깐의 방문에서 블라디보스톡의 속살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틈만 나면 뒷골목을 기웃거렸다. 밤늦게 나가 현지인들이 드나드는 구멍가게에도 가보고 새벽까지 시내 나이트클럽에도 앉아 있어 보았지만 블라디보스톡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슈퍼도 나이트클럽도 서울의 여느 장소들과 다 똑같았다.

아라파트 거리에 갔을 때 뭐하다가 늦었는지 기억에 없는데, 모두들 바닷가로 내려가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일행이 내려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내려갔다.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에 합류해서 버스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 아라파트 거리 중앙분수대

길바닥에 오디오를 틀어놓고 놀고 있는 청춘들이 보였다. 어딜 가나 저 풍경도 똑같아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자 아이 하나가 다가오더니 담배가 있느냐는 손짓을 했다. 담배가 소통의 시작이던 시절이 한국은 이미 지나갔는데, 담배는 끊었지만 그 몸짓이 정겨웠다. 웃으며 없다고 했더니 돌아서다 말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바로 BTS 이야기가 나온다. 나머지 애들도 BTS 라는 말을 듣더니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지, 한국 대통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BTS의 신곡들은 줄줄이 꿰고 있을 것이었다. 생전 처음 와봐서 더욱 낯선 러시아 땅에서 우리 아이돌에 열광하는 러시아 청년들을 만나니 신기했다.

▲ 아라파트 거리의 청춘들 - 담배를 달라던 검은 옷의 아가씨
▲ 아라파트 거리의 청춘들

아이들과 잠깐 이야기 한 것 같은데 내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나도 갔었으면 좋았을 풍경들이 몇 개 있었다. 늘 동작이 굼떠서 여행할 때마다 놓치는 여정이 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한 건을 했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는 사람,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등 그림같은 풍경들이 사진 속에 들어있었는데 잠깐의 수고로움으로 이국적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산책을 놓친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느낀 단체여행의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겠다. 꼭 다시 올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서운함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간의 블라디보스톡 탐방은 끝이 났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유원진 객원편집위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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