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생 청산면 교평리 남한우 어르신

이번에 만난 사람은 청산면 교평리에 사는 남한우(94)씨입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9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들어보니 그의 어머니도 한 세기를 꼭 채우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1900~1999). 확인한 바로는 이 모자(母子)의 장수 비결은 소식(小食)과 다동(多動) 그리고 나눔이었습니다. 사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소식다동(小食多動)을 실천했기에 인류의 조상은 생존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현대인은 수억 년에 걸쳐 인간의 유전자에 설계된 소식다동을 거부한 채 역주행을 거듭해 왔습니다.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이는 다식소동(多食小動)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현대인은 각종 성인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청산면 터줏대감으로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남한우 어르신

■ 아산재단 효행대상 수상자 선정된 형수님

나는 1927년 옥천군 청산면 판수리에서 태어났다(호적에는 1930년 출생으로 기록).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출신인 아버지(남상봉)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나에겐 숙부)과 함께 단 둘이서 청산면으로 이주했다. 나중에 성인이 된 아버지는 심천의 땅 부자 송복헌 씨가 청산면에 소유한 토지 5000~6000평을 관리하는 소작농(小作農)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실시된 토지개혁 와중에 이 토지의 일부를 사들여 자작농(自作農)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박흠금)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2남(창우, 한우)과 2녀(숙희, 숙자)가 화목한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함경북도 회령으로 가서 철도 기관사로 근무하던 창우 형님이 1945년 한 줌의 싸늘한 유골로 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멀리 타관에서 해방을 맞아 이제 고향 옥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회령~도문 단선 열차 마지막 운행에 나섰다가 그만 열차 충돌 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창졸간에 청상과부가 된 26세의 형수님(박상년)이 형님의 유골을 수습해 머리에 이고 어린 두 딸(나에겐 조카)과 수 천리를 걸어서 귀향했다. 어머니는 장남의 유골을 보자마자 혼절했고, 형수님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안에 흘려 넣어 깨어나게 했다. 형수님은 개가(改嫁)를 하지 않고 그때부터 무려 55년 동안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설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이 1996년 효행대상 수상자로 선정했을 정도로 형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다.

 

보청천 별미 추탕과 생선국수 맛은 일품

나는 청산초등학교(29회)와 청산중학교(1회)를 다녔다. 아들도, 손자도 이 학교를 졸업해 3대(代)가 동창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마루에 던져놓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보청천(報靑川)으로 나가서 뛰어 노는 것이 일과였다. '보청천'은 보은(報恩)의 '보'와 청산(靑山)의 '청'을 합쳐서 만든 하천 이름인데, 소를 끌고 나가 냇가 초지에 풀어 놓은 다음 미역도 감고 고기도 잡으며 놀았다. 된장국에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서 끓여먹었던 추탕(鰍湯)과 생선국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보청천이 선물한 또 하나의 추억이었다.

내 나이 20세가 되던 해인 1946년 청산중학교가 개교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워낙 강렬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입학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갔지만 정작 제대로 교육은 받지 못했다. 학교를 막 세울 때라 날마다 터 닦고 돌 나르는 일만 했다. 그것이 지금도 무척 아쉽다. 해방 직후 정국이 어수선해 학교 문을 열고 닫기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듬해 부모님의 강권으로 혼례식을 치렀다. 당시만 해도 '중학생 신랑'은 흔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20대 나이라 징집영장이 세 번이나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체중이 입대 기준인 45kg 미만으로 나와서 면제되었다. 입대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 번째 위기는 1.4후퇴 직후에 찾아왔다. 한 동네에 살고 있던 두 살 연상의 백석기 선배가 대구에 위치한 제1훈련소에서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와서 쉬고 있던 그가 귀대하며 나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한우 너는 학생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았으니 훈련소에 가서 고장 난 총기를 고쳐주면 좋겠다. 군속으로 취직시켜 줄 테니 나와 함께 대구에 가자."

실제로 나는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중학생 시절 고장 난 시계를 고쳐주고 수고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 기술을 인정해 취직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선배를 따라 나섰다. 영관급 장교 신분이라 대구로 가는 피난민 트럭을 쉽게 얻어 탈 수 있었다. 운전석은 이미 만원이고 짐칸에도 잔뜩 짐이 실려 있어서 선배는 운전석 위쪽 차체에 앉고 나는 밧줄을 꼭 잡고 짐칸에 매달렸다.

"쾅!!!"

황간에서 김천으로 달리던 트럭이 비탈진 언덕길에서 마주오던 차량과 충돌했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내 위로 무거운 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순간 '내가 이렇게 죽나'라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잃었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용케도 떨어진 짐들이 맞물린 사이에 누워있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 '좋아하던 일'에 몰입했던 월명광업소 기계감독 시절의 남한우씨(사진 왼쪽).

 

6.25전쟁 1.4후퇴 당시 죽을 고비 넘겨

우여곡절 끝에 열흘 만에 대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약 보름이 지난 어느 날, 백석기 선배가 퇴근하더니 나를 붙잡고 대성통곡했다.

"한우야, 정말 미안하다."

"왜 그러세요? 형님."

"훈련소가 제주도로 이전한대."

군속으로 취직은커녕 당장 한겨울에 돈 한 푼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백 선배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대구역에서 상행선 화물 열차를 태워주는 일이 전부였다. 열차가 영동역에 도착하면 내려서 집까지 걸어갈 심산이었다. 드럼통이 잔뜩 실려 있는 화물 열차에는 군복 입은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군인 이외에는 다 열차에서 내려!"

추풍령을 넘으려던 열차가 다섯 번이나 미끄러져 후진해 내려오자 미군 헌병들이 올라와서 외쳤다. 중학생 교복에 모자를 쓰고 있던 나는 열차에서 내려 양지바른 곳에 쭈그려 앉았다. 그런데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해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데 오금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 좀 일으켜 주세요."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간신히 일어나 움직이는 열차에 오르려고 하자 미군 헌병이 제지했다. 열차가 무거워지면 추풍령을 또 넘을 수 없으니 군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석양의 한겨울 들판에 홀로 남겨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급한 마음으로 미군 헌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바로 그때 생명의 은인이 나타났다.

"너 청산 사는 남한우 아니냐?"

청산초등학교 2년 선배 장용호 형님이었다.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그 형님 덕분에 출발하는 열차에 간신히 올라타 추풍령을 넘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의 평화가 찾아왔다.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고향을 지켜야 했다. 농사 짓는 것이 싫어서 청산면 명치리에 위치한 월명광업소에 취직했다. 여기서 '기계감독'이라는 직책의 임명장을 정식으로 받고 15년 동안 일했는데, 월급 받는 것보다 기계 만지는 것이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흑연을 채굴하던 월명광업소는 지금은 폐광되었다.

▲ 거의 매일 틈날 때마다 붓을 든다. 서예를 배운지 약 7년이 되어간다

 

■ 철공소 가업 이은 차남이 농기구 발명도

나는 월명광업소를 퇴직하고 고향 마을에 '청우철공소'를 세웠다. 내 고향 청산의 '청(靑)'과 내 이름 한우의 '우(祐)'를 따서 만든 상호였다.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던 차남 기섭이 고맙게도 가업을 이어받았다. 유년 시절 발명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학창 시절에는 유난히 과학을 좋아하던 차남은 실제로 1980년대 청산면 일대 농민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던 '이동식 탈곡기'를 발명했다.

아들에게 가업을 넘겨주고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이 고향을 위한 봉사였다. 나중에 면민협의회로 개명하게 되는 번영회 만드는 일부터 착수했다. 처음에는 자금이 한 푼도 없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상가를 돌면서 비용을 조달했다. 1989년 청산면사무소를 신축할 때는 '청산면민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고향 주민과 재경향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해 면사무소 내부 집기와 정원수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청산면민협의회'가 주최한 백중씨름대회에 이봉걸, 이준희 등 당시 국내 최고의 씨름선수를 초청하자 주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청산면노인회' 회장을 맡았을 때도 관행에 따르지 않고 발상을 전환해 행사를 추진했다. 2011년 매년 해오던 관광여행 대신 윷놀이 잔치를 벌이자 평소보다 많은 회원들이 참석했다. 다음은 이 행사를 보도한 옥천신문 기사다.

"청산지회가 버스관광 대신 윷놀이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버스를 맞춰 관광을 떠났지만 회원들의 만족도가 낮았다. 오랜만에 휴식을 하고자 여행을 계획했으나 휴식하는 시간보다 버스에서 이동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장홍연(79, 교평리)씨는 '관광버스로 여행을 갈 때는 피곤한데다 별로 남는 것도 없어 참석을 안했는데 이번 윷놀이는 회원들과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 참석했다'며 '앞으로도 먼 데 가지 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하면 시간도 넉넉하고 큰돈도 들지 않아 좋을 것'이라 말했다."

고향을 위해 봉사하면서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1990년(64세) 전국체전 당시 청산면 대표로 성화 봉송 주자가 되었다. 2007년(81세) 옥천성모병원이 주최한 노인장기왕 선발대회에서 2등인 '한왕(漢王)'이 되었다. 2011년(85세)과 2013년(87세) 문화정보대학 종강식에서 서예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 청산초 2학년 때 심었던 소나무 앞에서 29회 동창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옥천신문 자료사진)

 

너무 아득바득 살지 말고 나누면서 살자

내 나이 어느덧 94세가 되었다. 21세 때 결혼한 아내(주경순)와의 사이에서 6남매(4남2녀)를 얻었다. 그리고 장남 기훈, 차남 기섭, 삼남 기복, 장녀 현희, 차녀 현숙, 사남 기형이 모두 11명(6남5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아버지가 청산으로 이주해 낳은 두 아들 중 형님이 먼저 타계하고 나 혼자만 남아서 너무 쓸쓸하고 외로웠는데, 대가족으로 성장해주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농사만 지으며 살았던 아버지는 다소 이른 나이인 63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장수하셨다. 1900년 태어나 1999년 별세했으니 온전히 한 세기를, 그러니까 정확히 100년을 채우고 이 땅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다.

우리 모자(母子)의 장수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많이 먹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들에 나가 물꼬를 보고 철공소에 와서 기계를 점검한 뒤 10시 넘어 늦은 아침을 먹었다. 배고프지 않으면 일부러 점심을 먹지 않았고, 그 대신 저녁은 조금 일찍 먹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50년 이상은 두 끼만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이 움직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저절로 많이 움직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군가와 사이가 나빠지면 잠을 자지 못하는 성격이라 반드시 오해를 풀었다. 나중에 내가 죽은 뒤에도 '그는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가능하면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웃으려 노력했다. 자식들에게도 늘 '재복(財福)은 따로 있는 것이니 너무 아득바득 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실컷 하면서 살라'고 말해준다. 이것도 너무 욕심내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면 저절로 해결된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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