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자마자 주섬주섬 걸치고 일어섰다.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이발을 할 요량이었다. 일이 있어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아들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뜸 ‘ 파고다 영감님’ 이라고 놀린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코로나 때문에 나다닐 일 거의 없다는 빌미삼아 한 이틀 제대로 씻지 않았으니까. 두툼한 털모자에 목도리 두르고 마스크까지 쓰니 더 이상 감추고 말 것도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다녀와서 샤워할 거라고 둘러댔다. 가만히 쳐다보던 아내가 ‘ 니네 아빠는 꼭 티를 내고 다닌다.' 고 거든다.

그러고 보니 켕기는 게 있다. 갈 때마다 넌지시 웃으며 반기던 머리방 아주머니가 예사롭진 않았다. 보통 때는 스프레이로 머리에 물을 끼얹고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 어르신, 머리가 까치집을 지었네요. 이쁘게 해 드릴 테니까 머리 먼저 감고 오세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모자에 눌려서 그런 것뿐이라고 여겼다. 인제 보니 얼마나 지저분했으면 먼저 머리부터 감으라고 했을까? 게으른 영감탱이라고 어지간히 속치부를 했음 직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부랴부랴 머리를 감았다. 탈모 방지용 샴푸에, 피붓과 의사가 특별히 조제해 준 ‘비듬 전문 치료제’를 섞어서 북북 문질렀다. 면도까지 하고 나니 개운하다. 아들 앞에서 헛기침하고 당당하게 나섰다.

머리방에 들어서니 아주머니 혼자 앉아 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손님이 없어 얼마나 다행인가? 속도 모르고 여느 때처럼 살갑게 반긴다. 세 개 중에서 가운데 의자로 안내한다. 아주머니는

“ 어머, 냄새가 참 좋아요. 어떤 샴푸를 쓰세요? ”

하더니 코를 가까이 댄다.

“ 벌써 많이 자라셨네요. ”

하면서 살가운 표정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랬다. 도도했다. 내심 두 눈 크게 지릅뜨고 볼 테면 보라는 식이었다.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듯 고개를 한껏 들었다. 알 듯 모를 듯 눈웃음을 치던 아주머니는 테이프로 마스크를 고정한다. 이어밴드를 모두 벗기고 양쪽 위 코받이와 턱받이에 각각 테이프를 붙인다. 이윽고 코편을 고정한다.

“ 뒷머리 위로 올려 치는 건 싫어하시지요? ”

하더니 능숙하게 가위질을 시작한다. 이발소 의자는 그렇지 않아도 참 안락하다. 사사사삭 싸싸싸싹 차악차악! 가위 소리에 절로 눈을 꺼먹거린다.

“ 사장님, 이따가 눈썹 손질 잊지 마세요. ”

묵직하게 한마디하고 이내 눈을 감았다.

정갈하다. 왜 진작 자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 기분이 좋다. 특별히 현금을 지불했다. 아주머니는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장부에 체크한다. 3회째라며 ‘ 단골 어르신’ 이란다. 10회 이용하면 1회는 덤인 집이다. 전화 방명록을 남기고 나왔다.

거의 날마다 풍산역까지 샛길로 가로질러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운동한다고 아파트를 몇 바퀴씩 돌았다. 하지만 모두 건성질이었다. 이사 온 지 14년째지만 세상에나, 우리집 주변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내가 봐도 딱하다. 맘 놓고 본 적이 없다. 영하 10도가 넘는 날이지만 내친김에 아파트를 돌기로 마음먹었다.

이어지는 글은 지난 1월 16일과 17일, 고양시 하늘마을 5단지 아파트를 돌면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주로 나무와 풀 이야기다. 여기에 몇 가지를 보태서 차례대로 싣는다.

 

1. 지집 죽고 자식 죽고, 아이고 아구구구
2. 시몬,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3. 매미야, 인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지 그래
4. 고양시 시목, 백송
5. 삶과 죽음을 지켜주던 민중의 벗, 소나무
6. 사람들아, 고로쇠 등골까지 빼먹어야겠니?
7.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늘푸른나무
8. 가장 늦게 꽃을 피우는 왕느릅나무
9. 죽은 이파리 보듬고 자는 복자기나무
10. 개나무(獒樹)와 느티떡
11. 오뉴월에 하얀 눈꽃을 피우는 이팝나무
12. 연중 허연 눈물을 흘리는 스트로브잣나무
13. 겨울눈이 루비처럼 아름다운 가시칠엽수
14. 자신의 손발을 잘라내는 메타세쿼이아
15. 여보게, 제발 저 마녀의 빗자루 좀 잘라서 태워 주게
16. 벽화를 남기고 간 담쟁이덩굴
17. 추운 겨울, 새들에게 보시하는 아이들
18. 길고양이는 글자를 모른다
19. 흑진주를 품은 맥문동
20. 일본어 따라쟁이, 가는잎그늘사초
21. 사이비 유학도의 저주로운 풀, 구미초(狗尾草)
22. 바람 잘 날 없는 동대표 선거

 

(계속)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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