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6, 그날은 영하 10도가 넘는 날이었다. 모처럼 머리방에서 이발한 뒤, 여느 때처럼 동네를 돌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깨달았다. 이사 온 지 14년째인데 집 주변에 어떤 나무와 풀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거의 날마다 아파트를 돌아다니고 풍산역까지 샛길로 가로질러 걷는다. 하지만 모두 건성질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고양시 하늘마을 5단지 아파트를 돌면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주로 나무와 풀 이야기다. 여기에 눈에 띄는 몇 가지를 보태서 20여 회에 걸쳐 차례대로 싣는다.

 

지난해 9월의 어느 날, 집을 나서다가 우연히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관리사무소 뒤에 생울타리로 조성한 쥐똥나무 더미 밑이다. 경주로(track and field) 곳곳에 운동 기구들이 설치된 ‘중앙광장’ 옆길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긴가민가해서 다시 보았다. 멧비둘기가 틀림없다. 가까이 다가가 빤히 들여다봐도 별 움직임이 없다. 알을 품고 있을 리도 없는데 무슨 사달이 난 걸까?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집 앞에 이르렀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무렴, 새는 날아야 제격이지…….

 

샛말간, 그래서 더 슬픈 눈동자

 

이튿날 오후 집으로 오다가 문득 그 비둘기가 떠올랐다. 일부러 어제 그 길을 되짚어갔다. 앉았던 자릴 중심으로 사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10여 미터 떨어진 사잇길 반대편에 앉아 있지 않은가. 온몸을 드러낸 채 짐짓 나 보란 듯이, 산철쭉 아래 잔디밭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어제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동도 하지 않고 뒷걸음치는 내 눈까지 좇고 있구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자신을 잊어버린 무아의 경지에 다다른 듯 무덤덤해 보인다. 다시 보니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욕심을 혼자 지고 사는 것처럼 어째 짠한 얼굴이다. 샛말간 눈동자에서 금세 이슬같은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질 듯하다.

 

몇 날 며칠 동안 죽은 아기를 지켜보고 앉아 있는 멧비둘기.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하지만 샛말간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어려 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안 좋은 일은 왜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가. 헤집듯이 주변을 살피던 내 눈에 사체가 보인다. 어깨깃과 날개덮깃을 보니 영락없는 멧비둘기다. 다만 머리와 목의 깃털이 갈색이고 목덜미에 얼룩무늬도 안 보인다. 꽁지깃도 없이 뭉툭한 게 한눈에 봐도 아기새다. 막대기로 뒤적여 보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뱃바닥이 깔끔하다. 피존밀크(pigeon milk) 만한 영양제가 없을 텐데, 어디 어미젖이나 한 모금 먹어봤겠니? 피어나지도 못하고 왜 그리 빨리 갔을까? 차마 아기 곁을 떠나지 못하는 어미를 다시 본다.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새끼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아, 비둘기 너머로 유년의 어미닭과 병아리가 도드라지게 솟아오른다.

 

머리와 목의 깃털이 갈색이고 목덜미에 얼룩무늬도 안 보인다. 꽁지깃도 없이 뭉툭한 게 한눈에 봐도 아기새다. 막대기로 뒤적여 보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은 개미나 구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공부리의 단말마, ' 삐~악, 비~아~ㄱ '

 

종작없이 날뛰던 강아지는 병아리만 보면 컹컹거렸다. 물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저 장난질을 좋아했다. 그때마다 병아리들은 쫑쫑거리며 어미의 사타구니를 찾아들었다. 어미는 꽁지 뒤로 새끼들을 감추고는 날갯죽지를 부풀린 채 알겯는 소릴 내며 강아지를 쫓았다. 병아리를 한배에 열 마리쯤 깐 암탉이었다. 새끼라면 사족을 못 쓰고 자나 깨나 끼고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한 마리도 건사하지 못했다. 사연이 기구하다. 두 마리가 합수통(거름으로 쓸 똥오줌을 모으는 통)에 빠져 줄초상이 났다. 할머니는 장 보러 가시고 나는 친구들과 논에서 못치기를 한 날로 기억한다. 갈퀴로 건져 올린 주검은 두엄 속에 던져졌다. 몇 마리는 신작로 옆에 있던 논으로 마실 갔다가 소달구지에 치이고, 또 몇 마리는 대밭에서 놀다가 뉘 집 개한테 물려 죽었다. 그때마다 나는 ‘삥아리 새끼’ 하나 못 본다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지천(지청구)을 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달랑 한 마리만 달고 다녔는데, 돼지우리 앞에 놓인 밥통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돼지에게 먹히고 말았다. 한 달쯤 자랐을까? 발가락부터 씹히던 병아리는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쳤다. 찢어질 듯 크게 벌린 공부리(새끼새의 노란 부리)로 다급하게 뺙뺙거렸다. 생기다가 만 연분홍 볏까지 드세우고 울부짖던 아이 얼굴이 삼삼하다. 숨이 끊어지면서 삼키던 속울음까지 들려온다.

‘삐~악, 비~아~ㄱ’

어미닭은 목덜미부터 꽁지와 다리까지 온몸의 깃털을 죄다 부풀리고 까무러치듯이 짓싸대며 소릴 질렀다. 닳아빠진 회갈색의 궁둥이 털까지 드러내 보이며 사납게 대들던 씨암탉! 말 못 하는 짐승이 얼마나 헐떡거리며 그르렁거렸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를 지켜보던 꼬맹이도 한몸이 되어 으레껏 덩달아 빠락빠락 소릴 질렀다. 급기야 덕석 앞에 있던 간짓대를 챙겨 들고 사정없이 흑돼지를 찔렀다. 머리, 가슴, 배, 엉덩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마구 찔렀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무지한 흑돼지는 한 입가심도 되지 않은 병아리를 삼키고는 또다시 구정물통에 코를 박았다.

 

“저 잡년은 누굴 택해서(외탁(外託)하다, 친탁(親託)하다탁하다에서 온 말), 지 새끼 다 죽이고도 빨빨거리고 댕기끄나(다닐까). 인자 알까지 놈() 집에다 싸지르고 자빠졌네. 오매, 염병할 년!”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도 생각이 날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시는지 대빗자루, 부지깽이, 부삽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며 암탉을 몰아세우셨다. 밥을 짓다 말고 신세 한탄하듯 혀를 차며 혼잣말로 몇십 번을 되뇌셨는지 모른다. 애지중지하던 그 씨암탉은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고, 후제 제 명에 가지도 못했다. 할아버지 제상(祭床)인가 명절 차례상에 오르고 말았다.

 

아기 무덤 위로 뗏장 대신 민들레를 심다

 

어미야.
경자년 여름은 너나없이 살기가 어려웠어. 때아닌 집중 호우가 5월부터 쏟아지더니, 이미 6월에 역대급 폭염이 몰아쳤잖아. 7월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아 밤에는 한기가 들고 마른장마까지 겹치고. 그러다가 자그마치 4개의 태풍이 줄달아 몰려오고 지리한 장마가 8월 중순까지 이어졌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여름이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한 달 가까이 고봉산 자락에 있는 주말농장에 나가지 못했다. 장마 그친 뒤에 나가 보니 고추, 토마토, 상추, 대파, 부추는 모두 녹아내리고 가지와 하늘마 몇 개만 대롱거리지 뭐니?

 

어미야,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판에 그딴 작물이 다 뭐니? 하물며 넌들 왜 아니 보대꼈을까? 더구나 사방이 아파트뿐인 일산은 니가 살 곳이 못 돼. 이삭은커녕 풀씨마저 구경하기 힘든 곳으로 변했거든. 니가 살 곳은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필요 없는 곳이야. 어쩌다가 차 한 대 지나가면 흙바람이 이는 곳을 찾아봐. 아무튼 갈수록 세상살이는 팍팍해지고 금실 좋던 남진마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구나. 속없는 새끼는 성가시게 보채다가 보타빠진(몸이 말라빠진. 전남 방언) 어미 가슴 원망하더니만 결국 징한 꼴을 당하고……. 살아생전에 낟알 한 톨 구경 못한 새끼를 위해 콩 한 줌 넣어주마. 혹시 몰라 뗏장 대신 민들레 한 포기 심어 두었다. 달큼한 향기는 천사가 먹여 준 젖내음이요, 민들레 꽃바람은 곧 아가의 배냇짓이야. 민들레가 필 무렵 잊지 말고 찾아가서 보듬어 주렴.

 

살아생전에 낟알 한 톨 구경 못한 새끼를 위해 쌀이랑 콩을 한 줌 넣어주었다. 나중에 혹시 어미가 잊어버릴까 싶어 뗏장 대신 민들레 한 포기를 심어 두었다.
살아생전에 낟알 한 톨 구경 못한 새끼를 위해 쌀이랑 콩을 한 줌 넣어주었다. 나중에 혹시 어미가 잊어버릴까 싶어 뗏장 대신 민들레 한 포기를 심어 두었다.

 

어미야, 한국민담선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 금강산을 구경한 비둘기가 굴뚝새의 꾐에 빠져 굴 속에 들어갔다가 가족을 모두 잃고 지금껏 “지집 죽고 자식 죽고 구구구구 구구구구……”하고 운다는 얘기야. 물론 선조들의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지. 당시에도 생때같은 처자식 잃고 홀아비로 사는 이가 많았나 보지 하도 싱숭생숭해서 내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그런저런 사연 없는 이들이 어디 있겠니?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든 애옥살이

 

‘ 꾸~ㅅ꾸욱 꾸꾹 ’

‘ 후~ㄱ쿠~ㄱ 쿠쿡 ’

대낮에도 울고 새벽에도 운다. 비가 와도 울고 눈이 와도 운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고봉산에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 젖히는 멧비둘기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리듬을 살려서 일고여덟 번쯤 내지르는데,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내지른단다. 어떨 때는 후렴구도 잊지 않는다. 마치 가래를 삭이듯 거치적거리는 소리다.

‘ 그르르릉 그릉 ’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소리지만 무작정 한하고 우는 새가 아니다. 결코 보채는 법이 없다. 네댓 번 되풀이하다가 그만둘 줄 안다. 몸단장하면서 점잖게 때를 기다린다. 분수를 안다. 절도가 있다.

 

어미야!
너도 알지? 옛날부터 중국에 전해 오는 ‘천장우 구축부(天將雨 鳩逐婦)’라는 속담 말이다. 하늘이 흐려져 비가 내릴 조짐이 보이면, 글쎄 남편 비둘기가 아내를 내쫓았다는구나. 그런데 하늘이 맑아지면 다시 불러들였다니 그런 가당찮은 말이 어디 있겠니? 어쩌면 저 비둘기는 집 나간 아내를 부르는지도 몰라. 어제도 오늘도 구성진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는구나.

 

어미야,
누구처럼 가진 것 없어 번듯한 집 한 채 짓지 못하고, 이날 입때까지 까치가 살던 빈집에 숨어 살았잖니? 혹시 사악한 그놈이 월세라도 내라던?
어미야, ' 사악한 까치 ' 란 말에 그렇게 화들짝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나도 뜨악하긴 마찬가지다. 예부터 까치가 울면 기쁜 일이 생긴다고 해서 길조(吉鳥)나 희작(喜鵲)이란 이름을 붙였잖아. 어디 그뿐이냐? 하늘의 새, 건작(乾鵲)이니, 신녀(神女)라고 받들기까지 했지. 하기야 창기(娼妓)에게도 붙여준 이름이 ‘ 신녀 ’니까 그닥 놀랄 일도 아니다만. 어쨌든 그래서 쫓겨난 거냐, 아니면 무지한 태풍 ‘바비’가 니네 둥우리를 짓부순 거냐? 알 낳고 새끼 칠 때를 빼면 집도 절도 없이 사는 게 니네 삶인데, 그런 애옥살이마저 자유롭지 못하니 세상천지에 이다지도 서러울 데가 또 있을까.

 

맞아, 팔자 좋은 것들이야 맛 좋은 콩을 헛간 어딘가에 가마니째 쟁이고 산다지? 하지만, 한데서 사는 우리야 곳간을 파헤쳐도 콩 한 줌 찾기가 힘들잖아. 딴은 곳간이 필요 없는 삶이지. 가을한 종자는 망태에 담아 헛간에 두고 살잖아. 저들은 소중한 게 문갑 속에 있다고 여기지만...  

어미야,
이 추운 겨울, 어디 가서 목이라도 축여야 할 텐데 시궁창에 처박힌 시커먼 눈물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나라도 물 한 모금 따라주고 싶은데 그게 녹록치가 않단다. 이 세상에는 쓰잘데없이 간섭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거든. 물 주려는 사람 쫓아다니면서 삿대질하고,  쪽박까지  깨버리는 그런 인간들 말이다.

 

날 쳐다보지 않고도 느낌으로 아나 보다. (시계바늘 방향으로) 고갤 움츠리고 곁눈질하다가 다시 고개를 죽 드밀고 탐색하고 있다. 이윽고 먹이 한 줌 없는 빈손을 확인한 어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맨땅을 쪼고 있다.
날 쳐다보지 않고도 느낌으로 아나 보다. (시계바늘 방향으로) 고갤 움츠리고 곁눈질하다가 다시 고개를 죽 드밀고 탐색하고 있다. 이윽고 먹이 한 줌 없는 빈손을 확인한 어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맨땅을 쪼고 있다.

 

(계속)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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