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학(86, 청산면 한곡리)

이번에 만난 사람은 청산면 한곡리에 사는 박종학(86)씨입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빈손으로 살림을 시작했을 때 한 주민의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아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일어섰으니 이제 남을 위해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서른여섯 살에 새마을지도자를 시작으로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노인회장으로 봉사 생활을 실천해왔습니다.

문득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식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해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중략)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남을 돕는 자를 더 크게 돕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돕는 자와 남을 돕는 자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아버지 일찍 죽자 어머니 생선장사 나서

나는 1935년 청산면 한곡리에서 태어났다. 

한곡리는 역사의 혼(魂)이 깃든 마을이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이 1894년 3월 21일(최시형 선생 탄생일) 동학농민군의 1차 기포(起包) 이후 관군의 추적을 피해 옮겨 다니다 우리 마을에 은거했으며, 그해 9월 18일 여기서 재기포(再起包)를 선언했다. 

당시 동학을 주도했던 7명이 우리 마을에 있는 바위에 각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출전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문바위골’이라고 불렀다. 바위에 새겨진 이름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문바위골 위쪽 느티나무 주변의 평지에서 동학농민군이 군사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도 어른들에게 전해 들었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박용희)와 어머니(신석순)는 슬하에 3남매를 두셨다. 3남매(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의 유년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적 사건이었다. 창졸간에 소년 가장이 되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보은군 신동면 의암리에서 한곡리 태안 박씨 집안으로 시집온 어머니는 3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셨다. 부산이나 대구까지 가셔서 생선, 미역 등을 떼어다가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청산면 일대의 마을마다 다니며 팔았다.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그래도 아흔 살까지 장수하시며 자식들 출가하는 것을 지켜보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새마을지도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새마을운동 기금을 조성했다. 농악대가 마을을 돌면서 풍물 공연을 하면 처지가 어려운 주민들도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주었다
새마을지도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새마을운동 기금을 조성했다. 농악대가 마을을 돌면서 풍물 공연을 하면 처지가 어려운 주민들도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주었다

 

■ 미군기 청산 노루목재 주민 폭격 목격해

아버지가 없었지만 나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에 제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청산면 백운리에 위치한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그 해에 청산초등학교 1학년으로 재입학했다. 3년 동안 일본어로만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렇게 세 살 어린 동급생과 어울려 공부해 1950년 5월 10일 청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부터 내가 독학(獨學)한 것이 있다. 서예(書藝)가 바로 그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주변 다섯 개 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글짓기·미술대회가 열렸다. 당시 ‘원수의 삼팔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출품했는데, 글짓기 부문 1등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에게 문재(文才)가 있다고 여기고 스승도 없이 스스로 서예를 공부했다. 
서당에서 얻어온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 등이 내 서예 공부의 교재가 되어주었다. 글씨 쓰기 연습할 종이가 부족할 때여서 신문 보는 집에서 어렵게 폐지를 얻어와 벼루 하나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고 또 썼다. 그렇게 몇 년을 미친 듯이 썼더니 주변에서 나를 ‘명필(名筆)’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지금도 옥천군청 민원실, 청산면 파출소 등 옥천군 곳곳에 내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초등학교 졸업 한 달 후에 6.25전쟁이 터졌다. 나는 그해 10월5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충격적 사건을 목격했다. 그날 청산파출소 월동용 장작을 보급하려고 주변 마을에서 차출된 주민들이 노루목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공중을 선회하며 정찰하던 미군 비행기가 그들을 후퇴하는 인민군으로 오인했는지 갑자기 하강하면서 집중 폭격했다. 당시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덩치가 컸던 고향 후배 박종철 등 다수의 주민들이 즉사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인 1955년 나는 청성면 산계리 이덕재씨의 장녀 이정순과 결혼했다. 남편이 없었기에 어머니로서는 장남을 빨리 장가보내 가문을 잇고 싶으셨을 것이다. “다 쓰러져 간다”고 표현해야 적합할 정도로 궁색한 초가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한 이듬해 장남 대성이, 그 이듬해 연년생으로 장녀 순이가 태어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인 1958년 군에 입대했다. 그해 2월 9일 논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들어가 신병 훈련을 받은 다음 경기도 양주에 있는 20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독학한 서예 실력 덕분에 행정과에서 3년 동안 복무하고 1961년 만기로 제대했다.  

■ 지도자 10년, 이장 15년, 노인회장 8년

제대 뒤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날품팔이로 버티고 있던 나에게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밑천을 제공해주신 분이 있다. 같은 마을에 살던 박종하씨가 내 인생의 은인인데, 어느 날 송아지 한 마리를 주면서 잘 키워보라고 하셨다. 열심히 풀을 먹이고 여물을 줬더니 잘 크더니 튼실한 송아지 한 마리를 낳아 주았다. 

그 송아지를 가장 먼저 박종하씨에게 돌려드리고 다시 열심히 키웠더니 다시 새 송아지를 낳았다. 이때부터 새 송아지가 태어날 때마다 우시장에 내다 팔아 목돈이 생기면 농지를 한두 마지기씩 구입했다. 황무지 같았던 내 인생에도 그렇게 생명력 넘치는 풀과 나무가 자라더니 꽃과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일어섰으니 이제 남을 위해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70년부터 10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를 맡았다. 가장 먼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새마을운동 기금을 조성했다. 당시로서는 적은 액수가 아닌, 가구당 5천원 갹출이 목표였다. 농악대가 마을을 돌면서 풍물 공연을 하면 처지가 어려운 주민들도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주었다. 

마침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마을지도자가 조금만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하면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들 수 있는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자금도 동원할 수 있었다. 시멘트를 지원 받아 마을 진입로를 놓아도, 작은 다리 하나를 놓아도 반드시 마을 잔치를 열었다. 먹을 거라곤 막걸리밖에 없었던 시절이지만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자 주민들의 참여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졌다.

마을 주민들의 염원인 마을회관 준공식을 열었던 1972년 청주시 실내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이날 우리 마을이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박 대통령으로부터 100만원의 하사금을 받았다. 박 대통령과 직접 악수도 나누고 만년필 두 자루를 선물로 받은 그 날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나는 그 만년필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새마을지도자 10년 봉사를 마치자 주민들이 이번에는 마을 이장의 직책을 맡겼다. 15년의 이장 활동을 끝내자 어느덧 내 나이 회갑을 넘겼다. 몇 년 쉬다가 8년 전부터 청산면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 마을과 지역을 위한 봉사 생활 33년을 감당할 심신의 건강을 허락받은 것에 감사하고 있다.     

 

 

■ 나의 호를 ‘청송(靑松)’이라 지은 까닭 

내가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시작했다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실천해온 습관이 있다. 일지(日誌) 작성과 사진첩 정리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날의 날씨와 찾아온 손님의 이름은 물론이고 가정과 마을에 일어난 특이한 일들을 모두 일지에 적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주민들의 생일과 별세한 어르신들의 제삿날이 언제인지까지 정확히 꿰뚫게 되었다. 오죽하면 부모님 제삿날을 잊어버려도 박종학만 찾아가면 모두 알 수 있다는 농담까지 생겼겠는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며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해 마을의 원형과 변화 과정을 사진첩에 남겨놓는 일도 병행했다.    

나의 일지 작성 습관은 1994년 옥천신문에 ‘마을 역사 기록하며 화합 이끄는 박종학 이장’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청주KBS에서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텔레비전에 출연한 이후 이장단 모임 등에 나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에는 노인회장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시종 충북지사에게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명예를 얻고자 봉사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은근히 기분도 좋았다.  

‘생존의 비결은 신용이고 신용의 근본은 정직이다’. 내가 정한 우리 집 가훈(家訓)이다. 가훈을 작은 편액에 담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거실 벽에 걸어놓았다. 서예를 하다 보니 내 호(號)도 지었다. 내 모든 서예 작품 뒤에는 이렇게 작은 글씨로 서명하거나 음각한 낙관(落款)을 찍는다. ‘청송(靑松)’. 항상 나에게는 건강을, 남에게는 신용을 유지하자는 마음에서 호를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청송이라 지었다. 남은 인생도 그렇게 청산(靑山)의 청송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65년째 해로하고 있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장남 대성, 장녀 순이, 차녀 순옥, 삼녀 순선을 얻었고, 그들이 모두 5명(3남2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1972년 청주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1972년 청주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에서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청산향교 훈장 봉사 모습. 
청산향교 훈장 봉사 모습. 

 

보릿고개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 … 막내딸이 부모님께 보내는 감사편지

존경하는 부모님께. 막내딸이 부모님께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 옛날 보릿고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보릿고개를 힘들게 겪으면서도 우리 4남매를 어떻게 해서든지 굶기지 않으려고 애쓰셨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모님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행복하기만 합니다. 

지금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게 인터뷰에 응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마냥 존경스럽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과 더 이상 동행하지 마세요. 이정표 없는 거리로 시간의 화살만 먼저 떠나보내시고 두 분은 그대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세요. 그래야 우리들이 오래오래 부모님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 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막내딸 순선 올림-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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