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등성과급제도는 실패한 천박한 정책

2021년 4월 13일 (화) 오후 1시,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진행된 <차등성과급 폐지 전교조 기자회견> 장면 (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2021년 4월 13일 (화) 오후 1시, 세종시 교육부 앞에서 진행된 <차등성과급 폐지 전교조 기자회견> 장면 (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올해는 A급 교사라고 문자가 날라왔다. 지난해 나는 B급 교사였다. 2년 연속 B급 교사가 되니 저절로 학교가 싫어졌다. 직업반 담임 역할에다 1,2,3학년 대안학교 위탁교육업무 일체, 그리고 진로지원부 기획 업무, 거기다 또래학습멘토링 활동, 희망교실까지 업무가 넘쳐났다. 2018년과 2019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냈다. 그 당시엔 교과서 한 번 제대로 펼쳐보기 힘든 나날이었다.

학교업무 외에 교육운동 차원에서 하던 일은 언급하지 않겠다. 스스로 몸 상해가면서 내가 자처한 것이니까! 그에 대해 대가를 바라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건 교육자로서 나의 신념에 관한 일이기도 하니까!

솔직히 언급하면 교육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이런저런 연수에 참여하고 수없이 많은 자료를 읽어야 한다. 지난겨울에도 민주시민교육 교원노동조합 1박 2일 워크숍에 참가해 밤늦도록 회의하고 다른 시도 교사들과 교육적 고민을 나누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세우고 나름의 정세판단과 교육자로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반복한다. 그렇게 30년을 지냈다. 아니 대학 1학년부터 선배의 권유로 야학교사 생활을 했으니 제도권, 비제도권 교사 생활을 40년 넘게 한 셈이다.

어떤 날은 평일에도 줌으로 밤 10시까지 회의를 해야 하고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기자들에게 내보낼 보도자료와 성명서를 작성하느라 날밤을 새거나 지친 몸을 이끌고 작성해야 한다. 지난 월요일에도 긴급히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토요일에도 <OECD 교육 2030> 정책토론회가 있었다. 전날 무려 논문 네 편을 읽었다. 2018년 교육과정 관련 국제행사인 만큼 교육부 관료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엔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 않다. 2022년 교육과정이 국가 수준 총론부터 전면 개정을 앞두고 있는데 우리들 학교 현장과는 동떨어진 먼 나라 이야기 같다.

내가 전해 듣기로 우리 지역 지회장은 50대 여교사이다. 3년 연속 B급 교사가 되었다. 올해도 B급이라고 문자가 왔다. 한국 사회 <비고츠키 교육학 연구>의 대가이고 지난 토요일 <OECD 교육 2030>에서도 논문 한 편에 해당하는 발제를 맡았던 분으로 중학교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이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논문은 상당한 시간을 확보해야 자료를 수집해서 읽고 쓸 수 있는 힘든 작업이다.  60시간이나 100시간 연수 듣는 것 못지 않다. 

내가 속한 지회는 서울지역에서 가장 교육운동이 취약한 지역이자 교육노동운동의 무풍지대이다. 그 이유는 사립학교가 태반이고 공립학교는 요즘 들어 늘어났지 예전엔 드물었기 때문이다. 교육운동이나 교사노동운동이 사립학교에서 고개를 들긴 어렵다. 특별히 튼튼한 내부 소모임을 갖지 않는 한, 사립학교에선 대체로 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생계를 의식하며 입시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교사들 일상적인 모습이다.

2020년  6월 23일 <서라벌고 보복성 징계 철회 촉구! 교육공공성 보장! 기자회견>(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2020년 6월 23일 <서라벌고 보복성 징계 철회 촉구! 교육공공성 보장! 기자회견>(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하나고나 충암고, 동구마케팅고, 그리고 9시 뉴스를 탔던 서라벌고 등 비리 사학들에 맞서서 양심선언을 하면 왕따를 당한다. 운명을 같이 하지 않는 한,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료교사들조차 거리를 두는 게 일상이다. 마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때 박창진 사무장처럼 동료들이 인사도 없이 개 닭 보듯 그렇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게 좀스러운 우리 한국 사회 자화상이다.

2015년 6월에 열린 동구마케팅고 비리를 폭로하며 양심선언 한 <안종훈 교사 복직을 촉구하는 집회> 장면(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2015년 6월에 열린 동구마케팅고 비리를 폭로하며 양심선언 한 <안종훈 교사 복직을 촉구하는 집회> 장면(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아무튼 그런 탓에 무려 3년 동안 지회장을 세우질 못한 곳이 우리 지역 현실이었다. 3년 동안 운동의 책임단위가 없었던 지역이다. 그 이전에도 유명무실하게 조직 활동이 잠들어 있던 낙후된 지역이었다. 운동에 관심 있는 교사들에겐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명퇴를 생각할 그 나이에 그 선생님은 스스로 지회장을 자처해 전교조 서울지부 집행위원으로서 중책을 떠맡았다. 교육노동운동의 노선은 나와 결이 다르지만 나는 그런 선생님을 한없이 존경한다. 역사는 그런 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한 걸음씩 전진해 왔으니까!

그러나 차등성과금의 경우 전교조 연수는 고려대상도 아니다. 물론 전교조도 자체적으로 학점이 인정되는 직무연수를 수행한다. 그러나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런 연수에 연연해하겠는가! 아무튼 교육부에서 요구하는 연수를 받지 않으면 점수가 없다. 담임을 해도 B급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학교도 3년 전엔 차등성과급 점수에서 담임을 홀대했던 형편이라 그러했다. 내가 아는 어느 교사는 전교조와 아무 상관없는 교사이자 교사들에게 매일 보이차를 끓여주던 넉넉한 분이었다. 그 교사는 우리학교에서 5년 내내 담임을 맡았음에도 5년 내내 B급 교사였다. 그 배신감을 나는 이해가 된다. 그 선생님이 어느 날 분노를 담아 그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학교에 남아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기는 사람이야!”

그렇게 그 선생님은 우리학교를 떠났다. B급 교사! 그건 겪어본 교사들은 공감할 것이다. 누구는 차등성과급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교사들이 있을 수 있지만 절대 다수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만 학교현실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S급 교사, A급 교사, B급 교사로 나누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거기다 교육활동의 성과금이라며 한우 등급 매기듯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겨 차등지급하는 것은 교사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권위주의 교육행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의 교사를 조금이라도 존중하는 행정이라면 감히 그렇게 할 순 없는 것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해 보겠다. 내가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을 언제든 기다리고 또한 환영한다. 쿨메신저는 그런 소통의 도구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쿨메신저를 통해 교사 개인의 교육자적 관점이나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글들을 거의 보질 못했다. 교육자로서 생각을 나누고 공론화하는 것조차 힘든 학교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 그러면 반론을 기대하면서 차등성과급제도가 왜 문제가 큰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보겠다.

첫째, 차등성과금은 교사의 영혼을 잠식시키고 혼란스럽게 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차등성과금 현실에 무감하게 지내다보면 어느 날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돈으로 교육활동을 촉진하고 돈으로 교사들을 견인할 수 있다는 그 생각 자체가 얼마나 좁직한 사고인지 이 땅의 교육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학교는 상품을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다. 더더욱 교사는 입시기술자도 아니다. 교육을 그런 차원으로 논해선 안 된다. 교육은 가치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교사는 그 중심에 서 있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표현대로 <성직>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육은 신성한 정신노동임에 틀림없다.

2018년 11월 28일  세종시 인사혁신처 앞에서 열린 <반교육적 교원성과급 즉각 폐지 촉구> 기자회견(출처 :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2018년 11월 28일 세종시 인사혁신처 앞에서 열린 <반교육적 교원성과급 즉각 폐지 촉구> 기자회견 장면(출처 :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아무리 신자유주의 학교정책이 학교현장을 쓰나미처럼 덮쳤어도 차등성과금제도는 교육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의 정신활동, 바로 영혼과 직결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혼을 돌보고 아이들 정신을 이끌어 주며 잠재된 재능을 발견하게 하는 교사들을 돈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분노와 자괴감이 드는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생각건대 차등성과금은 평범한 교사의 사기를 꺾을 뿐 아니라 교육의 개념을 왜곡시킨다. 나아가 교육공동체를 전방위적으로 분열시키는 반교육적인 행정이자 교육적폐이다.

웃픈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경기도 어느 초등학교 풍경이다. 교과전담제는 담임교사보다 편하다. 그러다 보니 예전엔 교과전담교사를 서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교사들이 교과전담제 교사를 하지 않고 담임업무를 자청한다고 한다. 차등성과금을 의식한 탓이다.

이게 왜 웃픈 현실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 교육자로서 행복한 선생님이 되는 아름다운 꿈과 교육활동을 통해 사회변혁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곳에 교사로서 보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세속적인 이익이 우리 교육현실을 압도한다 할지라도  그 초등학교 낯선 풍경은 신자유주의 학교정책이 낳은 또 다른 씁쓸한 장면이다. 잘못된 정책 앞에 사익을 추구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기보다 교육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정책에 저항해야 한다. 그게 이 시대 교사다운 자세이자 교육자로서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 백번 양보하여 현행 성과금 차등 지급 기준을 이해한다손치더라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준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교육자로서 교육활동의 중핵인 <학생상담>에 대한 평가기준이 전무한 실정이다.

상담의 질은 둘째 치고 학생과 상담을 몇 번 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학생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고민을 들어주었는지에 대한 기준은 하나도 없다. 정말로 현행 차등성과금 제도가 옳다고 강변하려 한다면 적어도 학생 상담횟수를 정량화하여 평가기준으로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성평가가 어렵다면 정량평가라도 해야 평가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그에 대한 고민이 없다. 고민이 있어도 잘 관철되지도 않는다.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담임 점수를 세분화하라고 문제를 제기했었다. 담임도 문과 담임인지 이과담임인지 구분해야 하고 문과도 여학생반인지 남학생반인지 구분해서 평가 기준 점수를 달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공식회의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지금은 남녀 혼반이지만 3년 전에는 남녀 분반이었다. 이과반 담임도 <담임>이니까 힘들지만 <문과반 담임>, 그것도 40명이나 되는 남학생반 담임을 맡아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징글징글한 넘들, 상처받은 아이들, 순하디 순한 아이들, 입시공부에 열중하는 극소수 몇몇 아이들, 무기력하게 잠만 자는 아이들, 담임교사에게조차 대들며 소란을 떠는 아이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병적인 아이들, 교육활동이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는 단절된 관계와 절망감을 느껴본 분들은 그 장면이 상상이 될 것이다.

교사들이 보통 명퇴를 하는 이유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아이들만 가정에서,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받는 게 아니다. 교사들도 무방비 상태로 아이들에게 상처 받는다. 그것도 셀 수 없이! 그 상처를 누가 보듬어 주고 상처받은 그 교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서글픔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정말로 교사평가, 차등성과금제도가 학교현장에 꼭 필요하다고 강변하려면 세밀한 평가기준을 세우진 못할지언정 문과반 담임교사의 고충을 충분히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 교사들은 학교에서 충돌하는 것을 피한다. 그냥 <내가 손해 보고 말지> 하는 그런 착하고 순한 마음으로 문제를 문제 아닌 것으로 참고 지낸다. 나는 그분들의 정신적 격무를 헤아리는 학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남녀혼반이 되면서 그런 부분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문과반 담임>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순 있다. 그러나 3년 전 어느 노교사가 학급을 정할 때 이과반을 먼저 맡게 해달라고 하는 사전 요청을 했다. 그 때  나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2015년 4월 9일  특목고 폐지를 위한 국회토론회 장면(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2015년 4월 9일 특목고 폐지를 위한 국회토론회 장면(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특히 2010년 공정택이 저지른 학교선택제가 전면화하면서 서울 일반 인문계 고교는 10년 넘게 지속적으로 무너져갔다. 그 무너져내려가는 현실에서 제도권 주류 언론들은 <교실붕괴>니 <학교붕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일선교사들이 상처투성이로 받아 안았다. 요즘 들어서야 전교조가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고 학생인권 못지않게 교사의 교권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런 배경을 안고 있다.

그런 모습은 2000년 노무현 정부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  여러 줄 세우기 교육정책을 선언했을 때와 너무도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당시  그들 주류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한 목소리로 <교실 붕괴>와 <학교붕괴>를 떠벌리며 금방이라도 학교가 거덜날 것처럼 기사화했다. 

차등성과금에 연동되는 연수 점수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 연수만 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교육자로서 성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현장 교육에 깊이 천착하여 현장 연구논문을 쓴다면 마땅히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술지에 등재 후보로 올라간 논문을 써도 그런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평가 기준으로 고려해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이미 차등성과금이라는 잘못된 제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제도는 고쳐야 할 대상이지 순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법과 제도에 대한 존경심보다 인간 내면의 소리, 바로 양심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는 게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시민불복종운동의 상징적 선구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한 말이다. 영어교사들은 대학시절,  익히 학습한 인물이자 모두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교사들마다 평가의 세밀한 기준을 다시 요구하는 순간, 평가 기준은 더욱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인간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어떤 선생님이 수업연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량화된 주당 수업 시수가 평가기준으로 들어간 것은 차등성과금을 강행하기는 해야겠고 그런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일 뿐이다.

백번 양보하여 겉으로 드러난 수업시수만을 갖고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자신의 전공인 실수업시수가 우리학교는 편차가 큰 편이다. 어떤 교과는 평균 13시간을 하고 어떤 교과는 18시간을 한다. 아무리 교육창체를 함으로써 명목상 평균 수업시수를 맞춘다고 하더라도 공정하지 않다. 전공 교과 수업과 외부강사가 수업을 주도하는 교육창체는 노동강도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평가 기준에 대한 문제를 하나씩 제기해나간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활동은 아이들 영혼을 돌보는 정신영역이자 정신노동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교사가 얼마나 열심히 수업연구를 하고 수업설계를 구상하여 제대로 진행했는지, 그리고 아이들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 교육적 성과는 어떠한지 객관적으로 확인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육활동의 성과는 단기간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올해 교육부에서 동료평가를 페지하겠다고 한다. 환영할 일이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대부분 학교에서 교육활동의 양대 산맥인 <수업 연구/교수-학습의 실제활동>과 <학생상담>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고 않다. 우리 교사들이 현실의 이익에 포획돼 교육자로서 ‘교육의 관점’이라는 혜안을 잃어버리고 비즈니스의 관점에 매몰돼 버린다면 그 순간 학교공동체는 사라져 버린다. 존재해도 교육력은 미약할 것이다. 모두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양파껍질 같은 사회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교육은 현행처럼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상호협력과 배려> 속에 결실을 거두는 정신영역이다. <경쟁의 논리>가 학교사회를 지배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협력과 배려>가 교육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고 지탱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가 우리 교사들에겐 주어져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교사들이 서로 협력하고 돕지 않는 교육활동은 학교 어느 곳에도 없다. 크든 작든 다른 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가 교육자로서 바로 설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핀란드 교육개혁이 성공한 가장 근본적 요인은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한 무한한 <사회적 신뢰>에 있다. 교사에 대한 장학감사제도를 전면 폐지했음에도 교사 스스로 연구하고 자율적으로 연수에 참가하는 비율은 거의 100%에 이른다. 끊임없이 교사들은 연구하고 아이들과 소통한다. 그게 핀란드 교육개혁의 요체이다.

아이들은 학교를 자기 성장을 경험하는 <행복발전소>로 인식한다. 우리 한국 사회도 그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 교사들이 핀란드 교사들보다 못할 게 무엇인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 주변에 연구하고 노력하고 작품을 쓰고 조용히 아이들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존경 받을 만한 교사들을 나는 자주, 그리고 아주 많이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난 해 직업반 담임이 되면서 3년 전보다 업무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진로지원부 기획과 대안 위탁교육 업무를 맡는 분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올해 B급을 면해 A급 교사가 되었다. 업무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에도 A급 교사가 된 지금 나는 여전히 당황스럽고 허탈하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작년보다 업무 강도나 업무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등급이 올라갔다. 한우 등급 판정하는 것도 아니고! 함부로 S급 교사, A급 교사, B급 교사 등급을 매기고 딱지를 붙이는 현실! 이젠 멈춰야 한다. 진정으로 교사를 존중한다면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요청한 대로 차등성과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더구나 바이러스 위기 상황 아닌가!

정말로 현행 평가기준을 적용하려면 모든 교사의 업무 강도를 세밀하게 측정해서 공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학교 현장에 차등성과금을 강제하여 그에 저항하는 교사들을 징계로 겁박한 교육행정 자체가 반교육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돈으로 교사들 영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 그 천박함에 나는 지금도 소스라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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