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메이데이>는 8시간만 일하게 해달라는 미국 시카고 노동자 집회에서 비롯되었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위해 파업을 단행했다. 공장 굴뚝 연기가 소멸되고 공장의 기계소리가 사라졌다. 망치질을 멈추고 거리의 상점들조차 철시하였으며 버스 운행도 멈춰서버렸다. 시가지 전체가 멈춰선 듯 노동자 총파업이 세상을 멈춰 세운 것이다.

8시간 노동 법제화는 이미 제1인터내셔널(1864) 당시, 마르크스가 강령으로 주장한 내용이다. 당시 19세기 노동자계층은 평균 수명이 20세에 미치질 못했다. 영국 신흥공업도시 리버풀 노동자들 평균 수명이 15세였으니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c 영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성인노동을 여성노동으로 대체했고 다시 어린이노동으로 대체, 확산시켰다. 성인 노동자 1명을 쓰는 대신 여성노동자나 소년 노동자를 여러 명 고용함으로써 노동계급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1주일에 6~8실링의 임금을 받는 13세 소녀 3명은 18~45실링의 임금을 받는 성인 1명을 대신했기 때문이다.(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 정치경제학 비판』제1권 하. 비봉. 2003. 530쪽 재인용)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가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 .(출처 : 김수행의 <자본론>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상가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 .(출처 : 김수행의 <자본론>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결국 자본의 거대한 횡포 속에 숱한 노동자의 인간성은 왜곡되었다. 이는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청년 마르크스가 소외이론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주일학교(Sunday School)가 등장한 것도 19세기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교회가 관심을 보인 결과였다. 6-7살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학교로 가는 게 아니었다. 그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나가 14시간씩 노동하던 게 당시 노동계급 자녀들이 처한 비참한 실상이었다.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노동계급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는 마르크스의 절친이자 혁명동지였다. (출처 : 김수행의 <자본론>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노동계급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는 마르크스의 절친이자 혁명동지였다. (출처 : 김수행의 <자본론>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마르크스의 절친 엥겔스(F. Engels)는 1845년에 쓴 논문,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영국 노동자들이 처한 당시 생활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가 받는 쥐꼬리 만한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여 젖먹이 엄마마저 일터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남은 아이는 온 종일 울어도 젖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온 종일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엄마들 사이에선 어린 아이가 우는 것을 우선 막기 위하여 아편을 넣은 약(팅크)을 먹이는 것이 유행했을 정도이다. 이것을 먹이면 위가 마비되므로 어린 아이가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해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을 먹이면 체질이 약화되어 어린 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이들은 6-7세가 되면 공장이나 탄광으로 일터를 찾아 나가야만 했다. 특히 탄광의 갱도에서는 말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혁대로 자기 몸과 석탄 상자 네다섯 개를 묶어 수레를 끌어내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속에서 중노동으로 시달리게 되니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형적인 신체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구루병에 걸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초등학교도 못가고 바로 공장에 들어가 어른들 틈에 끼어 밤늦게까지 기계 옆에서 씨름하게 되니 몸이 망치게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정상적인 발달이 불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영국의회에서는 어린이 노동문제가 종종 의제로 다뤄지곤 했다. 1866년 의회 「어린이노동위원회」 제5차 보고서에서는 어린이 노동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번 법안을 통해)...유년기의 과도노동이 자라고 있는 세대들의 신체를 파괴하며 그들을 일찍 늙어버리도록 하는 것을 방지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것은 적어도 13세 미만의 어린이에게는 초등교육의 기회를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지(無知)를 종식시킬 것이다.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는 보조위원회의 보고에 충실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을 비통한 감정과 매우 깊은 국민적 굴욕감 없이는 볼 수가 없다.”

실제로 19c 말 미국 자본주의 발달이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의 풍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본가들은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었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 심지어 자신들이 키우는 강아지 목에 15,000 달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걸어주며 부도덕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 하층 노동자들은 30달러 임금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그것도 구질구질하고 허름한 월세 방에다 매달 10 - 15달러씩 지불하면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오늘날 여성들 파머 머리가 생겨난 것도 미국 노동계급이 처한 비참한 생활상과 관련이 깊다. 14-16시간 동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여성들의 긴 머리카락이 종종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 것을 강요했다. 짧게 자른 자신의 머리 모양이 보기 싫었던 미국 여성노동자들은 머리를 볶아 올렸다. 오늘날은 남성도 파머를 하지만 파마 머리에는 미국 자본주의 발달의 슬픈 역사가 배어 있다.

무엇보다 파리코뮌(1871)을 전후로 근대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한 상태여서 경쟁적으로 해외 식민지 쟁탈전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따라서 국가권력과 독점자본은 한 몸이 되어 국내 노동운동을 탄압했고 대외적으론 제국주의 열강이 되어 약소국을 침략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따라서 8시간 노동을 법제화하는 것은 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을 요구했다.

프랑스 혁명(1789)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등장한 제2 인터내셔널은 시카고 노동자들이 투쟁한 <5월 1일>을 기념해 8시간 노동 법제화에 불을 지폈다. 5월 1일을 기념해 "기계를 멈추자,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을 조직하자,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노동자의 권리 쟁취를 위해 동맹파업을 결행하자"는 세 가지 결의를 전 세계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통해 실천하는 날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1890년부터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지정해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시카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을 상기시켰다.

한국 사회에서 <메이데이>는 일제강점기 1923년에 최초로 기념식을 거행했다.「조선노동 총연맹 」주최로 2,000 명 정도가 기독청년회관에 모여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실업방지’를 외쳤다. 삼엄한 일본제국 경찰의 탄압을 뚫고 양화 직공조합과 반도 고무공장, 서울 양말공장 등은 파업을 감행함으로써 전 세계 노동자들과 공동 투쟁에 동참했다.

해방 후엔「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주최로 20만 명(1946), 30만 명(1947)이 모여 <메이데이>를 기념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메이데이> 기념일조차 공산당의 선전도구로 이용된다는 구실로 관변 어용노조인 대한노총(현재 한국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노동절>을 변경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술 더 떠 껍데기만 남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명칭조차 바꿔버렸다. 교활하고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5월 1일 <메이데이>가 3월 10일 <근로자의 날>로 날짜와 명칭이 모두 바뀐 것이다.

 

상암동 월드컵 공원 근처에 건립된 박정희 기념관 (출처 : 하성환)
상암동 월드컵 공원 근처에 건립된 박정희 기념관 (출처 : 하성환)

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사회부문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기념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21c 들어서도 5월 1일의 공식적인 이름은 박정희 군사정권 때 만든 ‘근로자의 날’이다. 미국은 21c 들어 5월 1일이 사회주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9월 첫째 주 월요일로 기념일을 바꿔버렸다.

오늘날 8시간 노동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이미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를 비롯해 북서유럽 노동선진국은 6시간 노동을 법으로 정해 시행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도 6시간 노동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1,967시간이다. 반면에 노동선진국의 경우 독일(1,386시간), 덴마크(1,380시간), 노르웨이(1,384시간), 스웨덴(1,452시간)이다. 대한민국은 우리보다 가난한 체코(1,788시간)보다도 많다.

왜 8시간 노동이 필요한지 135년 전 8시간 노동을 위해 투쟁하다 처형된 미국 노동운동가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우리도 8시간은 일하고 8시간은 잠을 자고 8시간은 남들처럼 휴식을 취하면서 가족과 함께 햇볕을 쬐며 살고 싶다네.”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요구임에도 인류 역사는 수많은 희생 끝에 한 걸음씩 전진해 왔다.

<메이데이>는 노동자의 날이기도 하지만 8시간 노동을 법제화하기 위해 130년 전 투쟁했던 노동운동을 기리는 전 세계 노동자 기념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노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되새기고 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을 확인하며 노동자의 권익과 단결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날이다.

 

메이데이가 있는 오월, 전교조 창립을 기념하며 열린 전교조 집회 장면(출처 : 하성환)
메이데이가 있는 오월, 전교조 창립을 기념하며 열린 전교조 집회 장면(출처 : 하성환)

노예근성으로 살기보다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 사회발전의 주인공이자 전진하는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날이 <메이데이>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한 나라일수록 민주주의 지수가 높고 복지국가로서 위상 또한 매우 높다. <메이데이>는 노동자 스스로 ‘역사의 주체’라는 자각과 함께‘주체적 시민’으로 스스로 우뚝 서는 날이자 약자들과 연대하는 ‘연대적 시민성’을 발휘하는 날이기도 하다.

시카고 노동운동가 오거스트 스파이스의 법정 최후 진술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연대적 시민성’을 되새기게 한다.

“만약 너희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너희는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너희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사면팔방에서 불꽃은 끊이지 않고 들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누구도 그 들불을 끄진 못할 것이다.(이하 생략)”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교수대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확신에 찬 신념으로 끝냈다. “언젠가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를 목매다는 당신들의 사형 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는 독점자본가와 결탁한 국가권력에 의해 형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그렇지만 135년이 지난 오늘날 스파이즈의 신념은 ‘연대적 시민성’으로 부활하여 전 세계 노동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1871년 파리코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직접 통치주체로 등장한 사건이다.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까지 정부군을 물리치고 72일간 프랑스 수도 파리를 직접 통치했다. 마르크스와 레닌 등 코뮤니스트들은 <파리코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고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분석하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코뮤니스트들과 달리 우리가 <파리코뮌>을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은 민중 스스로 자치정부를 구성했다는 데 있다. 특히 파리코뮌은 직접민주주의를 관철시킨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 그리고 희생 속에 유지되었다. 파리코뮌이 내세운 정책으로 특기할 만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린이 야간노동을 금지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을 추구했다. 나아가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돼 세속화된 정치와 교육을 지향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대한 노동자의 관리를 옹호하고 노동자의 최저생활을 보장했다. 그리고 민중에게 부과된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의 폐기를 통해 민중의 삶을 구제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150년 전 당시로선 급진적인 것을 넘어서서 혁명적인 변혁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3월 26일 직접 선거를 통해 3월 28일 <파리코뮌>을 선언하자 꽃과 음악으로 축제를 벌이며 축하했다. 수많은 군중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각양각색의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했다. 파리 시민들은 루이 18세의 속죄예배당을 파괴하고 길로틴 처형대를 불태웠으며 나폴레옹 동상을 파괴했다. 낡은 상징물을 파괴하는 것도 민중 축제의 한 부분이자 코뮌을 건설한 혁명의식이었다. 사회 질서 내 낡은 규제가 혁파되고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민중의 벗』, 『뻬르 뒤쉐느』등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떠올리는 다양한 민중 신문들이 등장했다.

거리마다 민중 클럽이 생겨나고 생기가 돌았다. 파리 시민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 속에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예술가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와 해방의 기쁨을 예술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가장 애창되었던 샹송은 끌레망이 만든 「사랑이 익어갈 무렵」으로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사랑’은 ‘코뮌의 축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애조를 띤 쓸쓸한 연가 풍 노래이다.

무엇보다 <파리코뮌> 당시 시민들의 자발성과 헌신, 그리고 희생은 ‘피의 주간’에 도드라졌다. 5월 21일 베르사이유 정부군과 프로이센 등 외세의 총공세와 학살에 맞서 파리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맞서 싸웠다. ‘피의 주간’으로 불리는 5월 21일부터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된 5월 28일 오후까지 파리 시민들은 민중자치기구인 코뮌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정부군과 시민군 간 치열하게 공방전이 전개되는 포화 속에서 파리 시내 여성들은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5월 23일 몽마르뜨르에선 백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바리케이드를 사수하다 모두 전멸했다.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 시 동쪽지역의 퇴로를 막아버리자 코뮌 시민군은 정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그날이 5월 26일이었다.

27일엔 비가 내리는 속에서 치열하게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수세에 몰린 시민군들은 성벽에 줄지어 선 채 집단 학살되었다. 이튿날 오후 2시 시민군이 쏜 최후의 총성이 들렸고 파리코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피의 주간’동안 정부군 사망자가 877명인데 반해 코뮌을 지키려던 시민군과 시민들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강물엔 시신들로 가득했다. 정부군에 체포돼 투옥된 시민들도 43,522명에 달했다. 그만큼 파리코뮌이 진압당하는 과정은 참혹하고 처참했다.

사상자 숫자에선 파리코뮌에 미치지 못하지만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은 파리코뮌을 능가할 정도로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파리코뮌>처럼 참혹하고 처참하게 짓밟혔다.

 

5월 광주항쟁 당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폭행하는 장면(사진 출처 : 5,18 기념재단 제공)
5월 광주항쟁 당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폭행하는 장면(사진 출처 : 5,18 기념재단 제공)

5월 21일 수요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그러나 ‘피의 수요일’이 돼버렸다. 그날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를 자행해 광주 시민들을 수백 명을 살상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무장하면서 시민군이 탄생하였다. 시민군의 등장과 함께 전두환 공수부대는 시 외각으로 퇴각했다. 공수부대를 물리친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무장을 한 채 시민군으로 시내와 시 외곽 치안활동을 펼쳤다.

항쟁 기간 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5,000정 넘게 탈취해 무장하였음에도 단 한 건의 살인 사건이나 강력범죄가 없었다. 은행, 금은방, 백화점 어느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성(citizenship), 바로 도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총상을 입은 시민들과 시민군을 위해 이름도 없는 풀꽃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헌혈을 자청했다. 헌혈을 위해 수백 미터 긴 줄 뒤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황금동 사창가 창녀들마저 울면서『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하소연할 정도로 공동체 광주는 ‘대동사회’로 하나 된 아름다운 도시였다.

총기류가 5,000 정 넘게 풀렸음에도 광주 민중 항쟁 열흘 동안 은행 강도를 비롯해 강력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게다가 가게나 슈퍼마켓에선 매점매석과 사재기조차 한 건도 없었다. 그 정도로 광주 시민들은 연대의식과 공동체성으로 똘똘 뭉친 높은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시민군들이 치안활동으로 밤새워 시내를 순찰할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자발적으로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시민군에게 날라다 주면서 수건으로 친 자식을 대하듯 시민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황석영,『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년)

가게나 약국에선 시민군 트럭이나 순찰차량에 음료수와 드링크제를 상자 채 올려주었다. 공수부대가 자행한 학살 만행에 쓰러진 총상자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한 시민들도 있었다.(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광주 오월 민중항쟁 사료전집』) 병원복도까지 즐비한 부상자를 헌신적으로 돌본 의사와 간호사들의 희생 또한 컸다. 그리고 M16소총에 짓뭉개져 핏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던 여공들, 가족들이 충격 받지 않도록 원래 모습대로 시신을 깨끗이 닦아 주며 양말을 신겨주던 여고생들도 있었다. 시장 길바닥에 솥을 걸어 놓고 밥을 지어 시민군을 먹이던 이름 모를 동네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계엄군의 헬기 사격 등 5월 광주항쟁 기간 학살된 시민들(사진자료 : 한겨레 신문)
계엄군의 헬기 사격 등 5월 광주항쟁 기간 학살된 시민들(사진자료 : 한겨레 신문)

술집 아가씨, 다방 아가씨들도 광주 민중 항쟁에 참여했다. 피로 얼룩져 참혹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하나하나 물로 깨끗이 씻어 주고 깨끗한 양말을 신겨 주는 걸 자처했다. 수많은 여고생들과 여공들이 전남 도청을 드나들던 수백 수천 명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주었다. 광주 시민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아픔과 고통,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었다. 이 모두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해방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드높은 연대의식이자 고귀한 인간성의 발로였다.

 

광주 민중 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무릎 꿇린 채  구타당하고 끌려가는 시민군들 모습을 조형물로 형상화한 광주 시내  전시공간(출처 : 하성환)
광주 민중 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무릎 꿇린 채  구타당하고 끌려가는 시민군들 모습을 조형물로 형상화한 광주 시내  전시공간(출처 : 하성환)

해방 광주! 아름다운 도덕공동체! <광주 코뮌>을 이끌어 낸 실질적인 주역들 또한 이 풀꽃 시민들이었다. 1980년 5월 18일 ~ 27일 항쟁 10일 동안 계엄군에 맞서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활약하다 사살되고 부상당하며 구속된 분들 가운데 60%가 넘는 사람들이 영세한 중소기업 저임금 노동자들과 보일러공, 식당종업원, 노점상, 행상, 택시운전사, 미장공, 도시빈민, 농민이었다.(민주언론운동협의회,「5월 항쟁의 주역은 누구인가」『말』1988년 5월호. 21쪽.)

항쟁 기간 광주는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파리 코뮌> 이상으로 광주항쟁 10일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를 건설해 내었다. 지구상 어느 도시에서 이런 모습을 연출해 낼 수 있겠는가! 세계 역사 속 어느 나라와 어느 도시에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창조해 낼 수 있었겠는가! 높은 ‘시민성’(citizenship)을 발휘함으로써 강한 연대의식을 보여준 광주 민중 항쟁은 세계사에 빛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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