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율과 존중, 주권자 의식과 연대 의식을 길러주는 민주시민교육이 절실하다

제주 4.3 평화공원(출처 : 4.19혁명기념관)
제주 4.3 평화공원(출처 : 4.19혁명기념관)

1.

‘4‧3항쟁’을 과거 군사정권시절까진 ‘4‧3공산폭동’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은 학계에도 민주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왜곡된 역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은폐된 사실이 빛으로 되살아났다. 87년 6월 항쟁 이후 ‘4‧3공산폭동’이 ‘4‧3사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은 여전히 ‘폭동’의 성격이었다. 90년대 내내 그러했다.

6차 교육과정(1992)에 기술된 한국사 용어를 변경하기 위해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는 1994년 ‘4‧3사건’을 ‘4‧3항쟁’ 으로 표현했다. 1997년 7차 교육과정 개정을 앞두고 교육부에서 의뢰한「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연구보고서 시안이었다.

그러나 언론에 그 사실이 알려지고 정치권으로 비화되면서 서중석 교수는 곤욕을 치렀다. 일명 1994년 「준거안」 파동이다. 당시 서중석 교수는 우리나라 근현대민족운동사를 최초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현대사 1호 박사이자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1999년 12월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4‧3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4‧3학살’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지난 뒤였다.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땐 「4‧3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식 채택되었다. 그리고 2005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 해방 직후 분단으로 치닫던 시절, 분단세력에 맞서 싸운 제주도민의 항쟁이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미군정의 비호 하에 이승만 정권에서 자행된 학살 참상이 정부의 공식조사보고서로 인정된 것이다. 그해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이었음을 최초로 사과했다. 사실 ‘4‧3항쟁’은 해방 직후 분단세력에 맞서 싸우며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열망한 제주도민의 전도민적 항쟁이었다.

1972년 유신 정권이 들어서고 1973년 3차 교육과정이 개정되었다. ‘4‧3공산폭동’으로 기술됐고 이는 1981년 4차 교육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에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대중의 의식을 지배했고 ‘공산분자들이 저지른 만행’으로만 기억돼 왔다. 그러나 ‘4‧3항쟁’(1948)은 그보다 1년 전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촉발된 저항의 연장이었다.

28주년을 맞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제주읍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당시 제주읍과 조천면, 애월면 주민 3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집회 열기가 뜨거웠다.  집회 이후  주민들은 관덕정에서 친일경찰의 악행과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는 시위로 번졌다.  시위대는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와 <통일된 조국 독립 쟁취>를 촉구하며 관덕정에서 제주도립병원 앞으로 진출했다. 진압과정에서 친일경찰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6명이 즉사하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3월 10일 학교 교사, 관공서 공무원, 노동자, 심지어 제주도 출신 일부 경찰까지 참여하는 도민 전체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했다.

3월 13일에 총파업은 제주 전역으로 확산돼 166개 기관, 41,211명이 참가한 거대한 저항의 불길로 번졌다. 당황한 미군정 당국은 제주 도민들의 저항을 총칼로 무참히 진압했다. 그리고 육지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불러들였다. 이승만과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를 미군정 당국이 명명한 ‘붉은 섬’(red Island)이라 되뇌며 서청 출신 경찰들을 대한민국을 지키는 1등 공신으로 치켜세웠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 경찰발포를 정당방위였다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심지어 “제주도 섬 전체를 불살라 20만 도민 전체를 죽여도 좋다”는 막말까지 내지르며 학살과 탄압을 조장했다.

결국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미군정과 친일경찰의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1년 동안 제주도민 2,500명을 연행해 극심한 고문을 자행했다. 제주도 각 경찰서 유치장은 초만원이었다. 당시 미군 감찰반은 “제주 경찰서 각 유치장은 최악”의 상황이라며 “3.3평 감방 안에 35명이 수감돼 있다”고 보고서에 적을 정도였다.

더구나 ‘4‧3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한 달 전에 ‘빨갱이’ 혐의로 끌려간 청년 3명이 친일경찰이 자행한 극악한 고문 와중에 잇달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민심은 흉흉해질 대로 흉흉해졌고 제주도 섬 전체가 팽팽한 긴장 상태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의 횡포와 고문 만행은 계속되었고 제주도민들은 뒤집힌 현실에 치를 떨었다. 더구나 그들을 비호한 미군정의 실정은 성토대상이었다. 해방 직후 과거사 청산이 실패하고 암울한 현실이 지속되자 제주도민들은 분노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친일경찰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기세등등했다.

해방과 동시에 일본 등 외지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제주 지식인들과 깨인 민중들은 그런 뒤집힌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해방 공간 제주 지식인들의 지적 수준은 당대 한국 사회 전체를 통틀어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제주 4.3평화기념관(출처 : 4.19혁명기념관)
제주 4.3평화기념관(출처 : 4.19혁명기념관)

제주 지식인들과 깨인 민중들은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은커녕 분단으로 치닫던 현실 앞에 그들 분단세력이 저지른 잔혹한 고문과 탄압에 분노했고 저항했다. 그런 의미에서 ‘4‧3항쟁’은 친일 반민족 분단세력에 맞서 저항한 민족민중운동이었다.

따라서 항쟁에 참여한 제주도민들의 숭고한 희생은 ‘올바른 역사의식의 발로’이자 강고한 ‘시민의식과 연대의식의 발현’이었다. 무엇보다 제주도민들을 표적으로 자행한 집단 학살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저질러진 가장 참혹한 만행이자 세계사에 유례없는 제노사이드였다. 제주도민들의 ‘4‧3항쟁’이 전도민적 시민항쟁이자 민족민중항쟁인 이유이다.

 

2.

‘2014 0416!’ 세월호 참사는 한국교육을 근본부터 성찰하게 만든 비극이었다. 참사 당시 로이터 통신은 “한국교육이 안고 있는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참사의 한 요인이었다고 보도했다. 3층 일반 객실의 생존율이 70%를 넘는 것에 비해 더 안전한 위치에 있었던 4층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21%였기 때문이다.

파도가 선실을 넘실대고 선실 바닥에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명백히 위기상황임에도 “객실이 안전하니 안전한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무책임한 안내방송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침몰하는 장면 (2014. 04.16)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배가 좌현부터 바닷물에 잠기면서 위기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우현 쪽 2-7반, 8반, 9반 10반은 1명 또는 2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도 컸다.  
세월호 참사 당시 침몰하는 장면 (2014. 04.16)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배가 좌현부터 바닷물에 잠기면서 위기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우현 쪽 2-7반, 8반, 9반 10반은 1명 또는 2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도 컸다.  

참사 당시 세월호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우측 선실에 머물던 학급의 경우 위기의식에서 멀어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선실을 넘실대며 찰랑거리던 파도를 보면서도 탈출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대기한 것은 ‘순종’을 미덕으로 가르쳐온 한국교육에서 기인한다.

한 마디로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독립된 주체’로서 <‘자율성’을 길러주는 교육>의 부재가 낳은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부모님들 가운데엔 이렇게 탄식한 분도 계셨다. “선생님들 가운데 한 분만이라도 선실 밖으로 탈출하라고 이야기했더라면...”

사실, 세월호 참사 당시 교사들 생존율은 14%로 가장 희생이 컸다. 가장 안전한 5층 로열실에 머물던 여교사들은 아이들을 구하려고 4층으로, 그리고 다시 식당이 있던 3층으로 무작정 내려가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정작 자신들은 빠져 나오질 못했다. 여교사 모두 구명조끼조차 입질 못한 상태에서 처연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 고귀한 희생과 처연한 죽음 앞에 같은 교사로서 옷깃을 여미고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인솔책임자였던 교감 선생님은 황망하고 참담한 현실과 무거운 책임감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않았던가! 의리와 절개를 중시한 조선시대 북인계열 선비들처럼 ‘책임의식’을 통감한 결과였다. 결국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은 깊은 책임의식과 배려, 존중이라는 높은 ‘시민성’(citizenship)의 발로였다. 한 마디로 ‘공동체에 대한 연대감’이 한없이 발휘된 숭고한 죽음이었다.

반면에, 세월호 참사 당일 9시 45분 가장 먼저 팬티 차림으로 탈출한 선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했다. 만일에 선장이 학교교육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을 받고 존중과 배려, 그리고 협력과 연대의식이 삶 속에 체화된 분이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선내 방송을 통해 차례차례 아이들을 선실 밖으로 탈출시키지 않았을까! 타이타닉호 선장처럼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탈출하라’는 선내방송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팬티 차림으로 탈출하는 선장과 선원들 모습에서 우리는 일말의 책임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나아가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비극이자 자화상일 것이다.

9시 30분! 그리고 선장이 탈출하던 9시 45분! 그 시각에 아이들은 담임교사들 지시에 따라 모두 구명조끼를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나 저제나 질서정연하게 탈출하는 것만을 생각하며 두려움 속에 안내 방송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호 진상 규명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출처 : 4.16 기억저장소)
<세월호 진상 규명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출처 : 4.16 기억저장소)

실제로 법정 증언에서 방재전문가인 어느 대학 교수는 선장이 탈출하던 그 시각에 ‘선실 밖으로 탈출하라’는 안내방송만 제대로 했더라도 7분이면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가장 먼저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는 장면은 한 마디로 <책임감>이 실종된 모습이자 ‘민주시민교육’의 핵심인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동체성>이 사라진 비극적 장면이었다.

 

3.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은 중고교생 데모로 시작했다. ‘대구 2‧28데모’(1960)가 바로 그것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동원된 학생들 관제데모는 많았다. <북진통일 궐기대회>, <대한학도 반공궐기대회>, <이승만대통령 재출마 요청데모> 등 ‘결사반대’, ‘절대지지’를 외치는 데모들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1950년대를 통틀어 자주적인 학생데모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1948년 12월 12일 학생자치조직인 「민주학생연맹」관련자 199명을 검거한 뒤 강제 해체시킨 탓이다. 대신에 이승만 정권은 1949년 3월 8일 학도호국단을 전국적으로 설치해 학생들을 관제데모에 쉼 없이 동원하며 교육통제에 열을 올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호국단 총재이고 학도호국단 단장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구 2‧28데모’(1960)는 한국현대사를 뒤흔든 대사건이자 역사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 사건이다. 2018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대구를 찾아가 ‘대구 2‧28데모’를 기념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그런 연유이다. 대통령의 표현대로 ‘대구 2‧28데모’(1960)는 촛불시민혁명(2016-2017)의 시작인 셈이다.

실제로 4‧19혁명은 학생들이 주도한 학생혁명이었고 혁명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계층도 학생들이다. 정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희생된 186명 가운데 중고교생 희생자가 50명(26%)으로 가장 많은 것도 그러하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데모에 참여했고 희생자가 5명 발생했다.

당시 수송초등학교 강명희 양이 쓴 시「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는 당시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4‧19혁명 당시 경무대(지금 청와대) 앞과 종로, 을지로 거리 일대, 그리고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경찰들이 총을 난사하던 장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중략)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실제로 1960년 4월 19일 오후 내내 을지로, 종로 일대에선 경찰들이 경찰 지프차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거리를 누비면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듯이 <피는 길을 덮었고> 총상환자들로 서울시내 병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4월 19일 오후 경무대 진격 당시 총상을 입은 학생들이 경복궁 미술관 옆 뜰로 옮겨져 누워 있었다. 그 학생들 가운데엔 김치호 군(서울대 수학과3년)도 총상을 입은 채 누워 있었다.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응급차가 와 구호 차례가 돌아왔을 때 그는 주변에 쓰러진 어린 고교생 총상환자들에게 수차례 양보했다. 김치호 군은 하복부 총상으로 출혈이 심한 상태였음에도 자신을 구하러 온 군의관 김용규 대위에게 이렇게 애절하게 부탁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 아이들이 더 심각하니 먼저 데려가 주십시오”

병원 수술실 앞에서도 김치호 군은 수술 차례를 여러 번 양보했다. “저 어린 고교생부터 먼저 치료해 달라”며 수차례 양보했던 것이다. 화급을 다투는 시간에 김치호 군의 양보와 배려 앞에 그 군의관은 감동했다고 먼 훗날 술회했다. 그리고 늦은 저녁 수술을 받았지만 총상으로 간이 심하게 손상돼 새벽 6시 운명했다. 그는 조용한 청년이었고 화목함을 가져다 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4.19혁명 당일 경무대로 진격하던 김치호 군(서울대 수학과3년)은 총상을 입고 수술 차례를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수차례 양보했다. 그의 거룩한 죽음을 기려 서울대 캠퍼스에 세운 기념비에 그의 일기장  한 구절이 적혀 있다.(출처 : 하성환)
4.19혁명 당일 경무대로 진격하던 김치호 군(서울대 수학과3년)은 총상을 입고 수술 차례를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수차례 양보했다. 그의 거룩한 죽음을 기려 서울대 캠퍼스에 세운 기념비에 그의 일기장 한 구절이 적혀 있다.(출처 : 하성환)

그는 4월 19일 아침 일기에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고 썼다. 그 날 가회동  대문 앞에서 막내아들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배웅하던 아버지를 뒤로한 채 김치호 군은 대학로로 달려갔다.

대학로에서 연행돼 동대문경찰서에서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훈방됐다. 김치호 군은 풀려난 뒤 곧장 태평로 국회의사당(오늘날 서울시 의회 의사당)으로 달려갔다. 10만 명이 운집한 거대한 시위 행렬 속에서 김치호 군은 고교생들과 결사대를 만들어 경복궁 옆 도로를 따라 독재 권력의 심장부인 경무대로 진격해 들어갔던 것이다.

1960년 당시 강예섭 군(동북중학교 2학년)은 4월 혁명을 겪으면서 글을 남겼는데 한 편의 슬픈 시가 되었다.

“그 날은 바람이 몹시 불더니 형님과 누나들의 아우성이 거리와 골목을 휘몰아 갔습니다. 누나는 붙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 책가방에 돌멩이를 나르고 형님은 친구끼리 어깨를 걸고 박수와 총알 속을 지나갔습니다. 어른들은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우리가 지은 죄로 저 애들이 피를 흘린다>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바께쓰에 물을 퍼다가 목쉰 형님들의 목청을 적시며 어디까지고 울며 따라갔습니다. 빗발 같은 총알 속에 구두닦이가 쓰러지고 학생들은 피를 토하며 외쳤습니다. <자유를 달라! 정의는 이긴다>고. 참으로 용감하고 굳세게 그들은 죽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왜 그렇게 기쁘고 슬펐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내 옆에서 넘어진 동무의 탑도 서고 나라도 즐거워진다지만 아버지, 어머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 주세요. 길가에 나무들처럼 우리도 바르게 자라가게요.”

4할 사전투표, 완장부대, 3인조, 5인조, 9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삼성, 엘지, 한국타이어 등 수많은 재벌들로부터 70억 환에 이르는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이승만 정권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부산정치파동(1952), 사사오입개헌(1954) 등 헌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이승만! 그러나 국회의사당 내 동상 표지석에는 '의회정치발전의 초석을 놓으시고 의회민주주의 발전의 귀감이 된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글귀로 찬양, 미화돼 있다.(출처 : 하성환)
부산정치파동(1952), 사사오입개헌(1954) 등 헌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이승만! 그러나 국회의사당 내 동상 표지석에는 '의회정치발전의 초석을 놓으시고 의회민주주의 발전의 귀감이 된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글귀로 찬양, 미화돼 있다.(출처 : 하성환)

오로지 <반공> 이념 하나로 12년 철권통치를 자행하던 이승만 정권은 종막을 향해 치달았다. 1960년 당시는 60세만 넘겨도 환갑잔치를 하던 시절이었다. 늙은 독재자 이승만은 당시 86세였다.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 미국에서 수술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기에 이승만은 단독 선거로 이미 대통령이 당선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부통령 권력마저 거머쥐려고 온갖 부정선거와 관권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독재 권력의 수족이 된 경찰은 학생, 시민들을 향해 길거리에서 마구 발포했다. 당시 경찰서장(총경) 가운데 60%가 일제강점기 시절 순사 출신들이었다.

4월 19일 당일, 경무대로 향하는 종로구 통의동 길목을 지휘하던 서울시 경찰국장 유충렬은 ‘전 화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저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1시 30분 경무대 초입,  통의동 파출소에서 시위대 학생들을 향해 일제히 발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학생들은 경찰을 뚫고 진격해 효자동 1차 저지선을 돌파했다. 2차 저지선도 돌파한 시위학생들은 탈취한 소방차를 앞세우고 경사진 경무대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서울대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전경(출처 : 하성환)
 서울대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전경(출처 : 하성환)

오후 1시 경무대 앞 경찰의 카빈 소총과 헌병대 M1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청년학생들은 꽃잎처럼 스러져 갔다.  학생들은 총격이 시작되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파상공세를 펴면서 진격했고  그렇게 경무대 앞 총격은 5시까지 계속됐다. 이날 하루 동안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총에 맞아 숨졌다. 4월 19일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서울시 경찰 총책임자 유충렬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 순사부장 출신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거기다 경찰들은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 정치깡패들을 끌어와 권력의 개 노릇을 자처하게 했다. 4월 혁명 당일 극장으로 끌려 가 폭행 끝에 죽음에 이른 경기고 학생은 바로 그들 정치깡패들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불의가 저질러지고 국가 사회의 정의가 무너진 현실에서 학생, 시민들은 <반독재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권력의 총구 앞에 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4월 혁명에 참여한 것은 4‧18고대생 데모가 최초였다. 4월 19일엔 이화여대를 제외하고 건국대, 경희대, 성균관대, 국민대, 중앙대, 동국대, 연세대, 홍익대, 서울대 등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학생회 차원에서 대거 거리시위에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학생 80%가 참여할 정도로 정의로운 기풍은 거리에 충만했다.

당시 4월 혁명에 불참한 이화여대를 두고 이화여대에 딸을 보낸 어느 부모는 이렇게 장탄식하며 편지를 썼다. 가슴 뛰는 4월 혁명의 치열한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며 ‘시민성’(citizenship)을 이토록 유감없이 표현한 글은 없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인옥아! 사랑하는 내 딸아! (중략) 구태여 너의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4・19 데모에 나서지 않고 빠져버린 대학이라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짐작할 것이다. (중략) 너의 학교는 수십 년 역사를 가지고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며 수많은 현모양처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 낸 이름 높은 학교였다. (중략) 그러나 나는 완전히 할 말이 없게 된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신문이란 신문은 모조리 뒤지면서 행여나 내 딸의 학교 이름도 나오지 않나 하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중략)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 인옥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마침내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들 젊음 앞에 굴복을 하고만 그 시각에 나의 피를 받은 너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그 불덩어리들 속에 타오르는 심장의 핏빛이 네 피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중략)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네 젊음을 스스로 모독한 시대의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총탄에 쓰러진 아들 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 하나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깊고 크구나. 인옥아! 어서 뱃지를 떼고 교문을 나와 병원으로 달려가거라. 죄인과 같은 부끄러움과 겸손한 태도로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그 젊은 영웅들 앞에 네 피를 아낌없이 쏟아라. (중략) 결코 '부잣집 맏며느리감'을 만들기 위해서 너를 대학에 보낸 애비가 아니라는 것! 네가 잘 알 것이다. 이 찬란하고 장엄한 역사의 아침 앞에서 이렇게 흥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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