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박명진(朴明珍)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1947년생 우리 나이로 75세이다.

70 중반에 다시 황금기를 맞고 있는 여배우 윤여정. 그녀와 무대는 다르지만 박명진 선생님도 아직 꿈꾸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의 그윽한 눈빛에 빨려들어 70년을 스케치했다. 짧은 시간 실루엣만 접했지만 그 여인은 꿈 많은 문학소녀, 거친 시댁 문화와의 간극, 엄마로서의 애끓음, 여자라서 감내해야 할 것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이제는 감정의 들고남이 도드라지지 않아 오롯이 침잠되었다. 내공이 깃들었다. 그녀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존재는 단 하나.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살 백이 외손녀다. 너무 고운 할머니가 되었다. 아직 아름다운 박명진 선생님은 1·4후퇴 때 어머니 뱃속에서 전쟁 난리 통인 세상과 만났다. 그렇게 한 사람의 70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걸출한 신경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저서 한 대목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다운 삶을 위해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1·4후퇴 전쟁 난리 통에서 태어나다

아직도 문학소녀의 꿈을 놓지 않는 나는 박완서 박경리 씨를 흠모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창비’ 창간호부터 애독하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쌓았다. 꿈은 결혼에 묻혀버려 그날들은 그리움이 되었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말초신경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그 마음은 그 자리에 그대로이다.

나는 인천이 고향이다. 옥천이 낯설지 않은 것은 부모님이 피난을 충청도로 내려와서 아산에서 태어나서다. 1950년생, 예전 같으면 호호 할매 소리 듣던 나이인데 세월이 좋은 건지 하 수상한 건지 아직도 여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좋은 시절은 맞나보다. 엄마 뱃속에서 1·4후퇴를 보내며 명줄을 겨우 붙잡고 세상 구경을 했다. 함포사격을 뚫고 피난 다니면서 엄마는 엄마대로 매일 등줄기에 식은땀을 달고 살았다. 나는 나대로 뱃속에서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오갔다. 손바닥만 한 생명이 얼마나 놀랐을까.

■ “어머니가 나를 낳아놓았더니 너무 작고 애가 얼떴데. 포탄 속에서 매일 놀랐으니 오죽하겠어. 어찌 오래 못 살 거 같아서 윗목에 밀쳐놓았는데 그래도 꼬물거리며 살아내더라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그 말이 맞나봐

엄마도 총소리만 듣고 열 달을 보냈더니 젖이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젖도 안 나온다. 새끼 먹일 젖이 말라버렸으니 시절이 오죽했겠나. 그 틈에 다들 애타게 살아냈다. 약골이라 아가씨 시절에도 코스모스 같았다. 인천 자유공원 밑에 송월국민학교에 다니며 전쟁 직후라 천막 교실 찬 바닥에서 습기를 온몸으로 머금으며 공부를 했다. 그래도 글을 배우고 한 자 한 자 엮어서 문장을 만드는 재미에 눈망울은 반짝거렸다.

 

■ 마도로스였던 아버지

9남매로 태어났지만 전쟁 통에 몇이 죽고 남은 형제들은 부모님 사랑받으면서 곤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본디 논산 사람이었는데 조실부모하고 큰집에 살다가 선박기술을 배우고 마도로스가 되셨다. 마도로스 아버지의 부유한 혜택은 언니 오빠가 받았고 나는 아버지가 연세 드시고 은퇴하신 후에 수산업 관련 일을 하실 때 아버지의 과거 화려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등에 종종 업혔는데 그 널찍하고 단단한 등이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한지 업혀있으면 마냥 행복했다. 지금도 땀 냄새 나는 훈기가 올라오던 아버지의 등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알던 가장 넓고 따뜻한 세상은 아버지의 등이었다.

아버지가 선박회사 다닐 때는 방안 여기저기에 자리를 차지할 줄 모를 만큼 돈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뒷방 규수가 돼서 돈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잘 모르셨다. 이모님 말로 화폐 개혁 때 결국 그 돈은 쓰레기가 되어 모두 휴지로 폐기 처분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 집도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대학에 가서 문학을 하고 싶던 나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괴감을 맛보기도 했다.

마도로스였던 아버지 덕분에 언니 오빠들도 대학까지 다닐 정도로 여유 있었지만 세월 속에서 조금씩 쇠락하면서 일곱 번째인 내가 대학에 진학할 시기에는 아버지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말을 들어야 했다

“명진아 지금 형편이 그러하니 한 해 보내고 내년에 대학에 가면 좋겠구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울음보가 터져서 2박3일을 학교 보내 달라고 울다 지쳐서 복통이 왔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맹장이 다 터졌다. 얼마나 울었나 몰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결국 취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흑백사진으로 추억하는 50여 년 전 마냥 곱던 시절
흑백사진으로 추억하는 50여 년 전 마냥 곱던 시절

 

■ 경기도 경찰국의 꽃, 스무 살 ‘박양’

여고 졸업 후 경기도 경찰국 보안과에서 통계 서무를 봤다. 한마디로 끗발 좋은 직장이었다.

인화여고 동창생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시집간다고 자기 자리가 공석이 돼서 나를 추천했다. 친구는 원래 타자수였고 나는 주산 놓고 글을 잘 쓰니까 그 자리에 입사했더니 서무과로 스카웃이 되었다. 1970년대라 장발 통계, 치안본부 보고, 파출소 지시사항 등을 보고 올리고 문서 작성, 통계 작성 등 업무를 보았다. 당시 몸무게가 40kg 정도로 하늘하늘했지만 결근한 번 없이 착실하게 근무했다.

보안과장이 어느 날 “박양 경찰국 여경 첫 시험인데 한번 볼래?”하고 말했다. 1970년대 여경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꺼리를 직종이었다. 아버지도 여자가 무슨 경찰이냐며 일축하셔서 나도 마음을 접었다. 문득 생각하면 그때 여경이 되었다면 지금쯤 전문직 여성으로 더 당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만 해도 여경은 경찰의 부속 업무를 보는 것처럼 소년 경찰 역할을 하곤 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직종이 아니었다.


■ 결혼, 운명이라고 정의하다

1974년도 12월 결혼을 했다. 친구가 주선한 미팅 자리에서 만난 제일제당 실험실에 근무하는 경상도 사나이와 만났다. 상남자였던 경상도 사나이는 거친 경상도 사투리 탓에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지만 그의 저돌적인 구애로 인연이 되었다. 

요즘 말로 상남자에 좋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경기도 경찰국이라 여직원도 몇 안 되고 경사 이상만 상대하느라 눈이 하늘처럼 높았다. 예쁘고 일 잘하던 나는 연일 순경들의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시절이다.

남편은 경상남도 함안 시골 사람에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라 어머니는 허약한 내가 결혼 후에 시댁 챙기느라 고단할 것을 미리 한눈에 알아보셨다. 반대하셨고 나도 망설였지만 시댁에 인사하러 가는 날 나는 그 집의 식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나 순진했던지. 척박한 시골 풍경이 서정적인 한 폭의 수채화로 보였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진주 남강의 반짝이는 잔물결이 내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한겨울이라 소나무 가지를 덮은 하얀 눈 위에 내려앉은 까치도 한 폭의 동양화로 보였다.

6남매의 장남인 남편이라 책가방 들고 다니는 시동생 시누들은 나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치맛단을 놓지 않았다. 그 눈망울이 그저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시어머니의 투박한 말투도 정겹게 들렸다. 눈에 뭐가 씌였다는 말이 맞다.

순진무구한 나는 험한 골짜기를 넘어가며 낭만을 노래하고 말았다. 시댁은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스라한 절벽 같은 곳이었지만 난 그곳에서 절벽에 핀 물망초 꽃을 떠올렸다.

옥신각신 큰소리가 났지만 경상도 정취가 가득한 집이라고 위로했다. 순진한 건지 착한 건지 거칠어 보이는 시댁 식구들의 말투나 표정도 여과되지 않은 채 나는 고스란히 그대로 시골 정취로 안아버렸다. 내 인생의 험난한 고갯길이 될 것을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인정 넘치는 투박한 경상도 사람들로 보였다. 열 명의 그 식구들이 남편 하나만 보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그게 내 인생의 갈 길을 어떻게 이끌지는 상상도 못 했다.

남편은 제일제당의 소장으로 전국 판매 대리점을 관리하는 중요역할이라 2년 한 번씩 지역을 옮겨서 우리도 덩달아 이사를 매번 다녔다. 아이들이 전학 다니느라 사춘기 때 성장통을 앓기도 했다. 인생은 공짜가 없다. 시댁에는 9번의 제사와 한 달이면 매번 돌아가면서 경조사가 있어 집안의 대들보인 남편은 모든 집안 행사에 앞장서야 했다. 매달 험난한 그 골짜기를 다니며 몸이 약한 나는 시댁에 한 번 다녀오면 기진맥진하기 일쑤였다.

 

■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 꿈꾸는 나

남편 내조하느라 그림자로 살다 보니 내가 구축한 인생의 그림은 없지만 그 시간 속에서 우리 남매가 결혼하고 나는 우리 딸의 사회생활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외손녀의 육아를 돕고 있다.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다.

사위가 국제기계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딸네는 옥천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외손녀의 육아를 돌보며 옥천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남편은 96세 된 시어머니를 돌보느라 시골에 내려가 있다 보니 우리 부부는 각각 어머니와 손녀를 돌보면서 잠시 노년의 일부를 쓰고 있다.

가족은 때론 우리 삶에 ‘양날의 검’처럼 고난과 희망을 주지만 결국 우리가 선택하는 건 고난이든 희망이든 ‘함께’ 보듬고 나눈다는 것이다.

재능이 너무 많은 딸은 영어 강사이며 영어 전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성악, 악기연주까지 재능 많은 딸이 경단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70살 넘어 육아는 너무 힘들지만 외손녀는 너무 사랑스럽고 딸이 사회인으로 무한성장하기를 바란다. 희생이 아닌 나눔이라고 생각한다. 50여 년 주부로 살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잠시 미뤘지만 옥천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문학을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오롯이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 되어 고단했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있다. 17살 문학소녀가 문학의 꿈이 화석이 된 71살 고희의 여인이 되었다.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물론이다”라고 즉답할 것이다. 내 영혼의 불쏘시개들을 잠재우지 않을 것이다.

봄날을 쓰고 그리며 스케치할 것이다. 손에는 붓을 마음에는 꿈을 간직한 채로….

■ 따님 편지

나의 귀여운 엄니 지니! 딸 드보라여라~. 엄마가 내 곁에 있기에 우린 오늘도 여느 날처럼 마주 앉아 식사하고, 달콤한 커피에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담아 함께 나눴는데도,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차올라. 작은 체구와는 달리 큰마음으로 꿈과 열정 가득한 나를 특별하게 키워주셨고, 세심하고 감성적인 내 딸을 온 맘과 정성 다해 돌보아 주시는 것. 참 감사하지만, 엄마의 소중한 노년을 분주하게 만든 것 같아 늘 미안해. 내게서 참 괜찮은 모습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건 엄마의 기도 덕분이라고 난 언제나 고백해. 엄만 내게 너무나도 많은 걸 준 친구고, 애인이며, 스승이기에,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정도로는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 엄마의 오늘이 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싱그러운 날이면 좋겠어요. 내게 엄마의 행복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 내 엄마여서, 내 딸의 할머니여서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하고 행복해요. 이다음에 천국에서도 난 엄말 단번에 알아보고 절대 놓지 않을겨! 사랑해요 지니~ 건강합시다 우리! 쪽.

엄마의 1호 보물 드보라 드림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관련 기사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5641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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