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분 어머니 1950~

흑백사진 속의 청년과 새댁은 50년의 세월 속에서 이승과 저승으로 갈 길이 달라졌다.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꿈에서 안 보이면 서운하고 보이면 걱정이다. 고속버스 안내양이던 시절 만나 연애 결혼을 한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고속버스 안내양으로 근무한 2년간의 짧은 기억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하신다.


■ 50년 전 선망의 대상, 고속버스 안내양

이제 추억으로만 남은 나의 22살.

옥천여중을 졸업하고 대전여상에 합격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딸 중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던 대전여상, 인물이 좋고 공부 잘하던 아이들이 은행으로 취업을 하거나 고속버스 안내양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많은 직업이 있지만 고속버스 안내양도 손꼽을 수 있는 추억의 직업이다. 1970년 7월 7일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버스 안내양을 채용했다. 단순한 버스 안내양이 아니었다. 고졸 필수이며 미모, 매너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수 김세환 님의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가 바로 우리 이야기였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지금 항공사 스튜어디스보다 더 주목받던 직업이었다.

나는 은행에 갈까 고속버스 안내양을 할까 고민하다 고속버스 안내양 시험에 합격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전국을 다닐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이었다. 촌 아가씨가 언제 전국 일주를 해 볼 것인가.

그레이하운드 버스의 안내양으로 취직을 했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에서 들여온 고속버스인데 이층 버스였고 장갑차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버스였다. 한진고속, 천일고속, 그레이하운드 등 내로라하는 버스회사들이 있었다.

그때는 버스 안에서 담배도 피던 시절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 설 자리가 사라지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서 담배 냄새는 고역이었지만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집에 포도밭을 사드리기도 했다. 겨우 스무 살 넘었던 우리 세대는 지금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성숙했다. 돈 모아서 시골집 땅 사드리는 게 당연할 때였다. 궁핍할 때 살려는 욕구는 더 커진다.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더 잘살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대전에서 서울 구간을 다니고 있을 때 남편을 승객으로 만났다. 버스가 출발할 때는 안내양이 마이크를 들고 “이 버스는 서울을 출발해서 대전에 도착하는 그레이하운드 0000 버스입니다.”
하면서 안내 인사를 하고 네모박스 작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몸은 불편하지만 자존감은 하늘을 치솟았다. 아무나 앉는 의자가 아니다.

서울에 버스가 도착하고 손님들이 차례차례 내리고 있었다. 어깨 각도를 낮춰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린다. 남편이 넌지시 손에 쪽지를 쥐여주었다. 사실 출발 인사할 때 이미 눈이 마주쳤다. 맨 뒤 자석 가운데 앉아 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는데 앉아 있는 뒤통수가 따갑기는 했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전화기도 다 보급될 때가 아니었다. 남편은 치밀해서 내 일정을 모르니까 만날 날짜를 세 가지를 써주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첫 번째 날짜는 내가 운행하는 날이라 못 나갔고 두 번째 일정에 맞추어 그 자리에 나갔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렇게 남편과 만나서 연애를 하고 24살에 결혼을 했다. 우리 언니 세대는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결혼하던 시절이지만 우리 나이부터는 간간이 연애하면서 결혼을 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렇게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 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던 때라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나는 옥천으로 내려와 시골 아낙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고향이 옥천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옥천 국제기계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서울 출장길 고속버스 안에서 신붓감을 만났고 이래저래 우리는 천생연분이었다.

■ 콧바람 든 고속버스 안내양이 붙박이 시골 아낙이 되기까지

2년 동안 그레이하운드 타고 다니면서 콧바람이 잔뜩 든 내가 시골에 정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의 시간을 담보로 했다. 남편 월급으로 3남매 키우면서 밥걱정 없이 살던 때라 나는 전업주부로 50년을 살았다. 밥걱정이 없다고 살림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시골 직장인 월급이 뻔하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면서 20대를 보냈다. 삶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둘 것 인가에 따라 인생의 흐름도 달라지고 행복지수가 달라진다.

나는 자발적 포기를 선택했다. 넓은 세상에 나가는 꿈보다 아이들을 잘 키워서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 엄마로 만족하자고. 20대 때는 좌충우돌이었다. 스물다섯부터 서른 살까지 3남매를 낳고 정신이 혼미한 채로 20대를 보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 육아에서 살짝 벗어났더니 그때부터 아이들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고등학교부터 대전으로 보내고 반찬이며 김치를 싸 들고 주말마다 아이들 자취방으로 다녔다. 갈 때마다 큰 대야 이불 넣고 척척 밟아가면서 아이들 이불을 빨아줬다. 힘들어도 뽀송뽀송한 이불 덮고 잘 우리 아이들 생각에 고단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들 상급 학교에 진학해서 약사로 공무원으로 밥값을 하고 있다. 잠시 쉴 틈을 얻었다가 나는 다시 이름표를 얻었다. 아기 돌보미, 우리 3남매의 막내아들이 나한테 선물한 막내 손자, 그 녀석 보느라 등골이 휜다. 힘들어하면 사돈한테 맡긴다니 나는 짝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손자 사랑에 나는 다시 나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사랑의 포로라는 이름으로 씌운 올가미라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

인생이 올가미 안에서 헤매다 보니 70 고개를 넘기고 말았다. 나한테 이런 나이가 찾아오다니. 간간이 22살 고속버스 안내양 시절을 떠올리면 50년 전으로 돌아가 잠시 기쁨을 맛본다. 추억은 때때로 우리한테 달곰한 주스처럼 피곤을 물리게 한다. 물론 노인이 됐다는 증거지만 추억할 수 있는 시절이 없다면 가슴이 텅 비어 더 허기질 것이다.

긴 머리 짧은 치마 김연분도, 손자 보느라 낑낑대는 할머니 김연분도 똑같은 나였다. 인생은 시절마다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자리가 다르다.

22살이 짐작할 수 없는 72살의 행복이 있다. 그래서 그저 오늘을 잘 사는 게 답이다. 좀 더 솔직해지면 22살의 행복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지만 일흔두 살의 행복은 그때를 만나봐야 알 수 있다. 노년의 우리가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토닥여 주고 싶다.

우리 힘내요, 역전의 용사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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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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