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아버지가 투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쥐색 건물,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현재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개칭) 유독 5층 창문만 유난히 작다. 당시 5층 전체가 고문실로 탈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물두 살 청년 박종철 군은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 받은 지 10시간 만에 죽었다.(출처 : 하성환)
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쥐색 건물,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현재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개칭) 유독 5층 창문만 유난히 작다. 당시 5층 전체가 고문실로 탈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물두 살 청년 박종철 군은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 받은 지 10시간 만에 죽었다.(출처 : 하성환)

박종철 군 아버지 고 박정기님은 생전에 그러셨다.

“나는 아들로 인해 다시 태어났고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민주화운동가로 살아갈 거” 라고.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원통한 죽음 앞에서 흐느끼셨다.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그러나 임진강에 아들의 유골을 흩뿌리면서 아버지는 다짐했다.

“지나온 삶이 부끄럽다”며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평생을 살겠다고! 그렇게 아들의 삶을 이어가겠다고!” 22살로 죽은 아들을 떠나보내며 흐느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자행한 잔인한 녹화사업으로 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의문사한 최우혁 군(21세)도 마찬가지이다. 분신 상태로 죽은 아들을 향해 아버지 고 최봉규님은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들이 죽어 자빠지는 불의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용기를 달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평생 인권운동가로, 민주화운동가로 사셨다. 국회에서 5‧18특별법 제정과 의문사 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도록 국회 앞 천막 농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84세가 되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들 곁으로 2016년 떠나셨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청계천 6가 버들다리 위 전태일  반신부조(출처 : 하성환) 1970년  11월 13일 재단사였던 스물두 살 청년은 불의한 노동현실에 절망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불의한 현실에 저항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 운동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70년대 중반 <노동야학>의 등장은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 지식인들이 보인 뒤늦은 성찰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청계천 6가 버들다리 위 전태일  반신부조(출처 : 하성환) 1970년  11월 13일 재단사였던 스물두 살 청년은 불의한 노동현실에 절망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불의한 현실에 저항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 운동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70년대 중반 <노동야학>의 등장은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 지식인들이 보인 뒤늦은 성찰이었다.  

 전태일은 스물두 살! 그 꽃 같은 젊음을 뒤로한 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고 절규했다. 그리고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분노하며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2021년 9월 1일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 10주기 토론회>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장면. 왼쪽부터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 발제자인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장남수님(장한구 열사 아버지), 유경근님(세월호참사 유예은 양 아버지), 김혜영님(이한빛 피디 어머니), 김미숙님(김용균 어머니). (출처 :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2021년 9월 1일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 10주기 토론회>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장면. 왼쪽부터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 발제자인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장남수님(장한구 열사 아버지), 유경근님(세월호참사 유예은 양 아버지), 김혜영님(이한빛 피디 어머니), 김미숙님(김용균 어머니). (출처 : 한겨레 이종근 선임기자)

아들의 죽음 이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버리고 평생 노동운동을 하며 노동자의 어머니로 사셨다.

서부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군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새벽녘 석탄 컨베이어 벨트 롤러에 끼어 머리와 몸통이 찢겨진 채 죽었다.

▲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태안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 님 분향소(출처 하성환)
▲ 2018년 12월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태안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 님 분향소(출처 하성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착하고 감성이 풍부한 스물네 살 젊은이였다. 용균이의 죽음 이후, 어머니 김미숙님은 “용균아, 나는 너다! 나로 살아라!” 며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취급하는 미친 세상과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전투경찰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군은 피격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한열이가 죽기 전 어머니는 노심초사하며 아들에게 “데모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주문했다. “데모하더라도 앞장서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밥 해주고 식구들 건강을 걱정하던 평범한 삶을 버렸다. 그리곤 평생 투사가 되어 거리를,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니셨다. 그렇게 아들의 죽음을 당신의 삶으로 이어가셨다. 그것이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니 떠나보낼 수 없는 어미의 마음이었다.

미디어 노동자들의 야만적인 노동현실을 스물일곱 살 죽음으로 고발한 이한빛 피디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김혜영 선생님과 아버지 이용관 선생님이 「한빛 미디어 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해 아들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가는 이유이다. 더 이상 야만적인 노동현실이 지속돼선 안 된다는 염원으로 아들의 숭고한 뜻을 실천하고 있다. 돌아오는 10월 26일은 이한빛 피디가 세상을 떠난 지 5주기가 되는 추모일이다.

군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노우빈 훈련병은 논산훈련소에서 원통하게 죽었다. 뇌수막염으로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이었음에도 군의관을 만나기는커녕 타이레놀 두 알이 전부였다. 그리곤 20km 행군을 해야 했다. 노우빈 훈련병의 죽음 이후, 어머니 공복순님은 교직을 그만두고 투사가 되었다. 군인들도 민간병원 진료를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였다.

▲ 공복순 <군피해치유센터 함께> 대표가  2016년 1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사무실에서 개소식을 준비하고 있다. 평소에 파란색과 백합을 좋아했던 아들 노우빈 군을 생각하여 디자인을 그렇게 하였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미향 기자)
▲ 공복순 <군피해치유센터 함께> 대표가 2016년 1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사무실에서 개소식을 준비하고 있다. 평소에 파란색과 백합을 좋아했던 아들 노우빈 군을 생각하여 디자인을 그렇게 하였다.(출처 : 한겨레 신문 김미향 기자)

어머니 공복순님은 군 생활 동안 상처 받은 피해가족들의 고통을 공유하고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2016년 사비를 털어 ‘군 피해치유센터’ 「함께」를 설립했다.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자녀의 죽음 이후 삶이 180도 바뀌었을까? 정치에 관심도 없었던 세월호 어머니들은 왜 가장 정치적인 엄마들이 되었을까? 그것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자녀들이 단지 안타까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는 그런 슬프고 가슴 찢는 일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의 싸움을 멈출 수 없는 것이리라!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리라! 그것이 17살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는 방식이리라! 우리사회의 역사는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와 눈물로 한 걸음 전진하며 직조된 역사였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