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메로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각자의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엘리스와 닉처럼 사랑을 꿈꾸며 서로를 탐색하는 커플도 있었고 슈만과 레이첼처럼 행복의 보금자리를 일구고 있는 커플도 있었다.

유럽의 꿈 커뮤니티는 매주 열린다. 지난주 산책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닉이 커뮤니티에 참석한 엘리스에게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지만 엘리스는 닉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을 뿐 다정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엘리스가 다가오더니 닉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 있는 공공장소에서는 친한 척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닉은 엘리스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메로나 마을은 좁은 곳이다. 소문이 나면 서로에게 난처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윤리위원인 자신도 그렇고 엘리스로서도 처신이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소문만 무성하게 나면 될 일도 안 된다. 

유럽의 꿈 커뮤니티는 지난주의 논쟁을 이어갔다. 발언하는 사람들을 보니 대략 몇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다.  가브리엘과 어거스틴을 필두로 하여 스티브와 알렉스가 열띤 토론을 이어갔고 토마스는 토론의 큰 틀이 유지될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잡아갔다.  스티브가 가끔 수준 이하의 엉뚱한 발언을 하여 회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걸 문제삼는 회원은 없었다. 

유럽의 미래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커뮤니티가 파하고 나자 커뮤니케이션 팀장인 토마스는  그 날도 역시 스티브와 알렉스를 비롯한 한시적 체류자들과 더불어 술 한잔 하러 몰려갔다. 알코올을 좋아하는 커뮤니티 회원 두어 명도 같이 동행했다. 저번 주에는호프집이더니 이번 주는 와인이었다. 그들이 간 곳은 마을 북쪽에 있는 샹피나 와인하우스였다. 샹피나 와인하우스에는 지하에 유럽 최상급 디자인의 유로까브(EuroCave) 와인셀러들이 멋지게 진열되어 있어서 평소에도 메로나 마을의 와인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다.

                                                                                                                               (출처 : pixabay.com)

어디 그뿐인가. 돼지 뒷다리를 가공한 얇은 햄을 염장, 건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든 하몽이나 프라슈토 같은 샤퀴테리(Charcuterie) 안주가 일품이어서 와인을 좋아하는 마을 주민들의 입맛을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있다. 곱게 다진 돼지고기에 향신료와 피스타치오를 섞어 만든 이탈리아식 소시지 모르타델라(mortadella)도 맛이 좋아 인기 만점이다. 더구나 다른 유럽지역보다 고급 와인이나 샤퀴테리 안주가 반 값으로 제공되어 가격 대비 만족도가 무척 높은 편이다.

 샹피나 와인하우스에는 멋진 홀과 바를 갖추고 있지만 별도의 룸도 있다.  주로 가을과 겨울철에 많이 이용하지만 일행끼리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주민들은 10인실 룸을  애용한다. 10인실 룸으로 들어간 토마스와 커뮤니티 회원들은 와인을 주문하면서 벌써부터 샤퀴테리 안주를 기대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와인으로 발동이 걸린 토마스는  알코올 애호가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밤이 새도록 스카치 위스키를 마실 것이다.

커뮤니티를 마친 닉도 와인을 즐기는 편이지만 오늘은 와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스와의 일이 더 급했다. 닉이 엘리스에게 뭔가 말을 붙이려 하자 엘리스는 바쁜 척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스는 마치 닉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시간을 줘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어요."

엘리스의 표정으로 볼 때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얻으려면 나에게 좀 더 공을 들이는 게 좋을 걸요.'

엊그제 엘리스와 산책하면서 닉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것이 사랑의 고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게다가 엘리스가 닉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도 않은 상태다.  아직까지는 닉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격이다. 엘리스의  표정으로 미루어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엿보긴 했지만 분위기가 그랬을 뿐이다. 엘리스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거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닉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눈치없이 자꾸만 엘리스에게 다가가면  졸졸 따라다니며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염치없는 빚쟁이 꼴이 된다. 

닉으로서는 참으로 애타는 심정이지만 엘리스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사랑에는 뜸을 들이는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닉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일반 국도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신나게 달리려고 폼을 잡다가 갑자기 정체구간에 들어선 느낌이다. 정체의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사고가 났거나 아니면 일부 구간에서 공사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스가 뜸을 들이는 것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사이에 변심했거나 아니면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엘리스가 받아주지 않는 듯하여 섭섭한 마음이 든다. 지난주에 함께 산책한 이후 엘리스는 닉에게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에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고 하지만 엘리스가 그럴 거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메시지를 보내도 성의있게 답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멀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레이첼이었다. 레이첼은 닉과 엘리스의 태도를 관찰하며 닉이 엘리스에게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쯤 되면 엘리스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닉은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한편 닉의 마음이 한껏 달아오르는 것을 확인한 엘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닉에게 마음을 보이려면 좀 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분간 닉의 애타는 모습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랑의 열기가 하나의 불꽃이 되기까지는 타오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향한 닉의 사랑이 불타오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엘리스의 마음은 들뜨고 흥분되었다.  

집에 도착한 이후 닉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대화방이 뜨거웠다. 엘리스가 관심 있게 들여다본 방은 텔레그램에서 사적인 톡을 주고받는  '태고' 대화방이었다. 태고 대화방에는 스티브와 알렉스를 비롯한 한시적 체류자들이 주로 가입되어  있었고 그 외에 정체모를 몇 명의 회원이 더 있었다.

엘리스는 메로나 마을에 거주하면서 지인의 초청을 받아 태고마을을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엘리스는 그때  태고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알렉스와 얽히게 된 인연으로 태고 대화방에 초대되어 있다. 태고마을은 폴란드 서남부의 브로츠와프 도시 근교에 위치해 있으며, 오로빌이나 메로나 마을과 비슷한 취지에서 몇 년 전에 만들어진 마을 공동체이다.

브로츠와프는 독일제국 시절 좌파 자유주의의 거점 역할을 해왔던 곳으로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연대에 호응하는 반공산주의 지하조직 ‘투쟁연대(Fighting Solidarity)’와 ‘오렌지 대안운동(Orange Alternative)’이 1989년 민주화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특히 오렌지 대안운동은 시내 벽에 쓰인 반체제 구호를 경찰이 페인트로 지워버린 자국 위에 다시 덧칠해 그린 난쟁이(dwarf) 그림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태고마을 초기 멤버들은 그러한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브로츠와프 도시 근교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출처 : 한겨레신문

 

메로나 마을의 한시적 체류자들은 모두 폴란드 태고마을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태고마을 지도층을 뒤엎은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들은 메로나 마을에 입주한 이후 폴란드 태고마을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실을 감춘 채, 태고 대화방에 모여 비밀리에 모의를 해왔다. 

"커뮤니티 회원 중에서 우리에게 우호적인 동조세력을 어느 정도 확보했어요."

"토마스도 이제부터 우리 편으로 분류해도 좋지 않을까요?"

"원래 술친구가 되면  공감 수치가 올라가거든요."

"술 마시면서 비위 좀 맞춰줬더니 우리에게 간까지 빼줄 것 같던데요."

"카밀라는 어떤가요?"

"카밀라는 미술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유럽의 꿈에서도 우리와 같이 호흡을 맞춰왔잖아요."

"맞아요.  카밀라는 은근히 뒤에서 우리를 지원해주기로 했어요."

" 두 사람 모두 마을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이용 가치가 높아요."

"물론이지요. 카밀라는 미술 전시회로 주민들과의 정서적인 공감대를 넓혀왔고, 토마스는 커뮤니케이션팀장이라는 무게감도 있고 친화력도 있는 편이라서 나름의 존재감이 있어요."

대화를 듣던 알렉스가 결론을 내렸다. 최종 판단은 알렉스의 몫이다. 

"내부 정보도 충분히 알아냈고, 지지 세력도 얻었으니 이제 때가 무르익었어요."

알렉스가 결정을 내리자 스티브가 앞장서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슬슬 시작해 볼까요?"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엘리스는 메로나 마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한편으로는 닉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혹시 눈치채는 건 아닐까. 순진한 닉을 믿는 편이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지난 주에 산보하면서 닉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이후 엘리스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갔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서 닉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