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택씨(86세) 이원의 양복·학생복, 내 손을 많이 거쳤지요

 

손춘택(86)
손춘택(86)

옥천신문에 두 번 나왔을 걸요? 옆에 TV도 있지만 지난해에 방송에도 나오고, 경상도, 서울, 대전, 옥천··· 사방에서 취재한다고 오더라고. 이 자리에서만 양복점 한 지 65년 됐지. 나이는 여든여섯, 1935년생이니까. 예전에는 양복, 학생복 맞춤을 많이 했지. 요즘은 옷이 작게 나오지만 예전엔 옷소매 자체가 컸거든. 통이 넓었으니까 재단도 자주 했지. 양복 트렌드야 뻔하지, 나이 대에 따라 다 맞추고 그랬으니까.

집은 바로 옆에 있어. 원 고향은 일본 출생이야. 해방하면서 이원으로 왔어. 외갓집이 여기여. 아버지 고향은 영동인데 일본 살다가 이원에 왔어. 이원에 산 지도 75년 됐지, 국민학교 4학년 때 왔으니까. 이원국민학교 다녔는데 중학교는 안 갔어. 가난한 사람들은 중학교 못 갔잖아. 그땐 고등공민학교가 있었어. 여기 앞에 가정집에서 했다고. 거기 다니다가 고등공민학교가 폐지되면서 학교 안 간 애들은 이원중학교에 편입되거나 안 간 사람도 있었고. 난 그때 그만뒀어.

학교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했어. 기차역에서 잡상 했지. 엿 장사하고 그랬거든. 오징어, 담배, 엿 통째로 갖고 와서 팔았어. ‘담배 사세요’ 하고 댕겼다고, 몸에 목판 걸치고. 기차 도착시간 되면 이원역 가서 승객이 창문 열어주면 팔고. 잡상을 계속 하다 보니까 몸이 안 좋더라고. 앞으로 희망이 안 되겠다 싶어서 뭘 배울까 고민했지. 짜장 하는 걸 배울까? 그러다가 양복점을 차렸어.

요 앞에 양복점 조그마하게 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서울에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때가 1954년인가, 서울에 조그마한 양복점 가서 몇 달 배우고 왔지. 그리고 다시 대전 가서 또 배우고. 그렇게 양복점을 시작했지. 서울 댕길 땐 여기서 복숭아 떼어다가 서울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고, 영등포시장에서 팔고 그랬어. 요즘은 생산자들이 떼서 납품하잖아. 그때는 우리 가게에서 복숭아밭에 가서 따온 걸 떼어다 팔고 그랬거든. 여기서도 팔고, 서울 가져가서 많이 팔았지.

지금도 옷 수선을 하지만 예전만큼은 안 나오지. 한 집에 식구가 대여섯 명씩 됐잖아. 요즘은 아이를 하나 둘밖에 안 낳으니까. 양복점 주변이 원래 허허벌판이었어. 시내에 건물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해방하고 나서 다 지은 겨.

오늘도 갔다 왔지만 한국일보 신문 배달은 운동 삼아 하는 거지. 걸어서는 못 댕기고 자전거 타고 가는 거야. 한국일보 창간할 때부터 이원지국을 맡으면서 배달하지. 옥천신문은 계속 받고 있어. 여기 책상에 있잖아. 이원 출신 양궁 선수가 금메달 딴 소식도 봤어. 은빛자서전 이런 거 한 번씩 보고, 선거 때 잠깐 보지. 신흥양복점은 여기가 신흥리에 있으니까 지명을 따서 지은 거고. 8년 전에 충북도에서 ‘외길직업인’ 상도 받았어.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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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윤종훈 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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