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순(1938년~2019년 )
강정순(1938년~2019년 )

청춘, 30대

봄날이면 옥천의 벚꽃 길을 누비면서 봄을 만끽하시던 어머니.

2019년 폭염으로 모두가 지쳐 있을 때 어머니는 성하의 계절에 가족들과 이별하고 떠나셨다.
비록 고향은 옥천이 아니지만 남편이 은퇴하시고 소정리에서 작은 전원 집을 짓고 살았던 3년간의 옥천살이가 어머니의 화양연화였다고 따님이 전해주셨다. 

교동 저수지 길을 끼고 벚꽃 길을 다니면서 탄성을 자아내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추억하며 따님이 전해주는 어머니의 80년 이야기.

■ 이름까지 어여쁜 그 곳, 소정리

대전에 살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문학소녀였다. 멀리 사는 여동생에게 늘 손 편지를 쓰면서 안부를 묻던 언니였다. 당연히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흠뻑 젖었고 정지용문학관을 수시로 드나드셨다. 올갱이국을 너무 좋아하셨는데 대전의 그 많고 많은 올갱이국을 두고 굳이 옥천에서 꼭 드셨다.

원산지가 중요하다기보다 옥천에 한번이라도 더 가고 싶은 마음으로 옥천을 찾아서 올갱이 국을 드셨다. 남편이 은퇴하시고 아파트 숲을 떠나 마당 있는 집을 하나 지어서 살아보자고 하셔서 찾은 곳이 바로 옥천이었다. 보은으로 갈까 금산으로 갈까 고심하셨지만 두 분의 결정은 옥천으로 한 마음을 모았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전원생활을 하기에 옥천만큼 최적화된 곳이 없어서 어머니의 옥천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들이 다닐 때는 좋았지만 막상 그곳에 살러 간다는 건 어머니에게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었다. 아버님이 작은 집을 지어서 먼저 집을 꾸미시고 옥천과 대전을 번갈아 오가셨다.

한두 번 따라다니시면서 소정리가 좋아지고 버스정류장 앞의 소정리 찻집도 즐겨 다니셨다.

대청댐이 바라다 보이는 집이 주는 평화로움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도시에서 살다 온 이방인이 마을 주민들과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님이 먼저 동네 분들과 관계를 트고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도 사부작사부작 소정리 사람으로 정이 들기 시작했다.

맑은 공기도 마시고 벚꽃이 절정일 때는 눈이 부신 벚꽃터널을 지나다니며 감탄사를 그칠줄 모르셨다. 자연이 주는 행복감은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었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 그곳에서 살다 아버님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신 어머니.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기억하자고 하면 소정리에서의 3년이라고 주저 없이 말씀하셨다.

부모님 결혼사진
부모님 결혼사진

 

■ 근 현대사속의 한 여인

어머니는 38년생이라 해방과 6,25를 거쳤고 근현대사의 주역은 아니었어도 그 시절을 관통하면서 80년을 보내셨다.

국민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아 마을에 있던 일본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서 이유도 모른 채 기뻐했다.

6.25 때는 시골마을이라 큰 어려움 없이 그 시절을 무사히 보냈고 또래의 친구들이 전쟁통을 앓았던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남 얘기 듣듯이 들었지만 그 시절을 살아낸 분들은 그렇게 모두 진통을 견뎌내면서 살고 있었다.

도시여인으로 살다보니 새벽부터 농사짓는 아낙의 힘겨움을 모르지만 아이들을 건사하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에 온몸으로 맞서기는 마찬가지였다.

큰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귀가가 늦어지고 외박이 잦아졌다. 골목길 어귀에서는 낯선 남자들이 어머니집의 초록대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방송에서 연일 대학생의 데모가 한창 일 때 아들이 며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초인종을 불이 나게 눌러대는 사람들을 혼내주러 나간 어머니는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찰들의 기세에 눌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줄 알고 있던 고시공부 하던 아들은 이미 학생운동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며칠 눈에 보이지 않던 아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져 경찰이 어머니 집을 급습했고 어머니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경찰에 잡힌 아들은 감옥살이를 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서 고된 군대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을 믿는 마음이 컸던 어머니는 안타까움과 미련을 동시에 마음으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고시공부를 포기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실망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들이 그린 꿈보다 어머니가 그린 꿈이 더 컸을 것이다.

그 시절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전부였다. 아들이 바로 당신이었던 시대다.

똑똑한 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건 어머니만의 바람이었고 아들은 졸업 후에 기자가 돼서 아슬아슬한 한 고비를 넘기며 지금은 평범한 사회인으로 세상의 한축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중국 철학자의 가르침을 인생 살아가면서 고스란히 맛보시며 어머니도 그 험난한 강을 건너고 거친 산을 넘으셨다.

집안의 대들보인 아들이 감옥살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

아들은 세상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그래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청춘을 바쳤지만 어머니에게는 속앓이일 뿐이었다.

그 세월도 그렇게 다 지나고 어머니는 이제 자식들 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어머니가 남겨놓은 사랑의 흔적은 화석처럼 새겨져있다.

빛바랜 사진, 50년 세월을 건너 띄다
빛바랜 사진, 50년 세월을 건너 띄다

 

■ 온 가족 헌체(獻體)를 약속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헌체를 기증하시고 어머니도 아버님의 유언을 존중하고 헌체를 약속하셨다. 3남매 자녀들도 모두 헌체기증을 했다. 부모님의 고귀한 뜻을 받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장묘문화가 바뀌고 의과대학에서 또 한 생명을 구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장기기증보다 더 용기를 내야하는 ‘헌체’는 아직 일반화 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와 어머니 자녀들은 그 기증의 대열에 들어섰다. 아직 낯선 헌체기증 문화가 어머니의 가족을 통해서도 그 폭이 넓어지기를 바란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과 부모님의 숭고한 뜻을 받는 자녀분들 또한 참으로 귀한 대물림을 하셨다. 

작은 몸으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서 평범하고 평화로운 유년을 보내고 스물네 살에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과 만났다. 한 남자를 만나면서 전혀 낯선 세상의 문을 열던 우리 어머니들.

결혼이 굴레였던 그 시절을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견뎌냈지만며느리에게는 그 시집살이를 대물림 할 수 없는 억울한(?) 세대의 어머니들이다.

남편에게는 순종이 미덕이었지만 며느리가 아들을 친구 대하듯이 하는 꼴을 또 봐야 하는 또 억울한 세대의 어머니들.

그래서 1930~40년대에 태어난 우리 어머니들은 여자로 태어난 게 죄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 그 세월을 살아내셨다.

그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함은 거론의 여지가 없고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건 단 하나 사랑의 흔적이다. 

화석이 된 사랑의 흔적들, 자녀들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졌지만 살아계실 때 누리지 못 하시고 떠나신 분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떠나신 분들에게도 살아계신 분들에게도 우리는 그 분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그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화석이 된 당신의 사랑, 그 흔적에 흠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떠난 이들의 희생이 지금의 우리를 바로 세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 후대의 사명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어머니들, 오늘 한 번 그 어머니들을 기억해 본다.

“당신들이 계셔서 지금의 우리가 존재합니다.”

아직은 바람이 세 찬 겨울이지만 머잖아 꽃비가 내리는 옥천의 향수길에서 어머니의 따님은 어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벚꽃 길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름다운 어머니를! 

따님이 그리는 어머니처럼 조금은 암울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꽃비 내리는 봄날이 어여 찾아오기를 ….

빛바랜 사진, 50년 세월을 건너 띄다
빛바랜 사진, 50년 세월을 건너 띄다

* 이 글은 옥천신문과 제휴한 기사(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38)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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