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 김산의 정신적 멘토 운암 김성숙

국립현충원(출처 : 하성환)동작동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치된 운암 김성숙 선생 묘비
국립현충원(출처 : 하성환)동작동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안치된 운암 김성숙 선생 묘비

운암 김성숙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존재이다. 의열단 선전부장과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아내 두쥔훼이(杜君慧) 역시 열혈 항일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서 맹활약했다. 아내 두쥔훼이(杜君慧)는 중국여성임에도 항일혁명의 동지이자 반려자로서 운암 선생을 사랑했다. 그녀는 스스로 '나는 조선의 딸'이라고 선언할 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운암 김성숙과 아내 두쥔훼이(杜君慧)를 잘 모른다.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임에도 대중의 기억 속에선 망각의 존재이다. 먹고 살기 바쁜 우리네 현실에서 교과서든 학교수업이든 대학입시에서든 김성숙의 이름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좀 더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삶의 교범'이 될 만한 인물임에도 80년대까지 우리역사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이다. 1964년 12월 운암의 절규대로 당시 "아직도 독립되지 못한 나라"였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1969년 4월 운암 선생이 별세하고 13년이 지난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운암 김성숙 선생에게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을 추서했다. 해방된 지 37년이 지나서야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일반 시민들이 운암 선생을 알지 못한 이유는 학교에서 '삶의 교범'이 될 만한 운암 선생에 대해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운암 선생을 가르쳐야 함에도 8종 『한국사』 교과서 어디에도 운암 선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게 우리교육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운암 김성숙의 삶을 바꾼 계기는 3・1만세 시위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던 그 시각, 운암은 승려의 신분으로 역사의 현장인 탑골공원에 있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낭독된 탑골 공원 행사에 직접 참가했다. 그리고 종로 약종상 김석로, 봉선사 승려 이순재, 강완수 등과 함께 경기도 광릉천 시장에서 격문을 만들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21살 나이로 직접 독립을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고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운암 선생은 이 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8개월 옥고를 치렀다.

우리 근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게 '3・1혁명'은 인생의 일대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상록수』의 심훈, 『뜻으로 본 한국역사』, 『씨알의 소리』의 함석헌, 『아리랑』의 김산, 죽산 조봉암 선생과 석정 윤세주, 그리고 야자 이만규를 비롯해 운암 김성숙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말년에 운암 선생이 쓴 《혁명일기》에도 "3・1절은 나의 인생 진로를 결정지어준 날"이라고 썼다. 실제로 3・1 만세 시위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한국인이라는 의식조차 희미해져가던 무기력한 사회였다. 그러한 세태를 잘 묘사한 소설이 염상섭이 쓴 『만세전』인데 본래 책 제목이 『묘지』였다. 3・1 만세 시위 이전까지 한국 사회란 그저 '묘지'와 같이 정신이 썩은 나라였다는 의미였다.

3・1만세 시위로 인한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과 중국 망명, 그리고 해방과 환국 이후 1969년 4월 순국하기 직전까지 운암은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해마다 '3・1혁명'기념일이 돌아오면 "마치 활동사진처럼 그날이 생생하게 되새겨진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3・1 만세 시위운동이 이후 운암 선생의 삶에 주춧돌이 되어 항일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동력원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운암 김성숙은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통해 80년대 대중에게 조금 알려진 인물이다. 고결한 영혼을 간직했던 항일혁명가이자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에게 코뮤니즘 사상을 학습시켜 준 인물이 바로 운암 김성숙(이명 김충창)이다. 『아리랑』에는 김산의 절친인 혁명동지 김성숙을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묘사하고 있다. 『아리랑』의 주인공이자 항일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운암 김성숙이고 두 번째가 도산 안창호였다. 그 책에서 김산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다. 그는 조선 청년들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 1922년에서 1925년까지 - 내 이론 공부를 이끌어 주었다."

김성숙은 베이징유학 시절, 신채호 선생을 통해 아나키즘을 접하고 이후 코뮤니즘을 받아들였다. 조봉암, 이육사, 김원봉, 윤세주 등 당대 항일혁명가들이 조선독립의 방편으로 코뮤니즘을 수용했듯이 운암 김성숙도 식민지 '민족해방'을 위해 한때 코뮤니즘을 받아들였다. 운암 선생은 코뮤니즘과 아나키즘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활용했을 뿐, 코뮤니즘과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적 신념으로 내면화하지 않았다. 의열단원의 80%가 아나키스트였고 운암 선생 또한 의열단 선전부장이었지만 그는 온전히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삶을 살아갔고 삶을 마쳤다.

2.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1938년 10월 10일)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고 왼쪽 두 번째 인물이 석정 윤세주, 세 번째 인물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다. 약산 김원봉 오른쪽 첫 번째 여성은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 그 옆은 조선의용대 출신 <최후의 분대장> 항일작가 김학철이 사랑을 고백했던  항일여전사 김위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2.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1938년 10월 10일)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고 왼쪽 두 번째 인물이 석정 윤세주, 세 번째 인물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다. 약산 김원봉 오른쪽 첫 번째 여성은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 그 옆은 조선의용대 출신 <최후의 분대장> 항일작가 김학철이 사랑을 고백했던  항일여전사 김위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 연안으로 떠났을 때 운암 선생은 조선의용대 본대에 남아 약산 김원봉과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국무위원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돼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이후 임정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이 되었고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환국했다.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년 11월 3일)백범 김구 선생 왼쪽으로 김규식, 조완구, 이시영 선생이고 키 작은 이시영 선생 바로 뒤편에 있는 인물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년 11월 3일)백범 김구 선생 왼쪽으로 김규식, 조완구, 이시영 선생이고 키 작은 이시영 선생 바로 뒤편에 있는 인물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실제로 운암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김원봉, 이육사, 윤세주, 조봉암처럼 '진보적 민주주의자'였을 뿐 코뮤니스트를 싫어했다. 이는 해방 공간 박헌영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고 한국전쟁 기간 이승엽을 비롯해 코뮤니스트들이 함께 일하자고 합류를 권했을 때 거절한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운암 선생은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창당해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몽양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따랐다. 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극우 청년에게 피살된 이후,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우사 김규식 선생이 만든 민족자주연맹과 정치노선을 함께해 지속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권위주의와 당파성을 경멸했던 운암 선생은 해방 공간 냉전으로 치닫던 당대 세계정세를 통찰했던 진정한 애국지사이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이 좌절되고 전쟁으로 치닫던 절체절명의 순간, 북쪽을 선택하지 않았다. 북쪽을 선택했을 경우, 중국 본토에서 생이별한 아내 두쥔헤이(杜君慧)와 세 아들(두감, 두건, 두련)을 만날 수 있었음에도 평생을 그리워했을 뿐, 끝내 북을 선택하지 않았다. 운암 김성숙은 해방 공간 '코뮤니즘'과 '반공'이라는 극단적 이념에 갇힌 이승만, 박헌영을 철처히 비판했다. 그들의 정치적 야욕과 좁직한 안목으론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약소국의 민족현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운암은 해방 공간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 등 좌우합작 운동을 펼치며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러다 미군정의 핍박으로 투옥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 반민족세력이 자행한 음모의 결과였다. 이승만 독재시절엔 전쟁 기간 서울에 잔류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역자로 몰리거나 국가보안법 혐의로 무려 세 차례나 투옥되었다.

운암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혁신정치운동은 박정희가 자행한 5・16쿠데타 발발 이틀 후 또다시 군인들에 의해 투옥되면서 해방된 조국에서 고난의 가시밭길은 끊이질 않았다.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19살 이후, 중국관내에서 22년에 걸친 치열한 항일투쟁과 해방 후 이승만 - 박정희 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점철된 24년이 넘는 기간, 운암은 혁명과 폭동, 전쟁과 투옥, 그리고 극심한 빈곤과 병마에 시달렸다. 운암 선생을 괴롭힌 천식은 지독해서 한번 발병하면 15일씩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60대 중반인 1964년 "비나 피하라(避雨亭)"고 동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집을 지어준 방 한 칸짜리 피우정(避雨亭)이 운암에겐 생애 처음 가져본 집이자 마지막 거처였다. 작고하기 5년 전 일이지만 그 시절 운암은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고 절대 빈곤 상태였다. 항일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운암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한 때문이다. 병원은커녕 약값도 없이 여러 날 이어진 천식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1969년 4월 12일 치열했던 생을 마감했다. 항일독립지사의 삶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 먹먹하기 그지없다. 운암 선생이 작고한 지 1주년이 되던 1970년 4월 12일, 노산 이은상은 묘비명에 이렇게 새기며 운암 선생을 추모했다.

김성숙 선생 묘비명에 새긴 1주기 추모사 일부 비문(출처 : 하성환)추모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김성숙 선생 묘비명에 새긴 1주기 추모사 일부 비문(출처 : 하성환)추모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 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1898년 평북 철산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개한 성격을 가졌더니 기미년에 옥고를 치른 뒤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중산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베이징, 광동, 상하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혁명동지들을 규합,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임정으로 총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맞으니 48세였다.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 지냈다."

* 이 글은 잡지 <순국> 7월호에 게재 했음을 밝힙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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