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이념에 갇힌 보훈 행정과 역사 정의

조선 최고의 국어운동가 고루 이극로. (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극로는 독일 유학 당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지만 평생 한글을 연구하고 널리 퍼뜨렸던 국어학자이자 국어운동가였다. 영화 <말모이>에서 류정환(윤계상 분)이 절규하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 은 이극로 선생이 강조했던 표현이다. 이극로 연구의 권위자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이극로 선생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고 했다. 언어독립투쟁인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이극로 선생은 가장 센 징역형 6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해방 이틀 뒤 함흥형무소에서 들것에 실려나왔다. 이극로 선생은 민족주의자였지만 북에 남아 이만규 선생과 함께 북쪽 언어정책을 주도했다.
조선 최고의 국어운동가 고루 이극로. (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이극로는 독일 유학 당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지만 평생 한글을 연구하고 널리 퍼뜨렸던 국어학자이자 국어운동가였다. 영화 <말모이>에서 류정환(윤계상 분)이 절규하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 은 이극로 선생이 강조했던 표현이다. 이극로 연구의 권위자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이극로 선생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고 했다. 언어독립투쟁인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이극로 선생은 가장 센 징역형 6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해방 이틀 뒤 함흥형무소에서 들것에 실려나왔다. 이극로 선생은 민족주의자였지만 북에 남아 이만규 선생과 함께 북쪽 언어정책을 주도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국어운동가이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목대잡이(지도자) 고루 이극로 선생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두고 ‘혁명애국투사’라고 칭송했다.

중국 인민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돼 나오는 「호가장 전투」(1941) 당시,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일본군과 교전 도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던 연변 작가 고 김학철은 약산 김원봉을 이렇게 회상했다. “항일테러 조직 영수답지 않게, 그리고 목에 일제의 막대한 상금이 걸려 있는 사람답지 않게 병원 원장이나 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온화했으며 이야기는 가식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의열단 선전부장 운암 김성숙은 약산 김원봉을 “굉장한 열정을 소유한 사람이자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1920년대 전반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의열투쟁은 모두 약산 김원봉이 주도했다.

약산은 중국 유학 도중 국내에서 3‧1만세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어 본 약산은 크게 실망했다. 만세 시위로 제국주의 강도 일본의 식민 통치를 구축하고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일제에 맞서 무력 항쟁, 바로 폭력 투쟁만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부탁으로 신채호가 한 달에 걸쳐 작성한 ‘강도 일본’으로 시작하는 「조선혁명선언」은 그렇게 의열단 강령이자 선언문이 되었다.

약산은 3‧1만세 소식을 접한 직후 길림으로 망명해 있던 자신의 고모부이자 동화중학교 스승, 백민 황상규를 찾아갔다. 「풍기광복단」(1913)과 「광복회」(1915) 시절 황상규의 작탄 투쟁을 이어받아 1919년 11월, 13명 창립 단원으로 의열단을 결성했다. 13명 중 6명이 경남 밀양 출신이고 5명이 경북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의열단은 조선 총독과 고위 관료, 군 장성, 밀정, 친일파 거두, 친일 부호, 대만 총독 등 ‘의열단 7가살’(七可殺)을 척결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식민 통치의 중핵인 조선총독부와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회사, 그리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와 조선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일제경찰서를 ‘의열단 5파괴(破壞)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 3월 제1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시작으로 1920년 그해에만 의열단원 박재혁이 고서적상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폭살시키고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이듬해 의열단원 김익상이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한 채 조선총독부로 거침없이 쳐들어갔다. 김익상은 총독부 건물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을 따돌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 사건은 적의 심장부를 강타함으로써 여러 날 경성 시내를 초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은 대한 남아의 기개를 유감없이 떨친 반면, 일제 경찰들을 교묘히 농락한 사건이었다.

1922년엔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의열단원들이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를 저격했다. 1923년 1월 12일엔 김상옥이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악명 높은 공간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피신했다. 일주일 뒤 1월 17일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은신하다가 친일 경찰 조용수의 밀고로 일경의 포위망에 걸려 총격전을 벌였다. 총격전 끝에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을 사살하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1월 22일 다시 포위망이 좁혀오자 수백 명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서대문경찰서 경부를 비롯해 여러 명을 살상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권총 총구를 자신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김상옥의 거사와 비장한 죽음은 일제 식민 통치로 짓눌린 조선 민중의 한을 조금이라도 푸는 데 일조했다.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나석주가 경성 시가전에서 일경을 사살하고 “2천만 민중들아! 조국의 자유를 위해 분투하라”고 외치며 자결했던 순간도 마찬가지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에서 주인공 김산은 1924년까지 300명에 이르는 조선의 열혈 청년들이 일제에 그렇게 희생됐다고 회고했다.

의열단이라는 말만 들어도 일본 순사가 놀라서 도망칠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의열투쟁의 중심에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일제가 가장 잡고 싶어 했던 항일독립투사! 약산 김원봉, 일제는 그에게 100만 원이라는 현상금을 내걸었다. 백범 김구에겐 60만 원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던 일제가 약산 김원봉에게 가장 큰 현상금을 내걸어 놓았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했을 때 200~300억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김원봉은 해방 공간 백색테러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심지어 미군정 장관 고문관이었던 윌리엄스는 1947년 3월 총파업 당시 김원봉이 또다시 체포됐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민전)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커다란 불행이 당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실제로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여운형 선생이 그 해 7월 19일  피살됐고 우사 김규식 선생도 테러 위협을 받고 있었다.

1947년 12월 10일 촬영한 미군정 후원 하에 설립되었던 좌우합작위원회 기념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앞줄 왼쪽부터 강순, 신숙, 여운홍, 안재홍, 김봉준, 김규식, 김성규, 원세훈, 오하영, 최동오, 이극로이다. 이 사진은 중심 인물이었던 여운형의 사후에 촬영한 것으로 여운형이 그 해 7월 19일 암살 당하자 김규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운형 얼굴을 오려 맨 우측에 붙여 놓았다.
1947년 12월 10일 촬영한 미군정 후원 하에 설립되었던 좌우합작위원회 기념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앞줄 왼쪽부터 강순, 신숙, 여운홍, 안재홍, 김봉준, 김규식, 김성규, 원세훈, 오하영, 최동오, 이극로이다. 이 사진은 중심 인물이었던 여운형의 사후에 촬영한 것으로 여운형이 그 해 7월 19일 암살 당하자 김규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운형 얼굴을 오려 맨 우측에 붙여 놓았다.

약산 김원봉은 코뮤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아나키즘이든 코뮤니즘이든 열린 마음과 열린 사상으로 대했고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통일전선을 추구했다. 일제강점기든 해방 공간이든 약산은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를 열망했고 그를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통일전선을 촉구했고 이를 위해 싸웠다. 항일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코뮤니스트 안광천과 함께 북경에 「레닌주의 정치학교」(1929)를 세우고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1932)를 세워 조선의 청년들을 애국청년으로 길러내고자 했던 것도 모두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와 성자분교에서 조선의 청년들을 교육받고 훈련받게 했다.

조선의용대 출신 연변 작가 김학철(출처 : 이정용 한겨레 선임기자, 한겨레신문) 김학철은 <호가장 전투>(1941)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제에 체포된다. 그는 연변 작가로 <최후의 분대장>에서 연안파 출신 조선의용군 자휘관들을 집단 숙청한 김일성 독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김무정, 방호산을 비롯해 조선의용군은 1950년 6.25 당시 인민군 보병 절반에 육박하는 정예 병력이었다. 이들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국공내전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방호산이 지휘했던 6사단의 경우 개성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인민군 가운데 한강을 가장 먼저 도하했으며 호남을 경유해 진주, 마산까지 최단시간에 진격했던 부대였다. 영웅 칭호를 받았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다.
조선의용대 출신 연변 작가 김학철(출처 : 이정용 한겨레 선임기자, 한겨레신문) 김학철은 <호가장 전투>(1941)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제에 체포된다. 그는 연변 작가로 <최후의 분대장>에서 연안파 출신 조선의용군 자휘관들을 집단 숙청한 김일성 독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김무정, 방호산을 비롯해 조선의용군은 1950년 6.25 당시 인민군 보병 절반에 육박하는 정예 병력이었다. 이들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국공내전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방호산이 지휘했던 6사단의 경우 개성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인민군 가운데 한강을 가장 먼저 도하했으며 호남을 경유해 진주, 마산까지 최단시간에 진격했던 부대였다. 영웅 칭호를 받았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한 정율성과 「21세기 신화」, 「격정시대」, 「최후의 분대장」을 쓴 연변 작가 김학철, 그리고 항일혁명시인 이육사가 모두 그 학교 출신들이다. 실제로 김원봉이 길러낸 조선 청년들은 조선의용대의 주축이 될 뿐만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한국광복군에서 맹활약하였다. 약산은 조선 청년들을 붙들고 이렇게 절규하고 설득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써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소!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하오.”

실제로 약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금도 흔들림 없이 무력 항쟁으로 조국의 독립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약산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에 의해 성북경찰서로 연행당할 때 수갑이 채워진 채로 극심한 모멸감을 당했다고 했다.

반민특위 당시 특경대에 연행되는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맨 앞쪽 인물).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20대 초반 독립운동가 2명을 고문으로 죽였다. 그리고 그 몹쓸 짓을 해방  후에도 자행했다. 시국 사범인 20대 청년을 고문 끝에 죽이고 한강에 몰래 수장시킨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까지 하였으며 그 당시 나이로 천수를 누렸다. (출처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었음)
반민특위 당시 특경대에 연행되는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맨 앞쪽 인물).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20대 초반 독립운동가 2명을 고문으로 죽였다. 그리고 그 몹쓸 짓을 해방 후에도 자행했다. 시국 사범인 20대 청년을 고문 끝에 죽이고 한강에 몰래 수장시킨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까지 하였으며 그 당시 나이로 천수를 누렸다. (출처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나온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었음)

오죽했으면 석방된 뒤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서 “해방된 조국인데 여기에선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3일 밤낮 식음을 전폐한 채 통곡했을까! 실제로 친일 반민족세력이 지배했던 이승만 친일 정권 아래에선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정세였다. 민족주의자조차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던 시대였으니까!

한국전쟁 와중에 약산의 직계가족은 몰살당했다. 약산의 부친은 감금당한 채 굶어 죽었고 친동생 김용봉, 김덕봉, 김구봉, 김봉기 4명과 사촌 형제들 5명은 대한민국 군경에 학살당했다.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여고생 신분으로 경찰서로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고 몇 년 동안 옥살이까지 했다. 김학봉의 남편은 두엄더미에 숨어지내다 병을 얻어 죽었다. 김학봉의 시아주버니는 남편 대신 처형당했다. 약산의 사돈 집안까지 총살당하는 참화를 겪었다. 약산으로 인해 가족이 겪은 탄압은 혹독했다.

김원봉은 좌파 민족주의 내지 진보적 민족주의자였지 결코 코뮤니스트가 아니었다. 북을 선택한 것은 미소 강대국이 강제한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극우친일세력의 백색테러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보훈 행정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정세와 남쪽 사회에서 백색테러가 횡행했던 시대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오직 약산 스스로 북쪽을 선택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설에 참여했으며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지 않는 것은 매우 옹졸한 보훈 행정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항일독립투사에게 독립유공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은 근본에서 잘못된 보훈 행정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한국사 교과서 국정제를 강행했던 박근혜 정권에선 김원봉을 교과서에서 아예 삭제하려는 방침까지 세운 적이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2019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특별판(출처 : 하성환)  독립운동사연구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창에 김원봉을 입력하면  김원봉과 관련된 인물 56명이 나오지만 정작 의열투쟁의 주체인 김원봉은 없다.  <인명 사전>에 의열단원 김상옥,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는 수록돼 있지만 의열단장 김원봉은 없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특별판(출처 : 하성환) 독립운동사연구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창에 김원봉을 입력하면 김원봉과 관련된 인물 56명이 나오지만 정작 의열투쟁의 주체인 김원봉은 없다. <인명 사전>에 의열단원 김상옥, 김익상, 김지섭, 나석주는 수록돼 있지만 의열단장 김원봉은 없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홈페이지에는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 배경 내지 편찬 의의를 이렇게 올려놓았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 사업은 2015년 광복 70주년과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발자취를 담아내기 위해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를 총망라하여 편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학문적 지식과 노력이 오롯이 담긴 원고와 다양한 사진 자료를 축적하여 단순한 나열식 인명사전이 아닌 애국지사들의 일종의 작은 전기 사전 형태로 편찬하였습니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은 온 겨레와 국민의 독립 정신·나라 사랑·겨레 사랑 정신을 배양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독립 정신·나라 사랑·겨레 사랑 정신을 배양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자료로도 활용”하기 위해서 최고의 항일애국투사! 약산 김원봉을 맨 먼저 기술해 넣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발자취를 담아내는”  제대로 된 사업이다. 당장 의열단장 김원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어렵다고 해서 아예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에 기술조차 하지 않는 행태는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

밀양 시내 <의열기념관> 맞은 편 의열거리 벽화 속 인물은 약산 김원봉과 항일여전사로 전투 중 총상을 입고 뒤에 순국한 부인 박차정 여사이다.(출처 : 하성환)  영화 <암살>에 나오는 대사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문구가 보인다.
밀양 시내 <의열기념관> 맞은 편 의열거리 벽화 속 인물은 약산 김원봉과 항일여전사로 전투 중 총상을 입고 뒤에 순국한 부인 박차정 여사이다.(출처 : 하성환)  영화 <암살>에 나오는 대사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문구가 보인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샛별 같은 존재다. 그가 남긴 운동의 발자취는 엄연히 존재하고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18년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분들만 대상으로 인명사전을 편찬한다고 했는데 의열단장 김원봉을 뺀 독립운동사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2024년까지 총 25권을 펴낼 예정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에 약산 김원봉을 맨 먼저 싣고 조속히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 관련 국가기관에서 해야 할 당면 과제이자 우선 사업이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임시수도 한구에서 중국 관내 최초로 창설된  군대인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약산 김원봉 조선의용대 총대장이다. 김원봉은  스스로 <군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해방 뒤 1946년 2월 26일 자신의 고향 밀양에 갔을 때도  <군인>이라고 표현했다.  해방 공간에서 <직업적 혁명가>로, 다시 북쪽에선 <정치인>, <행정관료>로서  고군분투하다 1957년  권력에서 배제당했고 1958년  김일성에 의해 <나쁜 놈>으로 호명, 숙청되었다.  숙청 직전 김원봉은 남쪽으로 피신을 시도했으나  끝내 체포됐고 감옥에서 통분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비운의 항일혁명투사 약산 김원봉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 받았다. 남북 모두 경직된 이념에 포획된 결과였다. 문제는 아직도 남북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남북 모두 역사 정의가 실현되기는커녕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역사왜곡이 존재하는 이유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임시수도 한구에서 중국 관내 최초로 창설된  군대인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약산 김원봉 조선의용대 총대장이다. 김원봉은  스스로 <군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해방 뒤 1946년 2월 26일 자신의 고향 밀양에 갔을 때도  <군인>이라고 표현했다.  해방 공간에서 <직업적 혁명가>로, 다시 북쪽에선 <정치인>, <행정관료>로서  고군분투하다 1957년  권력에서 배제당했고 1958년  김일성에 의해 <나쁜 놈>으로 호명, 숙청되었다.  숙청 직전 김원봉은 남쪽으로 피신을 시도했으나  끝내 체포됐고 감옥에서 통분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비운의 항일혁명투사 약산 김원봉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 받았다. 남북 모두 경직된 이념에 포획된 결과였다. 문제는 아직도 남북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남북 모두 역사 정의가 실현되기는커녕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역사왜곡이 존재하는 이유다. 

의열단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 및 제1지대장, 그리고 해방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의 자격으로 환국한 약산 김원봉에게 비록 늦었지만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해야 마땅하다. 그것도 반드시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그러할 때 우리 사회에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첫발을 내딛는 그날이 될 것이오. 나아가 우리 사회에 정의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운이 조금은 움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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