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해방을 꿈꾼 의열단 동지들

동작동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운암 김성숙 무덤(출처 : 하성환) 그는 약산 김원봉을 압박해 좌우통합을 촉구했고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귀국 후 해방공간에서도 탁치 파동 당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을 추구했다.  의열단 선전부장이었음에도 1969년 운명 직전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했다. 
동작동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운암 김성숙 무덤(출처 : 하성환) 그는 약산 김원봉을 압박해 좌우통합을 촉구했고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귀국 후 해방공간에서도 탁치 파동 당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을 추구했다.  의열단 선전부장이었음에도 1969년 운명 직전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했다. 

운암 김성숙은 승려 출신 항일독립운동가다. 승려 신분으로 다른 스님들과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중국 망명 후 의열단 선전부장으로 맹활약했다. 무명의 항일독립투사 김산(본명 장지락)은 운암에게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무명의 조선독립운동가 김산의 치열하고 순결했던 영혼을 처음 소개한 책, 님 웨일즈의 <아리랑> 표지(출처 : 하성환) 님 웨일즈가 중병에 걸린 김산과 스물두 번에 걸친 면담으로 기록한 책, <아리랑>은 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 변혁을 꿈꾸던 젊은 영혼들을 사로잡으며 크나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무명의 조선독립운동가 김산의 치열하고 순결했던 영혼을 처음 소개한 책, 님 웨일즈의 <아리랑> 표지(출처 : 하성환) 님 웨일즈가 중병에 걸린 김산과 스물두 번에 걸친 면담으로 기록한 책, <아리랑>은 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 변혁을 꿈꾸던 젊은 영혼들을 사로잡으며 크나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1922년~1925년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김성숙의 이명)이 바로 그 대목이다. 젊은 날 김산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운암 김성숙을 꼽았다. 그 다음으로 도산 안창호를 꼽았을 정도로 운암은 김산에게 지대한 존재였다.

서른세 살 짧은 생을 살다 간 항일혁명가 김산은 코뮤니스트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지만 운암은 코뮤니스트가 아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좌우 통합노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 오늘 소개할 정율성(본명 정부은) 또한 코뮤니스트로 일생을 살다 간 인물인데 젊은 날 김산처럼 운암 김성숙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정율성은 중국 상하이에서 운암 김성숙을 만난 이후, 정부은이란 이름 대신 음악을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고자 정율성으로 개명한다. '율성'(律成)이란 이름자가 '아름다운 선율'로 '아름다운 세상, 바로 조국 해방을 이루어내겠다'는 뜻을 담았다. 정율성은 의열단 입단 당시 가명이 유대진으로 정부은, 유대진, 정율성은 모두 동일 인물이다.

<항일혁명음악가> 정율성(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항일혁명음악가> 정율성(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정율성은 ‘팔로군 행진곡’,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작곡한 항일 투사다. 특히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 군대에서 군가로 애창되다 1988년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공식 명명된다. 오늘날 중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행사나 국가기념행사에서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율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중국인 100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게다가 위대한 중국 3대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정율성(1914-1976)은 62년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옌안송'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 '아리랑'에 비견될 정도로 서정성 짙은 곡인데 오늘날도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지만 대한민국보다 중국 인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한국 시민보다 중국 인민들에게 ‘중국 혁명 음악의 대부’로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바로 정율성이다. 그 말은 거꾸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율성은 아직도 낯선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명백히 항일 독립투사였음에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그런 배반된 현상을 낳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인민군 위문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 이전이지만 해방 공간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황해도당 선전부장으로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민군 협주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만든 것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러나 정율성 자신이 “조선의 흙이 나를 만들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가 나를 키웠다”고 고백했듯이 그 스스로 조선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항일의 방편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항일의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코뮤니즘을 수용했을 뿐이다. 당대 식민지 조선 청년들은 ‘중국 혁명이 조선 혁명을 가져온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신념으로 한때는 국민혁명군으로 북벌 전쟁(1926-1928)에 참여하거나 광동 코뮌(1927. 12)에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감수했다. 김성숙, 김산, 박건웅, 오성륜, 차응준, 김규하, 윤적묵, 양달부, 이용(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아들)을 비롯해 200명에 이르는 조선 청년들이 광동 코뮌에 총을 들고 참가했다. 그 결과 150명 넘는 조선 청년들이 광저우 혁명 과정에서 희생됐다.

다시 정율성으로 돌아가자.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아버지를 포함해 4남1녀 가족 전체가 항일독립투사 집안이다. 아버지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제일 맏형 정효룡(건국훈장 애족장)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리고 둘째 형 정충룡은 운남 강무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참전해 북벌 과정에서 전사한 항일 투사 집안이다.

셋째 형 정의은은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며 이육사가 경상도 지역 의열단원 모집책이듯이 정의은은 전라도 지역 의열단 모집책으로 활약했다. 누나 정봉은 역시 항일투사였다. 누님의 남편 박건웅 역시 김원봉과 같은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다. 박건웅(건국훈장 독립장)은 의열단원으로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정치부 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런 탓에 정율성 역시 의열단원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 형 정의은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난징시 전화국에 근무하면서 난징시와 상하이시 일제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 와중에도 주말마다 상하이에서 성악과 작곡, 그리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1년 정도 배웠다.정율성을 가르친 사람은 소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인 프리마돈나 크리노와였다. 정율성이 공식적으로 음악을 배운 최초의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다.

정율성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그런 재능을 키워갈 수 있는 환경을 가까이 접했다. 큰외삼촌 최흥종 목사 집에 있는 축음기를 통해 서양음악을 매일 만났다. 나아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서 풍금을 마주했다.

아버지는 임종 전 유언으로 "독립군이 부를 군가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평소에도 아버지는 “외적과의 싸움에서 최후의 결전에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린다”며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북돋우는 데는 우렁찬 군가 만한 게 없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우리에겐 아직 이런 군가가 없다”며 만돌린 악기에 심취한 아들에게 언젠가 넌지시 이야기하셨다.

의열단 선전부장 운암 김성숙은 수학했던 중산대학 학적부와 졸업사진(출처 : 김삼웅 선생이 쓴 <운암 김성숙 평전>에 실린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사진임). 중국의 대부 쑨원이 혁명가를 길러내고 혁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세운 중산대학은 본래 광둥대학이었으나 국공합작 기간 쑨원의 호를 따서 중산대학으로 개명했다.  김산, 박건웅, 김성숙을 비롯해 의열단 동지들이 수학했던 공간이다. 김성숙은 중산대학 시절 아내 두쥔후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의열단 선전부장 운암 김성숙은 수학했던 중산대학 학적부와 졸업사진(출처 : 김삼웅 선생이 쓴 <운암 김성숙 평전>에 실린 사진을 글쓴이가 다시 찍은 사진임). 중국의 대부 쑨원이 혁명가를 길러내고 혁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세운 중산대학은 본래 광둥대학이었으나 국공합작 기간 쑨원의 호를 따서 중산대학으로 개명했다. 김산, 박건웅, 김성숙을 비롯해 의열단 동지들이 수학했던 공간이다. 김성숙은 중산대학 시절 아내 두쥔후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할 당시, 정율성은 혁명 열기로 가득한 중국 청년예술인들 모임인 「오월문예사」 창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정율성은 자형 박건웅, 김산과 함께 김성숙이 주도하여 조직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김성숙 집을 자주 방문했다. 김성숙 아내 두쥔후이는 ‘싸오쩡’(젊은 정)이라는 애칭으로 정율성을 반갑게 맞이하며 즉석에서 버무린 김치로 정율성을 매번 반겼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극찬했다.

김성숙(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과 아내 두쥔후이, 맨 오른쪽 낡은 코트를 입은 인물이 정율성의 자형 박건웅이다. 박건웅은 의열단원으로 김성숙의 정신적 영향 속에서 운동노선을 함께한 평생 동지였다. 김산은 박건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자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박건웅의 처남인 정율성과 의형제처럼 숙식을 같이하며 친분이 두터웠다. (출처 : 김삼웅 선생이 쓴 <운암 김성숙 평전>에서 글쓴이가 다시 찍은 사진임). 두쥔후이의 자녀가 셋인 걸로 보면 1940년대 충칭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김성숙(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과 아내 두쥔후이, 맨 오른쪽 낡은 코트를 입은 인물이 정율성의 자형 박건웅이다. 박건웅은 의열단원으로 김성숙의 정신적 영향 속에서 운동노선을 함께한 평생 동지였다. 김산은 박건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자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박건웅의 처남인 정율성과 의형제처럼 숙식을 같이하며 친분이 두터웠다. (출처 : 김삼웅 선생이 쓴 <운암 김성숙 평전>에서 글쓴이가 다시 찍은 사진임). 두쥔후이의 자녀가 셋인 걸로 보면 1940년대 충칭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두쥔후이 스스로 충칭 임시정부 시절, 자신을 ‘조선의 딸’이라고 칭할 만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열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항일투사다. 혁명가의 아내로서 정율성이 부른 ‘아리랑’이나 정율성이 직접 작곡한 ‘오월의 노래’에 매료되었고 정율성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전투하는 여성’, ‘유격전가’에 크게 위로받았다. 그리하여 두쥔후이는 청년 정율성을 아낌없이 격려하고 지지해준 인물이다.

10살 나이 차이에도 김성숙과 김산이 혁명동지이자 의형제처럼 지냈듯이 정율성 또한 김산과 9살 나이 차이임에도 혁명동지로서 김산을 의형제처럼 따랐다. 특히 김산은 정율성의 자형 박건웅과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평안북도 같은 고향 사람이어서 정율성은 김산과 숙식을 같이하며 자주 김성숙 집을 드나들었다.

다만 김산이 ‘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가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것은 한때 일제에 피검돼 40일간 극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김산은 일제 스파이 혐의로 혁명동지들로부터 끊임없이 의심받은 탓에 옌안행을 승인받기까지 몇 달을 조바심을 내며 기다려야 했다. 반면에 정율성은 쉽게 옌안으로 갈 수 있었다. 옌안으로 가고자 하는 혁명 투사들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시안 팔로군 판사처인데 판사처 주임 린보취를 두쥔후이가 연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옌안에서 정율성은 당성을 높게 인정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섬북공학과 뤼신예술학원에서 공부했다. 졸업 뒤 이듬해 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복무했는데 이때 평생의 반려자이자 항일 동지인 정설송을 처음 만났다. 당시 정설송은 19세로 항일군정대학 여학생 대대장이었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율성과 정설송은 가까워졌고 1941년 항일근거지 동굴 속에서 조선의용대원과 팔로군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한다. 정설송은 저우언라이의 양녀로 중국 최초 여성 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정율성이 옌안으로 갔을 때가 1937년 10월경이었으니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수학, 물리를 가르쳤던 김산을 만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1938년 정율성은 중국인 불멸의 애창곡인 ‘옌안송’을, 그리고 1939년에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다. 이 두 곡은 정율성이 ‘항일혁명음악가’로 명성을 알리며 그 위상을 크게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율성은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까지 타이항산 전투(1942)를 비롯해 조선의용군 대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준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유무에서 갈려야 한다. 그게 학계의 중론이 되어야 함에도 우리나라는 그에 미치질 못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국가보훈처의 태도다. 보훈 행정을 책임지는 국가보훈처가 여전히 해방 후 이념의 흔적을 문제 삼으며 꼬투리를 잡는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가 건설에 참여했거나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편에 선 항일 투사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와 영화 『말모이』에서 윤계상이 열연했던 ‘조선 최고의 국어운동가’ 이극로가 그러하고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한인애국단 3인방이자 조선의용군 코뮤니스트 여전사 이화림이 그러하다. ‘항일음악가’ 정율성 또한 마찬가지다.

‘항일음악가’이면 그 자체로 항일 독립 유공 자격을 얻는 것이지 코뮤니스트인가 민족주의자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남북한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가 독립유공자 서훈의 판단 기준이 된다면 이는 독립운동사의 풍부한 내면을 스스로 외면하는 행태다. 이런 모습은 국가보훈처가 냉전 시절 이념의 도구로 기능해 온 구태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보훈 행정은 모름지기 역사 사실과 보편적 기준에 근거해야 객관성과 대중성, 그리고 지속성을 획득할 수 있다. 냉전 시대 경직된 사고에 갇힌 보훈 행정은 공동체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세대를 생각하고 독립운동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재구성하기 위해서도 국가보훈처가 하루빨리 거듭나야 한다. 21세기 풍경치곤 헛웃음만 나온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