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생 금장로 임재근

옥천의 40년 된 생활유산인 노포(老鋪), 신기닭집

한동네서 같은 일을 40년 한다는 건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 곧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유산인 노포(老鋪)의 점주들을 존경한다. 40년간 노포를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뵙기 전부터 인상 좋은 이웃 아저씨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신기닭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따님 수정씨의 인형같이 생긴 두 공주님과 아버님을 뵈면서 적잖이 놀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생기셨다. 영화배우 신성일과 닮으셨지만 더 잘 생기신 아버님. 아버님은 외모만 배우가 아니라 살아오신 날들도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더 입체적이고 진실했다. 우스갯소리로 명함이 10개도 넘었던 분,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던 이야기 속에 부모님 이야기, 사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는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못 잊는 아버님의 흉금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만남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 팔밭 일구며 가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그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저녁달이 꽉 찼을 때 홍역에 걸려 숨이 멎은 동생을 작은 아버지가 지게에 짊어지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동생은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숨을 쌕쌕 거리면서 죽음이라는 녀석과 필사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날 밤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내 나이 불과 열 살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10남매를 낳았지만 홍역이나 병을 앓고 꽃도 피우지 못하고 떠난 동생들이 있어 우리는 7남매로 성장했고 할아버지도 계셔서 11명 식구가 근근이 먹고 살았다. 산자락의 팔밭을 일구어서 입에 풀칠을 했으니 하루 두 끼는 고사하고 어머니가 밀어주시는 홍두깨 칼국수도 후루룩 후루룩 몇 번만 들이키면 대접 바닥이 훤히 보였다. 먹고 살길이 딱히 없어서 팔밭을 일구느라 다들 진땀을 뺐다. 산에 나무 베서 괭이로 파고 자갈밭에서 돌 들춰 겨우 농사지을 만한 터를 만들어서 고구마며 곡식거리들을 심었다. 다행히 고구마는 잘 버텨내서 쌀 구경이 어려운 우리들에게 구황작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풀죽 먹으면서 입에 풀칠하면 양반이던 시절, 세월을 탓할 수도 없던 가여웠던 때였다.

전쟁 직후라 사는 형편은 다들 앞집 옆집 별 볼일 없었다. 장리쌀 빌려먹느라 피고름을 짜는 집도 허다했고 우리도 몸으로 팔밭이라도 일구면서 안간힘을 쓰며 온 식구가 달려들었다. 중학교라도 다녔으면 최소한 일상의 불편함이 없으니 상급학교 진학은 그림의 떡이고 다들 일찌감치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10대 후반이면 가족의 생계를 부모님과 같이 책임지고 동생들을 돌보곤 했다. 나 또한 예외일수 없었다.

우리 남매들은 재용·재근·재순·재복·재희· 재정·재식, 재자 돌림이었다. 얼마 만에 불러오는 형제들 이름인가. 할아버지만 쌀밥 드셨는데 밥 먹을 때 곁눈질하면서 ‘저 쌀밥 한 톨이라도 내 차지가 있을까?’ 밥상 앞에서 눈치 보던 가난한 유년의 내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소싯적부터 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급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할 여건도 안되서 오덕리 금광, 명티리 탄광에서도 일을 했다. 탄을 직접 캐는 일은 안 했지만 탄광 폭파 사고가 적잖이 일어났는데 사고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다. 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들은 허다하다.

■ 웃음밖에 안 나오는 출생신고

장날에 아버지가 오촌 아저씨를 만났다.

“재근이 호적에 좀 실어.”

아저씨는 “그랴” 짧은 대답을 뒤로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호밋자루를 짊어지고 밭에 나가면 잊어버리신다. 그리고 한참 지나 문득 생각나면 면사무소에 들러 출생신고를 했다. 그나마 나는 ‘재근’ 이라는 이름이라도 제대로 올려 졌지만 사촌끼리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저 시절을 탓할 수밖에. 나는 호적이 늦어 늦게 군에 가게 돼서 남들 제대할 나이에 군에 갔다.

 

■ 군 생활, 보리 카투사 군견병

‘카투사’하면 폼 나 보이지만 나는 미사일 기지에서 보리 카투사로 근무했다. 목공 주특기로 입대했지만 군견병이었다. 군견훈련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세퍼트를 관리했다. 어린 시절에 집집마다 마당에서 잡견(일명 똥개) 한 마리 안 키우는 집은 없었지만 나는 유난히 동물들과 호흡을 잘 했다. 보리 카투사도 카투사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최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보다야 몸이 고단하진 않았지만 우리 또한 점호 전에 차라리 한번은 맞아야 편안히 잘 수 있는 그 시절을 보냈다. 군 생활할 때 ‘배우 신성일’ 소리 들으면서 연애편지도 받곤 했다. 눈부시던 그 청춘이 45년의 무심한 세월을 지나 ‘인생 칠십고래희’ 라는 70을 넘어섰다. 그 사이 고단한 시간을 담보로 여기까지 왔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찜통더위

1979년도 제대 후에 한창 해외근로자 파견 사업이 진행되면서 나도 그 대열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노동자들이 많이 파견되었다. 물론 신청한다고 다 출국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신원조회부터 짚고 넘어가는 항목들이 까다로웠다. 나도 돈 벌어서 가족들 호강시키고 싶은 마음을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차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우디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덥다는 말은 내내 들었지만 새벽에 공항에 내린 사우디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가마솥 같은 그 땅에서 그래도 뭐든 열심히 하던 평소의 소신대로 성실하게 일하고 매월 꼬박꼬박 고향에 돈 붙이는 재미로 흘러내린 땀이 소금이 되는 그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리야드 국제공항 건설 현장이었다.

1년을 마치고 동료들이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도 고향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때 나를 성실하게 본 회사에서 체류를 권유했지만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찜통더위에서 고생하며 보낸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시고 다 모아 놓으셨다. 당시 기백 만 원이면 지금 작은 집한 채 값이다. 탄광, 금광에서 벌었던 돈도 아버지께 드렸었는데 그 돈도 다 모아놓으셨다. 자식이 고생하면서 번 돈을 한 푼도 쓸 수가 없으셨나보다.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면 70이 넘은 이 나이에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그 마음의 깊이를 더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고생만 하시다 먼 길 떠나셨지만 나는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좋은 세상 만나서 노년의 평안을 맞이해서 감사하지만 부모님 생각하면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다,

 

■ 40년 전통 신기닭집이 시작된 첫마디 “처남 양계장 한번 해볼까?”

매제가 닭집을 해보자고 해서 병아리 천 마리 정도를 가져다 부화장을 열었다. 사실 만 마리는 갖춰야 뭘 해본다고 할 텐데 여건도 그리 넉넉지 않아서 소꿉놀이 하듯이 시작했다. 시작하면서 중신이 들어와서 아내 박숙자를 만났다. 자리를 잡기 전이라 아내의 고생은 말도 못했다.

임신한 몸으로 나를 돕고 아이들을 키우고 아내의 고생이 아니었으면 지금 신기닭집도 40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병아리는 온도에 아주 예민해서 연탄난로를 1년 내내 피우고 30도를 유지해야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에 밤샘은 기본이고 한 여름에도 연탄불 옆에서 서너 시간 그것도 쪽잠을 자야 한다. 한 달 반, 두 달 견디면 성계가 된다. 매제는 연탄가스를 맡아서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닭들한테 연탄가스 안 맡게 하려면 결국 내가 쪽잠자면서 불 관리를 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어쩔 수 없는 불상사들이 반드시 있다. 병아리들도 폐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고 손바닥만한 것들을 땅에 묻을 때는 자식을 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양계장을 하면서 소매를 시작하고 개고기와 돼지고기도 같이 취급했다. 짬밥이 남으니 남 주기도 아깝고 효율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병행을 했다. 그리고 신기리로 나와서 닭집을 운영하면서 ‘신기닭집’이 40년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한동네에서 세 번 옮겼지만 우리 건물을 지을 때는 그동안의 고생을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벽돌을 직접 나르면서 무거운 줄도 모르고 온 가족이 그저 행복해했다.

이웃에게 성실하게 보였던지 닭집을 차리고 밀려오는 손님들 덕분에 장사가 잘되는 시기에는 하루에 500마리도 넘게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 때는 아이들 돌볼 틈도 없었다. 인정이 허기를 채우던 시절이라 이웃들이 우리 아이들을 키웠다. 너무 잘 성장해서 내 자랑이 된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존경한다니 내심 고맙고 그만한 위안이 없다.

 

■ 내 이름, 석 자에 흠집 내지 않아

40년을 한결같이 큰 도마 위에 닭을 올려놓고 무거운 칼로 작업을 해서인지 직업병을 얻어서 어깨 수술을 했다. 가벼운 칼을 쓰면 조각이 많아 가시가 생기고 손님들이 드시기에 불편하다.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손님들이 편히 드실 수 있게 하다 보니 무거운 칼을 쓰게 되고 시간이 쌓여서 수술대 위에 어깨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깨 신경이 한 가닥은 끊어지고 한 가닥은 찢어졌다. 5-6개월 정도 휴식을 해야 하는데 손님들은 매일 문을 열고 들어와서 닭을 찾는다.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인사를 드린다. 이제 조금 쉬라는 신호다.

고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지금 내 곁을 지키는 아내는 너무 고마워서 나를 눈물짓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 남매 손주들은 내 기쁨이며 나를 웃게 만든다. 희로애락의 중심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꼭 안아주고 싶은 그이들이다. 평생 닭을 토막 내면서 살아왔지만 내 이름 석 자에 흠집하나 나지 않아 자존심 지키면서 살아온 내 지난 세월도 꼭 안아주고 싶다.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지난 40년을 위로해주기로 하자. 나에게 한 마디 건네 본다.

“임재근, 당신 참 열심히 살았어. 이제 좀 쉬게나. 수고했어.”

 

아빠 수정이에요.

너무 멋진 우리 아빠, 감사합니다.

어릴 때 아침마다 양계장에서 주무시던 아빠를 모시러 가는 그 발걸음이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아빠 품에 안겨서 집까지 오느라 아빠 사랑을 독차지 하는 시간이었거든요.

쪽잠 주무시면서 성실하게 사업 일구시고 저희들은 그 모습 보면서 배웠습니다.

아빠처럼 성실하고 멋있는 신랑을 만났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엄마 같은 멋진 엄마로 살고 싶습니다.

아빠, 엄마! 세상에서 제일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 이 기사는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원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30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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