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계셨다. 빈 콜라병에 어머니가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 글씨를 써서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계셨다. 어느새 간장액이 묻었나 ‘집’ 자가 희끄무리하게 번졌다. 자녀분들이 오기 전에 챙겨줄 것들을 미리 준비해두고 계셨다.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나, 그리고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여”

60년 넘게 담갔으니 어머니도 셰프님이다.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따라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다. 뭐 특별한 재주는 필요 없다. 그저 60년 넘게 담갔더니 진한 맛이 우러난다고 하시는 어머니. 마치 어머니의 인생처럼. 

 

 

■ 유복한 유년, 집안의 남자들은 다들 청성면 명티리 탄광 광부들 

우리 동네는 한마디로 잘사는 동네였다. 명티리 탄광은 석탄의 질이 좋아서 캐는 족족 돈이 됐다. 우리집은 아버지부터 작은 아버지, 오라버니들까지 다들 명티리 탄광에 다니고 있어서 월급날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밥상에 고기가 수북이 쌓였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우리 동네가 잘 살아서 향나무로 만든 집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집 남자들 월급날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청산장에 데리고 나가서 자수가 수놓아진 포플린 원피스도 사주셨다. 마치 부잣집 딸이 된 것처럼 마냥 좋았다. 보따리에 먹거리며 잡화들을 가득 담아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걸어오던 추억이 생생하다. 

호시절도 잠깐 큰 오라버니가 헛바람이 들어 강원도 횡성가서 금광을 한다고 돈을 끌어 모아서 고향을 떠났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쪽박을 찾는지, 거지꼴을 하고 야밤에 기어들어왔다. 아버지는 장남이라는 명분을 주면서 받아들이고 성실한 농부가 되어 살라고 하셨지만 오빠는 이미 헛바람이 불어 또다시 짐을 꾸려 야밤에 도주를 했다. 당연히 장롱 안에 있는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들고 나갔다. 밤에 기어들어와 밤에 다시 나간 오라버니. 그 이후로 우리는 그의 행방을 모른다. 아니 찾지 않았다. 아버님의 명령이었다. “정신 줄을 놓은 녀석은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 상록수의 ‘채영신’을 꿈꾸다 

얼떨결에 나와 여동생이 희생양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글 읽는 것을 좋아해서 성당에 꽂혀있는 책들을 가져와서 읽었다. 이광수의 ‘사랑’,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또 읽어서 책장이 너덜너덜 해졌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을 흠모하면서 4H 활동도 했다. 중학교 졸업이 전부지만 우리 손녀들도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할머니가 나라고 치켜 세워주니 그러마 하며 그 말을 즐긴다. 아니 그리 살려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래서 가끔씩 “우리 어머니 교수님 같은 말씀하시네” 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그저 안다는 데 그친다. 피토하는 절규를 하고 인생의 말미에 알게 된 그 만고의 진리는 글 속에 있는 양보다 우리 손끝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양이 더 많다. 

철학이 뭔지 알기나 하나 그냥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지만 이제는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 자장면, 홍두깨로 빚은 칼국수의 추억을 밀어내다 

국민학교 6학년, 서예대회에 학교 대표로 뽑혀 친구 몇 명과 선생님 인솔 하에 청주에서 초등학교에서 열린 서예대회에 참석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2층집에 올라가 보았고 자장면이라는 시커먼 면발을 먹어보았다. 어머니가 홍두깨로 밀어주시던 칼국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줄 알았던 나에게 자장면은 충격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달하고 짭조름한 맛은 물론이거니와 후루룩 넘겨 입 안을 감아 돌던 그 보드라운 감칠맛은 꿈꾸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황홀한 맛의 자장면집은 처음 구경하는 2층 집 이었다.

시골에서 초가집만 보고 살았던 나에게 2층집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엉성한 나무 계단이었지만 촌 아이들에게는 오르락내리락 할 때 마다 삐거덕거리는 파열음마저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들뜬 마음에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난 그날 자장면에, 2층집 그리고 나무 계단에 넋을 잃고 내가 대회장에 갔던 이유마저 잠시 잊어버렸다. 나에게 붓글씨를 직접 가르쳐 주셨던 교장 선생님께서 “옥주야 너는 1등이다”라고 확신을 주셔서인지 내심 내 실력을 과신하고 한껏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날 붓글씨 대회의 발제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였다.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자신 있게 써내려간 글씨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내심 대회 1등을 확정하고 있었지만 이내 그 대회에서 입선조차 못했다는 실망스런 결과를 듣게 되었다. 어이없는 실수로 ‘걸음’을 ‘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자만한 탓도 있었지만 호기심 많았던 내가 그날 난생처음 경험한 문화적 충격으로 대회장에서 이미 넋을 빼놓고 있던 결과물이었다. 

증손자 탄생, 시골에 아이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라 더더욱 기쁜날!
증손자 탄생, 시골에 아이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라 더더욱 기쁜날!

 

■ ‘채영신’의 꿈은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더 큰 열매를 얻다

스물세 살에 보은 사는 고모님이 중신을 했다. 보은에 참한 총각 있으니 선 한번 보자고. ‘채영신’ 처럼 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남편 정도의 조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버님의 한마디에 꼼짝 못하고 보은 읍내 다방에 선을 보러 나갔다. 그나마 나는 신식으로 선을 보았다.

추레한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앉아있는 폼 새가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나는 고모님과 같이 다방으로 들어섰고 양단 원피스에 고데기로 말아 올린 머리를 하고 도도하게 앉았다.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표정이다. 내 눈에는 반에 반도 안 차는 남자였다. 하지만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 촌 남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평강공주 되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봉의 공무원 마누라로 살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보은에서 농고를 나온 남편도 내가 바가지를 긁으면서 공부를 시켰다. 남편은 방통대까지 졸업하고 우체국에서 제법 높은 자리까지 올라 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하는 날 남편이 “다 당신덕분이오”했다.

나도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어 보지 못했지만 허리띠 졸라매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5남매 성장하는 동안에는 나는 나를 잠시 잊었다. 내가 나를 모른 채 숨겨두었다. 나를 찾고 아이들을 가르칠 여건은 만들 수 없었다. 시집와서 홀시아버지가 아닌 편찮으신 홀시아주버니를 모시느라 마음고생이 많기는 했다. 시집와서 보니 남편의 형님이 강원도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아주버님 모셔 와서 우리가 챙겨드립시다”라고 했다.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가족이란 게 무언가, 어려울 때 돕는 게 가족 아닌가. 물론 너무나 조심스러웠지만 홀로 죽어가는 아주버님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나이기를 포기하고 아주버님을 10년간 모시고 그 사이 아이들도 성장했다. 내 인생의 10년, 나는 없었지만 돌아보면 나는 그만큼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인생이 도전의 연속이라고 나는 지금도 중국어를 배우고 라인댄스도 배우고 있다. 제대로 하고 싶어서 개인 레슨 선생님한테 배웠다. 중국어 선생이 너무 야무지고 예뻐서 첫눈에 막내 며느리감 하면 좋겠다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잘 보여서 우리 아들 소개하고 싶었다.

결국은 성공! 남자친구 없는 정보를 얻어놨고 “괜찮은 총각 있는데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도 내 소개면 두말할 것도 없단다. 만나고 와서 아들도 선생을 마음에 들어하고, 선생도 그 총각(?)이 마음에 든단다. 선생한테 실토를 하고 중국어 선생은 우리 며느리가 되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내가 중매를 서서 막내며느리를 얻었다. 가족으로 만나는 인연은 운명이다.

온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도 잔치날이다.
온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도 잔치날이다.

 

■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두며 모든 숙제를 마치다 

영감 떠난 지 10여년, 영감은 칠순잔치 하고 두 밤 더 잠을 청한 뒤에 심장마비로 떠났다. 다들 너무 놀랐지만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사람의 생명이 코끝에 달렸으니 어느 순간 숨을 못 쉬면 거기서 그만이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나로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남에 의해 내 행불행이 좌우되면 서글프다. 지금은 동네 친구들이 더 살가운 가족이 되었다. 옛말 그른 말이 없다고 이웃사촌이 최고다. 자식들이 나를 간간이 챙겨주면 기적이고 고마운 일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낳고 기른 것으로 내 책임을 다한 것이다. 자녀들도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두었다. 장기기증도 해두었다. 이제 숙제가 없다. 영감 곁으로 가면 그리운 사람 만나서 좋고, 이승에 있으면 혼자서 책 읽고 산책하며 가을 하늘 쳐다보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친구들과도 정담을 나눌 수 있다. 간간이 울 새끼들 볼 수 있으니 좋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딱 좋은 나이다. 유행가 가사가 사랑하기 딱 좋다더니 살기도, 먼 여행 떠나기도 딱 좋은 나이다. 

밖이 시끌시끌 한 것을 보니 동네 친구들이 오는 모양이다. 우리 집은 사랑방이다. 열무김치에 국수나 말아서 먹어야겠다. 아, 들기름 넣어서 비빔국수를 할까. 아니 이제는 다들 나이 들어서 침이 말라 물국수를 찾으니 그래 오늘은 물국수로 하자. 멸치가 어디 있더라?

멸치 다시물을 올려놔야지. 이렇게 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여 오시게 친구들!

<막내며느리 편지>

어머니 
어머니께 콕 찍혀서 어머니 며느리 되었지만 저도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답니다.
어머니 같은 분이 시어머니라면 하구요.
우리의 인연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봐요.
열심히 공부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세상의 선배님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어머니, 자랑스러운 어머니
팔순 넘은 어머니와 며느리가 중국어로 얘기할 수 있는 고부지간 너무 행복합니다.
어머니 더 건강하셔서 우리 오래도록 모녀처럼 지내기로 해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 며느리로 콕 찍어주셔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우 아빠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요.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저희들과 함께 해요. 사랑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65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옥천신문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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