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은 반란도 사건도 아닌 <여순민중항쟁>이다!

추념사를 당독하는 필자
추념사를 당독하는 필자

 

 

살아남은 자

부끄러운 민족의 얼굴에 숯불을 끼얹는 여순항쟁 74주기!

뼈마저 진토가 되었을 그 긴 세월에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민족적 원한

오늘도 생생히 흘러내리는

님들의 핏물에 영혼을 적시고

어버이요 형제요 아들과 딸들 여기 머리를 숙였습니다
 

천년이 간들 만 년이 간들

총성만이 스러진 골짜기에 결코 풍화될 수 없는 순간들이 들리고 보입니다

핏물 뚝뚝 떨어지던 삿자리에 싸인 아들

시신을 담은 달구지 끌고 올 때

그 시린 부엉이 울던 밤의 기억을

여순 항쟁의 훈장처럼 배꼽 밑에 총 구멍 달고

죽어서라도 항거하느라 먼바다로 가지 못하고 수장된 애기섬

높은 파도를 역류하며

내 집 앞바다에 시신으로 들이밀던 그 처참하던 딸들의 아침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황소처럼

종손 좀 살려달라고 포승에 묶여 질질 울며 끌려가던

내 처절한 아비의 울음소리

승냥이가 뜯어 먹다 만 내 가족의 얼굴을 무슨 수로 잊으리요
 

손구락 총에 의해 과녁판이 되었던

수십 수백 발의 차라리 사이키델릭한 총성 울리던 그 대낮의 운동장을

불타는 로마 이후, 일찍이 인류사에 다시 없는

불타는 여수, 도시 하나가 공권력에 의해

전봇대 하나 없이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날들을 무슨 수로 잊을 수 있겠습니까

5월이면 은어가 뛰던 섬진강 따라 보성강 따라

강변 모래밭 자라가 숭덩숭덩 알을 낳는 오늘도

유족들의 가슴엔 여전히 시뻘건 피강물 흐르는 임인년 시월
 

외세의 야수를 향해 쓰라고

남루한 조국을 구하다 먼저 간 동학혁명의 의병들

피로써 오뉴월이면 우후죽순, 달을 찌를 듯 대나무로 환생했건만

내 겨레 내 동포를 향해

시퍼런 하늘에 대고 죽창으로 칼춤을 추던

광기의 역사를 도려내지 못하고

일흔네 번의 성상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님들의 이름에 덫 씌워진 빨갱이라 빨치산이란 오명

한 치 흑역사도 청산하지 못했던 후대의 오류가

부끄럽고 죄스러운 시대로 오늘날 이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어쩝니까
 

아-그러나

봉분은 뗏장으로 덮을 수 있으나 진실을 무엇인들 덮을 수 있겠습니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억울한 시신

높다랗게 쌓아 놓고 하늘을 향해 인신 공양 하듯 불태우던

머리 풀은 귀신처럼 새까맣게

하늘을 메우고 너울거리던 그 섬찟한 밤의 연기를

떼 지어 까마귀 내려앉던 지리산 골골마다 처형장에서

꿩의 다리가 거저 껑청 하겠습니까

남도 땅 어디 하나 님들의 피를 먹고 살을 먹고

피 울음 우는 동백과 자운영이 거저 자지러질 듯 붉게 피겠습니까
 

동족에게 총 칼 겨누라는 공권력에

결사항전으로 대항했던

국방경비 사령부 여수 제14연대에 뜻 맞추어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던 받은 것 없는 나라지만

내 나라 내 백성 밖에 없는  민초들이여!

여수 순천 보성 벌교 광양 구례 곡성 등, 올올이 곧은 남도의 민중들이여!

자주국방, 만민평등, 세계 평화를 기치로

정의와 민주를 이 땅에 심기 위해

이리 떼와 같은 제국주의에 항거하고 그 앞잡이가 된 폭압 정치에

죽음으로써 정면으로 도전했던 불굴의 정신

우리들 결코 저버리지 않고 면면히 이어갈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금가락지 하나 꾸어줄 수 있으나 자주국방은 절대로

꾸어올 수도 빌려줄 수도 없음을 님들의 피 값으로 깨닫는 오늘!

인류사에 다시 없을 잔인무도의 극치

타민족 대량학살로 부를 걸터듬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허상들이 

날뛰고 있는 지금

악귀 중의 악귀의 그 하수인들

다시금 이어가려는 악마의 공권력이 또한 태어났으니

님들의 원한을 방치한 죄과가

지금 한반도의 뇌수까지 차올랐습니다
 

왜세-거머리 같은 강도 국가, 허기진 사자, 미국 즉각 철수를

힘껏 외쳤던 정의로운 기개세여!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선대 대대로 내려오는 누대의 가난을 구제하고

불평등 타파를 외쳤던 애국 애민의 진정한 선각들이여!

빨갱이 빨치산이란 흑두건을 벗고

팔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표창하여야 할 가엾은 영령들이여!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전 인류의 이름으로 정명하오니

억울하고 또 억울하게 죽어간

시퍼런 청춘의 불꽃들이여, 이제 길을 잡으소서!
 

쓰지 못할 우물에서 폐가에서 당산나무 뒷그늘에서

골마다 음습한

재너머 처형장에서, 성황당에서 지나는 나그네  발길 휘감아 도는

피맺힌 원한의 귀신으로 도깨비로 출몰을 거두고 이제는

갇혀있던 족쇄를  풀고 삼도천 건너

解冤의 바다로 나아 가십시다

그래야 여기 머리 숙인

죽을래야 죽을 수 없어 하루 같은 평생을 살았으며

썩을래야 썩을 수 없는 기억을 가슴에 안고 74년

마르지 않는 피 흘리며 살아온, 당신의 눈 속에서 유전하던 피붙이들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이 남긴 유족들조차

어느 날엔가 하늘이 내리는 마지막 선고를 달게 받으며

이승을 떠나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님들이여, 그 육신

삼천리 금수강산의 꽃으로 해마다 철마나

환생을 거듭했던 억울한 원혼들이여 이제는

그 길고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진정 영혼의 해방을 맞이하옵소서

이젤랑 조국의 걱정 후예들에게 맡기고

평강의 꽃 가득한 하늘나라에 올라 영면하시옵소서!

 

 

김자현 : 시인, 소설가, 칼럼니스트, 민족문학 연구회 회원 /저서- 장편해양소설 <태양의 밀서> <이까르의 탄식> / 시집으로 <엿장수, 엔니오 모리꼬네> 등 다수

 

편집  : 김미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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