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죽음의 골목이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10시 15분경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삽시간에 죽음의 공간으로 변했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갑자기 사라진 배들처럼 그 시각 그 골목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허망하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애달프고도 애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미사일이 날라와 폭발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테러로 일어난 사고도 아니었다. 비행기에 탔다가 불시착한 사고도 아니고, 지진이 일어나 땅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압사였다. 경사진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밀집하여 일어난 사고였다.

대부분 10대와 20대의 젊은이였다. 대한민국의 귀중하고 소중한 자녀들이요, 해외에서 한국을 찾아온 꿈 많은 열정적인 젊은이들이었다. 얼마나 아까운 청춘들인가. 유학을 마치고 잠시 귀국한 젊은이도 있었고, 얼마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핼러윈 축제에 참가한 젊은이도 있었다.

부모들의 참담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떻게 키운 자녀인데, 이렇게도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단 말인가. 압사 사고로 인한 죽음은 실로 기괴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축제 기간에 그저 거리를 거닐다가 일어난 사고가 아닌가.

서구에서 유래된 행사라고 하여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핼러윈 축제는 젊은이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행사이다. 한류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마당에 핼러윈의 기원을 따져가며 차별하거나 냉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국 문화가 해외로 자연스럽게 전파되기를 바라면서 핼러윈 문화가 외래종이라고 하여 냉대하는 것은 문화적 차별에 다름 아니다. 본디 문화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십대와 이십 대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핼러윈 행사에 익숙해 있다. 핼러윈 축제에 참가했다고 하여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들은 다른 문화 행사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지자체와 정부 당국은 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문제가 된 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인 2017년과 2018년의 핼러윈 축제 기간에는 일방통행로로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사전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그런 사전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음은 물론, 밀집된 인파를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 서울시장이 바뀌고, 대통령이 민주정부에서 보수정부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행사를 주관하는 주최 측이 없어서 책임소재를 가리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자체와 경찰의 대비가 소홀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청춘을 찬양하는 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설레는 단어이다. 그 아름답고 설레는 젊은이들 156명이 하루아침에 죽음을 맞이했다. 비통하고 애통한 일이다. 세월호의 침몰과 앳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보며 트라우마에 걸렸던 대한민국 국민은 용산 핼러윈 참사에서 또 한 번 국민적 트라우마를 겪게 될 것이다.

출근 전에 이태원역 1번 출구 추모공간을 방문한 김경민(28)씨가 헌화하고 있다. 사진=안태호 기자 / 출처 : 한겨레 2022-10-31
출근 전에 이태원역 1번 출구 추모공간을 방문한 김경민(28)씨가 헌화하고 있다. 사진=안태호 기자 / 출처 : 한겨레 2022-10-31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 무서운 건, 나란 존재가 허무하게 사라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번 핼러윈 참사에서 젊은이들은 그 '허무하게 사라지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죽음, 죽음을 대면하기에는 아직 한참 못 미치는 젊은이들의 죽음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다.

31일 이태원역 1번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에는 시민들이 국화꽃을 놓고 묵념을 하며 희생자의 넋을 기렸다. 추모공간에 쌓인 국화꽃과 메모들은 전날 밤보다 두 배가량 늘었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편히 쉬고, 평안한 안식을 누리기를 빌 따름이다.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황당한 죽음을 어찌 다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단 두 마디가 떠오를 뿐이다.

오호! 애재라!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은 지 8년이 지나 또다시 발생한 황당한 용산 이태원 참사를 보며 국민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비관적인 상황에 처해서도 희망의 주문처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떤 변화든 영원하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취소될 수 있고, 모든 승리는 다시 싸워 얻어야 한다. 잠시 두려움 없이, 공포를 느낄 필요 없이 하나의 신체 안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달성했다고 자부하는 한국 사회는,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놓쳤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에 무엇을 구축해야 할지를 원점에서 다시 성찰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열의와 정성이라도 보여야 안타깝게 산화한 젊은 영혼들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위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편집 :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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