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헌상님 그리는 동생의 글

1979년 필자의 친형 조현상씨가 맏아들을 안고 있다.
1979년 필자의 친형 조현상씨가 맏아들을 안고 있다.

노래를 곧잘하는 큰아들이 부르는 가곡을 듣고 있자니, 젊은 시절 역시나 노래를 잘했던 형이 생각났다. 형은 노래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잘 짓고, 공부도 잘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가까스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나보다 8 살 많은 형 덕분이었다. 그런 형이 어느날부터 소식이 끊겼다. 내가 제대한 이후였던가. 사회생활이 풀리지 않아서인지 수십 년 동안 연락 두절이 되었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오직 하나뿐인 혈육인데 이렇게 생이별하다니! 너무 외롭고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나 혼자 삶에 매이고 바빠서 정신이 없다가 조금 한가한 날이 되면 도대체 생사를 알 수 없는 형이 야속하고 걱정되고 마음이 터질 듯 괴로워졌다.

큰아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 형 어디 있는 거여~! 소식도 없고, 너무 보고 싶다. 어디서 뭘 하고 있어. 연락 좀 해. 좀 만나자~!” 한 번 터진 울음보는 그칠 줄 몰랐다.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흑흑거리며 울고 또 울었다. 올해가 형의 칠순인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고 있는가.’

그 순간 몸을 뒤척이는데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닌가. 아! 넋을 잃고 천장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베개에 떨어졌다. 육십 평생 꿈에서 깨어나 눈물 흘리기는 처음이었다. 형은 30년도 훨씬 전, 37살 이른 나이에 하늘로 떠났는데, 왜 나는 아직도 꿈 속에서 헤매며 형을 찾고 있는가. 아직도 나의 무의식은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12살 때 어머니는 43살로 돌아가셨다. 지독한 가난으로 영양실조와 알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다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형은 그때 갓 스무 살이었다. 삼일장을 치르고 단칸방에서 아버지와 형과 나, 삼부자가 피곤함에 절어 잤다.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형이 꿈 이야기를 했다. 형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동생을 잘 키워라” 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내가 눈에 밟혀 눈을 감지 못하셨나 보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동생 양육을 부탁받았으니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형은 그 부탁을 잘 수행하였다. 동생을 잘 가르쳐 어엿한 직장인(은행원) 을 만들었으니 천국에서 어머니를 만나 칭찬받았을 거다. 어머니와 형을 생각하면 이생에서 고생만 하다 떠나서 참으로 불쌍하고 애처롭다. 나 역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너무 일찍 헤어져서 외로운 세월을 많이도 헤치며 살았다. 황혼에 드는 나이가 되니 외로움이 그리움 되어 세상에 없는 형을 찾고 있나보다.

2022년 6월 형의 둘째아들 대대장 취임식 때 함께한 가족 사진. 맨왼쪽 형의 맏아들, 세번째가 둘째아들, 오른쪽 두 사람이 필자 부부이다.
2022년 6월 형의 둘째아들 대대장 취임식 때 함께한 가족 사진. 맨왼쪽 형의 맏아들, 세번째가 둘째아들, 오른쪽 두 사람이 필자 부부이다.

나는 1977 년 다니던 은행을 휴직하고 군대에 갔다. 하사관 훈련을 받던 그해 11 월, 이리역(익산역) 열차 폭발 사고가 났다. 59 명이나 죽고 많은 사람이 다치고 재산 피해도 났다 형은 사고 즈음 익산역 근처에서 조그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사고 피해 보상금을 받아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운좋게 빈민의 굴레를 벗어나는 이들을 눈 앞에서 보면서, 정작 자신은 돈이 없어 발만 동동거리다 화병이 생긴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약한 술은 얼마나 마셨을까? 형은 군에 있는 나에게 그 괴로운 심경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1980 년 군복무를 마친 내가 서울로 복직하여 타향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 형의 병은 깊어갔다. 그래도 젊은 나이이니 ‘죽을 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1984 년 여름, 형의 부고를 받았다. 험하고 힘든 세상에 유일한 형제요, 친구처럼 의지하고 살면서 '언젠가는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겠지!' 희망을 붙들고 살았는데 철석같이 믿던 기둥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삶은 허무한 것이구나, 허망하구나, 하늘은 있는 것인가?' 처음으로 세상을 회의했다. 그렇게 형이 떠난 뒤 형수와 두 아들은 30 년 고난의 길을 헤치며 살았다. 지난 6월 형의 둘째 아들, 5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내 조카가 어려운 성장기를 잘 극복하고 한 육군 부대의 대대장이 되었다.

취임식 때 형을 대신하여 우리 부부가 참석했다. 연병장 사열대에서 늠름한 조카와 부대원들의 사열을 받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서 있다니…. 5년 전 꿨던 꿈이 다시 생각나면서 비감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취임식이 끝나고 피로연에서 준비해 간 축시를 낭독했다. ‘고난을 이긴 자여! 이젠 꽃을 피워라!' (이 글은 11월 27일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https://cdn.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84 )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조형식 객원편집위원  july2u@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