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주명순님 25주기 기리며
해방 전 탄광 노동자로 가족 부양
한국전쟁 때 ‘남로당 사건’ 연루
60년대 혁신정당 활동으로 구속
75년 ‘오작교’ 조작 사건 옥살이
95년엔 범민련 통일운동 이끌다 고초
조의금도 통일운동단체에 내놓아

1972년 서울 응암동 집 앞마당에서 어머니 주씨와 함께한 나

이상기후 탓에 초여름인 듯 일찍 피어난 모란꽃을 보면서 어느새 25주기를 맞는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어머니 주명순님은 여러 차례 겪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다 1998년 6월 75살로 운명했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14살 때인 1937년 일제 강점기에 최북단 회령 아오지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오빠를 대신해 부모님을 봉양하고 어린 조카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유창한 일본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아 탄광 전화 교환수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여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에서 활동했습니다.

나의 어머니 주명순

 

하지만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도 아닌 오직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통일운동의 길에 나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1951년 전쟁 와중에 <세계통신사> 기자로 서울에 머물다 이듬해 부산에서 ‘남로당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수난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대구교도소에서 3년6개월 옥살이를 마친 어머니는 남쪽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세력들에 의해 이른바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또다시 구속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최백근 선생은 대법원도 거치지 않은 채 사형을 당했습니다.

1961년 의사인 아버지(고 박남업)와 결혼한 어머니는 대구교도소 수감 중 배운 봉제기술로 서울 신촌의 양장점에 취업했습니다. 1967년에는 가게를 인수하여 ‘진달래 양장점’을 개업했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사형당한 우홍순 선생의 부인(강순희)과 무기형을 받은 전창일 선생의 부인(임인영)도 함께 일했습니다. 얼마 전 강순희님께서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느 날 양장점에서 월급을 받아 집으로 가던 중 봉투째 잃어버려 망연자실했는데 어머니가 한 달 치 월급을 다시 주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 고마움이 두고두고 삶의 향수가 됐다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통일운동 양심수 가족들을 비롯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 뜻을 모아 ‘반지계’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1975년 8월 치안본부는 단순한 부조 모임을 이른바 ‘오작교 사건’으로 조작했습니다. ‘주범’으로 몰린 어머니는 3년6개월형을 받아 대구교도소에서 세 번째 징역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서울 응암동에서 자혜의원을 열고 있던 아버지도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으로 함께 구속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초등 1학년, 어린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참담한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옥살이 후유증으로 1989년 10월 끝내 별세했습니다.

1980년대 말 수십 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출소하자 어머니는 아끼고 아껴 모아둔 3천만원을 양심수후원회에 기부해 거처를 마련해드렸습니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운영했던 학림장학재단도 이어받아 구속자 자녀들의 학업을 지원했습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의원을 하다 한국전쟁 직후 피난 내려온 할아버지는 1960년대 작고하실 때까지 드러나지 않게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1995년 11월 어머니는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으로 활동하던 중 또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습니다. 그나마 병보석으로 출소한 뒤 1997년 북녘에 큰물 피해가 발생하자 앞장서 후원운동에 나섰습니다.

네 차례 옥고 끝에 몸을 가누지 못할 상태에 놓인 1998년 어머니는 자신을 질책하듯 글을 남겼습니다. “학림장학재단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능력이 있다면 민족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민중을 위하여 죽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픈 나로서는 너무나도 능력이 없어 조국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조국과 민족이 통일될 때까지 내 목숨이 붙어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 “돈 몇 푼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그 이상의 일을 할 것이 없는가?”라고 절규하셨습니다.

1995년 4월 ‘인혁당 조작 사건’ 희생자 추모비 제막식에서 유족들과 함께한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시절의 고인(맨 오른쪽)

마지막 순간 어머니가 당부하신 대로 조의금까지도 통일운동에 모두 기증했습니다. 작고 직전에도 1천만 원을 통일운동단체에 기부한 사실은 한참 뒤에 알게 됐습니다. 덧버선 한짝도 기우고 또 기워 신으며 검소했던 어머니를 기억하고 싶다며 유품을 가져간 분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부모님 기일이 다가오면,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 땅을 가보고 싶어집니다. 그럴수록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북녘땅, 분단의 참혹한 현실을 실감합니다. 통일은 염원도 소원도 아닌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입니다. 분단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선택하셨던 그 헌신적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 민족분단의 아픔을 안고 삶을 바치신 이름 없는 희생자 모두에게도 진정한 애도를 전합니다.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온> (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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